〈 186화 〉 시간은 흐른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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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을 직접 이끌고 온 상회의 머리, 레너드에게 도발적인 인사를 한 다음 날.
지온의 세 아이들은 레너드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발걸음을 옮겼고, 상단주에게도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수면제가 든 식사를 모르고 먹은 뒤, 마탑에서 개발한 마나의 흐름을 끊는 족쇄를 팔에 찬 채 작고 어두운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조금 전 까지 잠이 든 채로.
“ …네 생각대로 일이 터지긴 했는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
“ 어떻게 하긴. ”
잠시 말을 끊기 무섭게 우두둑! 하고 섬뜩한 소리가 잠깐 들리는가 싶더니, 튼튼한 밧줄에 묶인 채 뒤로 젖혀져 있던 닉스의 팔이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곤 마치 아이가 배꼽인사를 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를 취하더니, 다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빠졌던 어깨를 강제로 끼워 맞추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고통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비명 소리 하나 내질 않았다.
라케시스는 물론 클로토마저 눈을 살짝 크게 뜰 만큼 놀랄 만한 모습이었다.
“ 나가야지. ”
“ 그래. 나가야지. 그런데 까딱 잘못했으면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해? 제국상회주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
“ 죽어? 우리가? 설마 그럴 리가. ”
닉스는 라케시스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부라린 채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자,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라케시스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며 몹시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으나, 이어 말하는 닉스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릴 수밖에 없었다.
“ 우리를 이용할 생각이 가득한데다, 뒤를 따라 온 분까지 있는데 왜 죽겠어. ”
“ 그게 무슨 소리야…? ”
“ 저번에도 말했지만 제국상회는 기울어진 세를 다시 일으킬 생각으로 독기를 품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곧바로 죽이면 분풀이 한 번 하고 죽겠다는 말 밖에 안 되잖아. 이해득실을 따지는데 이골이 난, 거기다 상회를 다시 일으킬 생각일 상인이 그런 짓을 할까? ”
더구나, 닉스는 지온과 헬레나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붙여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을 것을 확신했다.
설령 그 명령대로 움직이는 누군가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 네 말대로 누군가 따라왔다면 지금쯤 구해주고도 남았을 거야. 그런데 이렇다는 건…….”
“ 아직 그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다거나, 혹은 정말로 따라온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나는 위험하지 않아서 나서지 않았다고 봐. ”
라케시스는 추측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덤덤히 말하는 닉스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했으나, 묘하게도 그 말에 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적당히 애 같은 모습을 보여 대하기가 편했으나, 지금은 사람이 바뀐 것 마냥 너무 차분했던 탓이다.
차분하다 못해 손이 얼 것 같이 차가울 정도로.
“ 거기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위험하지도 않잖아. 우리가 마나를 쓸 줄 안다는 걸 알았다면 모를까. ”
닉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 묶여있던 두 손에 푸른 오러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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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미리 예견된 일이라는 듯 겨우겨우 명줄을 유지하던 제국상회가 완전히 몰락했으며, 레너드는 그 책임을 물러 노예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 측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전후사정을 파악하며 심심한 위로가 오가기도 했는데. 제국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일 또한 이로 인한 결과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각자 일거리를 주거나 알트람 상회에 넣는 등 제법 관대한 처분을 내려, 불만의 목소리가 몹시 줄어들었다.
제국에서 왕국으로, 그것도 크라우저 공작령에서 새로 살아야하기에 불편함 점이 없잖아 있을 테지만 곧 가라앉을 테지.
“ 이로써 이번에 일어난 일도 다 마무리가 되었구나. ”
탁. 헬레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집무실 책상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앞에 선 닉스를 응시했다.
제법 시끄러운 일을 혼자만의 생각으로 일으켰음에도 화를 내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 그 말씀은… 제게 줄 벌을 정하셨다는 뜻인가요? ”
“ 벌…? ”
멋대로 행동한데다 일이 끝나고 처분을 하겠다던 헬레나 탓에 풀이 죽은 채 물었더니, 정작 그 당사자가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닉스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났다.
요 근래 들어 바빴다고는 하나, 설마 헬레나가 스스로 꺼낸 말을 잊어버렸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딘가 건조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엄연히 사랑하는 남자의 씨로 배 아파 낳은 아들과 이어진 일이었으니까.
“ 벌을 왜 줘? ”
그래서 더더욱 헬레나가 왜 저런 모습을 보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이번 일이 끝나면 제 처분을 결정하신다고 들었으니까요……. ”
“ 그건 그냥 해 본 말인데? ”
“ …예? ”
닉스로서는 답을 들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답이 워낙 기묘했던 탓에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라면 모를까, 닉스 본인에게는 살갑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던 탓이다.
헬레나도 닉스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그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생각을 고치되,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우선 저쪽에 앉으렴. 마주보고 얘기하자꾸나. ”
“ 아… 네. ”
어색하고, 이상하고, 혼란스럽지만 어쩌겠는가. 공작이자 어머니가 권한다면 따를 수밖에. 닉스는 그리 생각하며, 순순히 헬레나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에 들른 적이 몇 번 있어 영 어색하지만은 않았지만, 이곳에서 마주보고 앉은 적이 거의 없어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 그래… 너를 어떻게 벌할지를 알고 싶다고 했었지. ”
툭. 헬레나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지켜보던 닉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네. 그런데 그냥 던져 본 말씀이라고 하셔서 당황스러워요. ”
“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면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말해야겠네. ”
헬레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랫동안 어르고 달래본 적이 없어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를 생각하면 어색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일단 말을 꺼내기는 해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더 이상 길게 끌지 않기 위해서라도.
“ 이번 일에 네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 행동과 명분이 그럴 듯하다 생각했기에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을 거란다. 다만, 만약에 네 개인적 욕심만을 채우고자 몸을 던졌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 ”
“ 그럴 듯… 했나요? ”
“ 응. 점점 기울어가는 제국상회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신경을 끄고 살았지만, 네가 말한 저력이 있는 만큼 언제든 부흥할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그 부흥이 우리 가문에 큰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그 싹을 미리 뽑아두자는 네 생각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
정작 미래의 크라우저가 어찌 되던 지온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건재하면 그걸로 좋다.
헬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닉스 앞에서는 적당히 말을 꾸몄다.
공작가를 이어갈 아이 앞에서 지금의 공작가를 이끄는 사람이 방종이라 느껴질 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
“ 그런가요……. ”
헬레나의 속내를 훤히 읽을 수는 없지만 잘 넘어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닉스는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아이답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몹시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약하지만 칭찬까지 받아서 더더욱 긴장을 놓은 듯 했다.
“ 아, 어…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
그래서 최대한 감사함을 표하고자 어려운 말까지 써가며 고개를 숙이니, 헬레나가 속으로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골적으로 아부까지 해가며 안심하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내질 않았을 뿐이지.
“ 아부가 많이 늘었구나. 그렇게 좋니? ”
“ 어… 솔직히 좋아요. ”
솔직해서 좋구나. 헬레나는 그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렴. 설령 철저한 계산을 마친 후에 행동에 옮겼다 하더라도. 물론… 때에 따라서는 자기 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때 그러지 말란 거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
“ …네. 죄송해요.”
닉스는 자기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뜻을 잘 알았기에 반발하는 기색 하나 없이 사과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을 테지만, 헬레나가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니 더더욱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헬레나도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며 칭찬해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점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닉스도 입에 담을까 망설이던 내용을 헬레나 앞에서도 이야기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
“ 저… 어머니.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
“ 부탁? ”
자신이 살갑게 대하지 못한 탓에 평소 벽을 느낄 만큼 어렵게 느끼던 아이가 부탁이라.
헬레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이 생겼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라도 한 번 들어는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래. 말해보렴. 어떤 걸 부탁하려는지. ”
“ 그게… 이번 제국상회의 딸을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
“ 딸이라면… 그 붉은 머리칼의 여자아이를 말하는 거니? 분명 알트람 상회에서 잡일을 하라며 넣었던 것 같은데……. ”
제국상회를 이끌던 남자의 딸이라 기억에 남은 것일지도 모르나 여전히 기억력이 좋기는 하구나.
닉스는 새삼 설명할 거리가 줄었음을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음에 들었거든요. 죄는 상회주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있지, 상회 일과 거리가 먼 딸까지 있던 건 아니니까요. ”
“ 으음… 네 말이 맞기는 해. 그래서 상회를 해체하는 대신, 남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생각하기도 하고. ”
“ 그건 그렇죠. 그냥 내버려두고 알아서 살 길을 찾도록 해도 됐을 테니까요. ”
닉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헬레나도 내심 그러길 잘했다 생각하며 차분하게 물었다.
“ 그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네 질문에 대한 답을 주자면…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단다. ”
“ 정말이세요?! ”
흔쾌히 허락이 떨어지자 닉스가 기뻐 목소리를 높이다 헬레나의 다만, 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 하지만, 네가 만약 그 아이를 단순한 노리개로서 얻고 싶은 거라면 생각을 바꾸라고 하고 싶구나. 귀족 사회가 문란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이곳저곳 섞는다는 그림자를 안고 있기는 하나, 너까지 그러지 않았으면 해. ”
노리개라니. 그럴 리가 있나.
닉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소리 높여 말하려다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얻고자 한 발 물러나는 침착함과 눈빛에서 보이는 어두운 집념이 결코 아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아마 보통 부모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두렵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막상 어머니인 헬레나는 그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오히려 닉스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내 피를 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노리개로 쓰려고 부탁드리는 것이 아니니까요. ”
“ 좋아. 그렇다면 내가 조치를 취해 줄게. 그러니 오늘은 수업을 쉬고, 그 아이가 올 때 까지 적당히 놀면서 기다리고 있으렴. ”
아참. 헬레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닉스의 집착이 더 심해질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리라 직감했지만, 그 상대가 지온이 아닌 보통 여아인 이상 겁을 먹고 멀리하다 파탄 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에.
“ 닉스. 너도 나를 닮았을 테니 집착하지 말라고는 말 안하겠지만… 정도를 잘 조절하렴. 조금씩, 조금씩 그 여아의 생각을 덧칠해서 네가 없이 못 사는 몸으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하렴. 알겠니? ”
아들이 집착의 씨앗을 보이면 어르고 달래거나 훈육을 통해 그 싹을 뽑으려 애를 쓰겠지만, 헬레나는 달랐다.
오히려 집착으로 사랑을 얻은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집착하도록 권장하되 그 정도와 방향을 바꾸도록 할 뿐이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그 덕분에 닉스가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이해와 함께 마음의 거리감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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