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킹 메이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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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그쪽도 제법 상황이 복잡하군요. ”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소개를 겸한 설득을 마치자, 남자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경우에 따라 싸고돈다는 말이 무척 모욕적으로 들릴 법 했으나,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브도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침묵을 지켰다.
“ 아직 온전히 믿을 수는 없을 노릇이기는 하지만… 일단 저 또한 이름을 말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스케빈이라고 합니다. 당신도 이미 짐작하다시피 우리 동족을 대표해 선별식에 몸 담고 있는 중이죠. ”
남자, 스케빈은 이름과 함께 은근히 신경 쓰이던 정보도 서슴없이 밝혔다.
내가 신분을 밝힌 후에도 얌전히 묶여 있던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혹은, 내 말이 사실일 경우를 신경 쓴 탓일지도 모른다.
내 입장에서야 엄연한 진실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아니었으니까.
“ 그래요. 어쨌든, 이제라도 이름을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
“ 상황이 이렇다보니, 낯선 이에겐 이름 하나 밝히기도 어려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더구나 이런 상황에 본 적도 없는 외국인이 돕겠답시고 달려들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볼 수밖에요. ”
한 번 정도는 의심해 보는 것이 당연한 시기였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에 공감했기에 무덤덤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캐빈이 말한 대로 무례니 뭐니 따질 때가 아니었으니까.
“ 그럴 수 있지요. 저로서는 약간이나마 신뢰를 얻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
“ 음. 이해해 줘서 고습니다. ”
스케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으로 다가와 나와 이브의 팔목을 묶고 있던 밧줄을 손수 풀어주었다.
말로는 의심하고 있다곤 하나 반 정도는 믿는 모양이었다.
“ 밧줄을 풀어주신다는 건…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
“ 당신이 말한 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저로서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겠지. ”
털석. 스케빈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다고는 하나, 선별식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될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나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믿음은 다른 문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 당신의 부인이 나선다면 확실한 도움이 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선별식을 당장이라도 끝맺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
“ 제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치 않다는 거겠죠. ” “ 예. ”
스케빈은 짤막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의심과 걱정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하지만 독기 하나로 버티는 상황이라 신경이 날카로운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일단 있는 대로 힘을 과시해서 믿음을 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 잘났다며 어깨에 힘을 주는 건 부끄럽고 찝찝했지만, 의심을 풀어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면 믿음이 가겠거니 싶기도 했다.
“ 그렇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야겠군요. ”
헬레나 밑에서 구르던 것이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고, 덕분에 몸으로 싸우는 기술이 제법 몸에 익었다고 말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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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
처음 보는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대공을 자칭하며 찾아왔기에 믿지 않았다.
평소라면 모를까,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을 시기였기에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스케빈을 포함한 서인족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약하기에 은근히 무시를 당하며, 힘이 없었기에 발언권을 쥘 수도 없다.
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선별식이 거행되었음에도 그랬다.
그저 세상 흘러가는 데로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서인족들은 점점 악에 받치기 시작했다.
착취나 핍박 졍도는 아니었으나 계속 낮은 위치에서 짓눌리고, 무시당해, 이번에는 꼭 다른 결과를 낳아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선별식에서 떨어지고도 남았을 서인족이 여태껏 버티던 것도 그러한 독기 덕분이었다.
선별식은 한 달에 한 번, 수도에 있는 국왕을 찾아가 여전히 참전 의사가 있음을 주기적으로 밝혀야 한다.
계속 자기 영역에 처박혀 있으면 식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해진 규칙이었다.
당연히 서인족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선별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수도를 왕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약한 그들을 먼저 짓밟고 보자는 이들이 사방에서 기습을 가해왔다. 수도 안에서 피가 튀고 목이 잘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그 길목에서.
민첩하기는 하나 기술이 부족하고, 힘이 부족해 약한 서인족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짓밟아 한 놈 줄이자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약육강식이라는 선별식의 대원칙에 따르는 수인국의 강자들이었다.
도망가고, 또 도망갔다.
스케빈은 그 과정에서 땅에 쏟아지는 무수한 피를 보았고,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악에 받치고 받친 채 살아서 버티기 위해서.
지금이야 버티고는 있지만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여태껏 버틴 것도 역사상 유래 없던 일이라 칭찬할 만 했으나,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머리와 피웅덩이가 작은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마땅한 방법도 없이, 버티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던 무렵.
스케빈의 눈앞에 기묘한 남자가 찾아왔다.
귀족 중에서도 높디높은 신분이면서도, 보통 사람들이 입을 법한 낡은 옷을 걸친 지온이었다.
제국이 은밀히 수인국에 접촉하고 있다.
자신은 그로 인한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가장 약한 서인족과 손을 잡아 선별식에서 살아남게 하고자 한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고, 그 눈에 깃든 간절함을 본 지금도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움이 되겠음을 증명하겠다며 나서는 것을 보고, 스케빈의 눈빛에 희열이 깃들었다.
“ 하아……. ”
이것으로 서른 명 째. 그 수에 맞는 남자들이 은밀한 공터 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큰 상처는 없으나 지온의 주먹에 얻어맞은 충격 탓에 기절한 상태였다.
아무리 서인족 전사들이 기술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기초 정도는 있었고, 여럿이서 한 사람을 노리고 덤벼들었기에 무척 버거웠음이 분명했다.
여태까지는 수와 수의 대결이라 밀릴 수밖에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었다.
대다수가 한 사람만을 노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지온은 이마에 땀을 조금 흘리고 있을 뿐 생채기 하나 없었다.
상대가 하나같이 단검을 손에 쥔 이들이었음에도.
“ 크흠. 아내가 마스터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 입장에선 부끄러운 일이지만……. ”
그 후로도 남은 전사들까지 전부 꺾어버리고 난 뒤, 지온이 이마에 흐른 땀 한 방울을 훔치며 말했다.
스케빈은 그 모습을 보며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이제야 소드마스터를 아내로 두었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깨달은 탓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이브의 정령마법과 그를 응용한 마법에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브 혼자만 있어도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저들에게도 우리는 기회겠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도 저들은 기회다.
스케빈은 그리 생각하며, 날카로운 신경을 저 멀리 털어버린 채 넙죽 고개부터 숙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지온과 이브의 진짜 속뜻이 어떠하든 간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다른 부족으로 가 버릴지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 이번에는 제 쪽에서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서인족을 도와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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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디 말 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서인족 전사들을 꺾자 먼저 고개를 숙인 스케빈도 그렇고, 그 주위를 지키고 있던 이들의 눈빛도 바뀌어 있었다.
또 마음을 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두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 여러모로 숨통이 트인 느낌이었다.
욕실을 빌려 씻은 덕에 개운하기도 했고.
“ 달에 한 번 수도에 들러야 한다고 하면, 언제 출발해야 합니까? ”
“ 이번 달은 이미 갔다 왔으니 괜찮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다음 달이겠지요. ”
이브가 지하를 비롯한 건물 주위에 마법진을 설치하느라 여념이 없어, 스케빈과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덕분에 속에 담아두었던 분노나 억울함 등도 제법 잘 표현하는 듯 했다.
“ 그동안 희생자가 많다 들었습니다. ”
“ 예. 저를 위해, 서인족을 위해 죽었지요. 처음에는 약한 놈부터 얼른 잡아먹어 수를 줄일 생각이었겠지만… 악에 받쳐 끈질기게 살아남은 탓에 더욱 강하게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기가 생긴 셈이죠. ”
처음에는 쉽게 죽을 것 같아 꾹 밟아 죽이려 했다.
그러다 실패하자 요놈 봐라? 하는 식으로 오기가 생겼고, 그에 따라 길목을 노리는 놈들이 점점 거세졌다.
참 듣기 거북하고, 짜증나는 이야기였다.
“ 참 듣기 거북한 이야기로군요.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기에 더 그렇습니다. ”
“ …예. 그래서 대공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그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듣고 싶습니다. ”
“ 일단 지금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생각해 봐야죠. ”
수도에 오고 갈 때 마다 번번이 기습을 가해온다고 하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봐야했다.
그러니 남은 기간 안에 그 기습을 막아낼 수 있을 대비를 해야 했다.
“ 음… 일단 방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괜찮겠지요. 문제는 수도까지 오고가는 중에 벌어질 일입니다. ”
“ 예. 호인족, 우인족 놈들이 때를 엿보고 있을 겁니다. 지금 살아남은 놈들 중에선 가장 강하니까요. ”
아직까지 선별식에 몸 담고 있는 종족은 서인족을 포함해 일곱이고, 그 중 호랑이와 소가 가장 우세하다.
태어날 때부터 우수한 몸을 갖고 있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으며, 그 덕에 많은 왕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가장 약한 서인족이 그런 놈들을 제치고 왕이 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새삼 그 독기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 선별식에서 승리했을 경우 보복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 없습니다. 설령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한들, 살아남은 강자를 대우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에 담아 둔 감정까지 전부 털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수인국 역사에서 사적 보복은 없었습니다. ”
겉으로나마 뒤끝 없이 깔끔하게 끝을 낸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혀 숨통이 끊어진 짐승이 불만을 토해낼 수 없듯, 이곳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스케빈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심 안심했다.
일이 잘 풀려 서인족이 선별식의 승자가 되고,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들 왕좌가 강탈당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몹시 줄어들었으니 미래의 한 고비를 넘긴 셈이다.
“ 그러면 다행이군요. ”
“ 예. 다행이긴 한데… 정말 그 정도만 지켜도 괜찮은 겁니까? ”
스케빈이 눈썹을 꿈틀대며, 어딘가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띠며 물었다.
그들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제국이나 왕국과 손잡지 말고, 그저 중립을 지켜달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 예. 수인국이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끼어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왕국 측의 손을 들어달라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무모한 일이겠죠. 아닙니까? ”
“ 그거야……. ”
스케빈도 그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막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테른 왕국 편을 들어 제국과 척질 수는 없을 노릇이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만약 그랬다가는 무수한 불만의 악수를 받고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판이 깔릴 테니까.
그에 반해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제국 측에서는 불만을 품겠지만 중립을 선언하는 국가 앞에서 강하게 나가기도 어려웠다.
그만한 힘이 없는 국가도 아니었기에, 제국이 강하게 누를수록 더욱 반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제국이 왕국과의 전쟁을 정말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경우일 테지.
결국, 중립을 지키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름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덤으로 실현 가능성도 높고.
“ 그래서 중립만 지켜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적의 덩치가 불어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덤으로 은근한 압박도 줄 수 있으니까요. ”
“ 예……. 일리는 있네요. 더구나 중립만을 지키는 것이라면 부담도 덜할 테고요. ”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지금 당장 닥친 현실을 어떻게 하느냐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
“ …옳으신 말씀입니다. ”
현실을 입에 담자 스케빈의 눈매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여전히 악에 받친 상황에서 희망을 본 덕일까.
내 말이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은 기세에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 아까 전 대련을 하면서 본 건데, 서인족들은 단검을 무기로 삼더군요. 마침 저도 단검을 조금 다룰 줄 아니, 몇 가지 기술을 함께 다듬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괜찮을까요? ”
“ 괜찮다마다요! 오히려 바라 마지않던 일입니다! ”
“ 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
몹시 흥분하여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남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답했다.
아마도 나를 향한 눈빛과 커다랗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만, 부담스럽다고 해서 이야기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 그리고 이곳까지 다다르면서 보니, 서인족들은 조각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더군요. 혹시 커다란 나무로도 조각을 하실 수 있습니까? ”
“ 조각이요…? 예에.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각은 왜…? ”
“ 허풍을 좀 쳐 볼 생각입니다. ”
스케빈은 내가 알 수 없는 말만 내뱉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팔짱을 꼈다.
원래라면 지금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도와야겠지만… 결국 다 알게 될 일.
그래서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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