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시간은 흐른다 #4
* * *
“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여서 참 기쁘군. 조금쯤은 시들 거라 생각했는데……. ”
쪼르륵.
나는 이스의 집무실에서 그가 주는 차를 공손히 받아들인 뒤,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희끗희끗한 백발이 군데군데 드러나고, 이마에 주름이 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정정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세월이 저만큼이나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부끄럽습니다. 어찌 보면 나이에 맞지 않게 주책 떠는 것처럼, 혹은 자제력이 없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을 텐데……. ”
“ 자제력을 내세운답시고 다른 영애들이나 부인들과 엮이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나. 물론, 그 점을 빼더라도 전혀 꺼림칙하게 보이질 않으니 안심하게. ”
이스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귀족사회의 그림자를 꼬집어 말하며, 태연자약하게 찻물을 들이켰다.
다른 귀족들이 들었다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을지 모를 만큼 비판 수위가 높았으나, 내게는 제법 큰 위로가 되었다.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안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 걱정이었으니까.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
“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감사할 지경이지. 대를 이을 아이도 낳았고, 그 아이가 잘 자라고 있으며, 가정에도 불화가 없으니 몹시 평화로워. 이게 다 자네 덕분일세. ”
“ 그건 너무 과찬이십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요. ”
“ 지금도 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게 좀 더 친근감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따금 이런 농담을 던질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 이런 농담을 들었을 땐 정말 이스가 맞나 싶어 의심을 하기도 했고, 사람을 붙여 감시를 해야 하느냐는 고민도 했었는데……
“ 아하하…….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드네요. ”
“ 그러면 더 좋지.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일 테니까. ”
아무튼. 이스는 아직 따뜻한 찻물이 많이 남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 자네 기색을 보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군. 말해 보게나. ”
“ 언제 봐도 정말 귀신같으십니다. 이러실 때 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게 벌써 한 두 번이 아니네요. ”
“ 비록 하루에 얼굴 마주치는 시간이 썩 길지 않다고는 하나, 그렇게 살아온 지가 벌써 몇 년인가? 알만도 하지. ”
그건 그렇지. 나는 이스가 했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생각하며, 앞 뒤 잴 것 없이 곧장 본론을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까 고민하던 내게 큰 도움을 준 셈이라 덥석 물어주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 크흠. 그러시다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 말해 보게나. ”
“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닉스를 알트람 상단의 상행에 끼워 보내면 어떨까 싶습니다. ”
“ 닉스를?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그런지 이스가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있던 공작의 아이를 대뜸 상행에 내보낸다니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해보면 헬레나도 처음 내가 이렇게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의문스럽게 바라봤으니, 새삼 부모자식끼리 통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 공작령이 넓다고는 하나 결국 한 울타리인데, 요즘 들어 그 울타리에만 머무는 것이 싫증이 나나 봅니다. ”
“ 음… 갇혀 있는 느낌이라 답답함을 느낀다는 거로군.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
“ 그래서 헬레나와 이야기를 마쳤고, 이렇게 장인어른의 허락을 얻으러 온 겁니다. 닉스가 저와 헬레나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장인어른이 기다리시던 손자이기도 하니까요. ”
나는 이스가 은근히 뒤를 이어갈 아이를 바래왔음을 잘 알고, 그에 걸맞게 잘해주고 있기에 따로 허락을 받고자 했다.
우리가 이렇게 정했으니 이렇게 하겠다고 통보만 해도 그만이겠지만, 이런 일을 알리지 않을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영지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볼 수도 있을 테니.
“ 나를 배려해준 마음은 고맙네. 그렇기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만……. ”
“ 말씀하시죠. ”
“ 목적지와 안전, 그리고 닉스만 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주게. ”
현재 공작가를 이을 유일한 아이이니 어디로 갈 건지, 그 길이 안전한지 알아보려는 마음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기도 하다.
단지 마지막 질문만은 그와 달랐기에, 이스의 안목이 여전히 흐려지지는 않은 듯싶었다.
“ 우선 라케시스와 클로토도 같이 나가게 할 예정입니다. ”
“ 아이 셋을 한꺼번에 보내겠다는 건가? ”
“ 예. 라케시스야 원래 상단을 따라 나다니는 경우가 많고, 클로토도 제 어미를 닮아 벌써부터 연구에 목을 매는 중이라……. ”
“ …그 아이의 연구욕은 대견하다 못해 한숨이 나올 지경이지. ”
이스도 클로토가 마법에 얼마나 미쳐 사는지 잘 아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마치 말로만 듣던 이브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재현하듯 살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약간 기겁할 만도 하지.
“ 그렇지요. 그리고 이번 상행은 블루네일 왕국 쪽을 목표로 할 생각입니다. ”
“ 블루네일? 삼 년 전에 내전이 끝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위험한 지역이 아닌가? ”
“ 예. 일단 정리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라 안에 혼란스러운 사정이 많으니, 다른 국가보다 위험할 수도 있지요. ”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 세 아이가 힘을 합하면 어지간해서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헬레나에 비해 부족할 뿐 헬레나 밑에서 싸우는 법을 익히는 닉스나, 이미 여러 번 상단을 따라 간데다 정령마법을 쓸 줄 아는 라케시스도 있고, 서클마법을 쓸 줄 아는 클로토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스의 눈에는 그런 능력을 빼더라도 작기만 한 아이들로 보였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눈치였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아니면 헬레나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은 탓인지.
나는 그 모습이 주책이라기보다는 당연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다만, 그렇기에 엘렌에게 부탁해 몰래 뒤를 밟게 할 생각입니다. ”
.
“ 가만 보면 대공님도 은근히 냉정하신 면이 있으셔. ”
아이들이 상단을 따라 나서고 며칠이 지난 후.
엘렌은 딸인 라케시스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뒤를 쫓고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도 지온과 떨어지는 것이 서운했지만,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에 가장 잘 맞는다며 간곡히 부탁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돌아왔을 때 거친 상을 준다는 말에 혹한 것도 있지만, 아무튼 아이들을 위해 이번 일을 하게 되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블루네일이라. 엘렌의 뇌리엔 결국 자기가 고용되었던 진영이 아닌, 황태자가 왕으로 등극한 왕국 상황이 떠올랐다.
대략 10년 이상이 넘는 오랜 내전이 끝난지 3년 정도 밖에 안 되어 그런가, 아직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장소다.
길목 곳곳에 끓는 도적떼는 제법 빈번한 수준이었고, 폐허가 된 도시 곳곳을 다시 수리하느라 어수선한 등 여러모로 틈이 많았기에.
“ 실례지만, 말에서 내려 신분 증명이 될 만한 것을 제시 해 주시겠습니까? ”
앞서 상단을 이끌고 떠나간 알트람과 달리, 엘렌은 혼자 움직이는 몸이기에 검문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비록 아무런 사건도 없이 평화로워 정말 검문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도 없을 노릇이다.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려는 이가 누구인지 정도는 파악해 둬야 나쁜 일이 터질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테니.
“ 아, 네. ”
어딘가 불편해하는 시선은 여전하지만, 꺼림칙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 많이도 바뀌었다.
엘렌은 새삼 지온이 자기를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에 감사하며, 말에서 내린 뒤 수수하기 짝이 없는 바지 주머니 안에서 신분패를 하나 꺼내들었다.
몰래 따라가는 것이기에 보통 엘프들이 몸에 걸칠 만한 복식이었으나, 떡갈나무로 만든 패는 한 눈에 보아도 고급품임을 엿볼 수 있었다.
거기다 손바닥 만 한 육각형 패에 크라우저 공작가 특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면 깜짝 놀랄 법도 했다.
“ 이, 이건 공작가의…! 실례가 많았습니다! ”
크라우저를 증명하는 패를 가진 이를 검문하겠답시고 말에서 내리게 만들었으니 죽은 목숨이 아닐까?
가벼운 무장을 한 채 검문을 하던 병사는 오늘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며, 황급히 손에 쥔 패를 엘렌의 손에 들려 주었다.
“ 실례라니요. 혹 뒷돈 같은 것을 받으려다 정도가 과했다면 모를까,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하고 계신걸요. 개의치 마세요. ”
“ 가, 감사합니다……. ”
엘렌은 여느 귀족 영애보다 격식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말투를 써 가며 병사를 위로한 뒤, 손에 들린 패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거리를 둔 상태에서 검문까지 받았으니 따라잡지 못할까 싶어 초조할 만도 했으나, 마음이 약간 소란스러울 뿐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그 덕분에 문을 지키던 병사는 죽었다 살아난 기분을 맛보며 빛바랜 가죽 갑옷 위로 가려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
“ 와…! 바깥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
막 소테른 왕국의 국경을 벗어난 늦은 오후 무렵. 닉스는 천막에 가려진 마차의 짐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옆과 천장이 크고 두터운 천으로 막혀 있었으나 앞과 뒤가 뚫려 있어 풍경을 보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 밖에 나오는 게 그렇게 좋아? 공작령을 나오고 나서부터 계속 그 소리네? ”
“ 좋지! 너도 처음에는 안 이랬어? ”
“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라케시스는 닉스의 질문을 듣자 목이 턱 막힌 나머지, 조금 줄이라고 핀잔을 주려다 답을 얼버무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도가 조금 덜했을 뿐이지, 닉스와 별 다를 바 없을 만큼 들떴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클로토만큼은 짐칸 옆면에 기대 쿨쿨 자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바깥을 나선다는 데 아주 약간 들뜬 모습을 보였으나, 그것도 하루 이틀 뿐.
이렇게 된 것 부족한 잠이나 자겠다고 밥 먹을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잠 자는데 들이겠다고 결심한 결과였다.
“ 그래도 바로 군말 없이 야영 준비나 잡일 거드는 걸 보면 좀 대단하긴 하더라? 공작 아들이 이런 걸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났을 법도 한데. ”
라케시스가 무안함을 잊고 노골적으로 대화 주제를 돌릴 겸 물었음을 닉스도 알지만, 모르는 척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글쎄. 들은 것도 있고, 아버지랑 같이 여러 가질 하다 보니까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들던데. ”
“ 그래? 역시 대공님이 교육은 잘 시켰어. ”
라케시스는 바깥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지온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대공이라 불렀다.
그 탓에 공작 저택 안에 있을 때조차 지온을 대공이라 부를 때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서글프다 생각하질 않았다.
이미 어머니 엘렌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정을 설명하며 용서를 빌었고, 그를 받아들인 지 오래였던 덕이다.
더해 그렇다 해서 지온이 한 때의 여흥으로 엘렌을 안은 것도 아니었으며, 충분한 정도 느낄 수 있어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 아버지나 어머니나 주변 사람에게 감사하라고 늘 말하시니까, 그냥 나도 그런가 보다 싶어서 그런가봐. ”
“ 그야 특이하신 분들답게 보통 귀족들하고 말하는 것부터 차이가 나긴 하지. ”
“ 특이하다라……. ”
청소나 요리, 재봉 등 잡일에도 눈이 밝고 솜씨가 좋은 지온이나, 평소 차분하고 상냥하며, 아들에게까지 그 거리감을 느끼게 함에도 자기 아버지이게 목을 매는 헬레나까지. 특이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는 조합이기는 하다.
닉스는 그 사실을 그들의 아들로서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래. 특이하시긴 하지. 그래도 나는 좋은데. ”
“ 나도 싫다는 소리는 안 했다? 대공님 아니었으면 다크엘프가 이렇게 편하게 못 살았을 거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오히려 좋지. ”
그 후에도 두 아이는 낯선 나라로 향하는 설렘과 지루함을 달랠 겸 시시콜콜한 잡담을 끝도 없이 주고받았다.
아이라서 유난히 기운이 넘치는 것도 있었지만, 둘 다 마나를 쓸 줄 알았기에 보통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은 체력을 갖고 있었던 덕이다.
하지만. 그 탓에 본래 입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할 주제조차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더구나 닉스가 라케시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받아주느라 반쯤 피곤해진 탓인지,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답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대화는 더더욱 답이 없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 참. 대공님 꼬추가 그렇게 크다던데, 본 적 있어? ”
“ 어… 본 적 있지. 컸어. ”
“ 그럼 너도 커지겠네? 아주 다행이야. 나중에 누굴 부인 삼아도 괜찮겠다. ”
“ 왜…? ”
꼬추가 크면 왜 좋은 걸까. 불편하기만 할 텐데.
닉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케시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우리 엄마가 말한 게, 꼬추가 작으면 있던 여자도 떠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대. 근데 큰 거로 푹, 하면 꼼짝을 못 한다고. ”
“ 오……. ”
본래 용병으로 살던 어머니 밑에 자랐기에 언사에 거침없는 부분이 있었고, 닉스 또한 그런 이들이 있는 환경에서 자라 그런지 나사 빠진 부분이 있었다.
굳이 부끄러운 듯 숨길 필요가 없기는 하나, 아이 입에서 내뱉어도 좋을까 싶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것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