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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7화 (137/192)

〈 137화 〉 킹 메이커 #6

* * *

한 달 안 되는 시간동안 실력이 늘어야 얼마나 늘까.

헬레나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문제였다.

비록 누군가를 가르친 적은 없으나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혹 뛰어난 재능이 없어도 눈이 휘둥그레 질 만큼 바뀌는 사람들이 있었다.

척 보아도 지독하다는 느낌을 풍기는 유형들이 바로 그랬다.

“ 후욱, 후욱…! ”

흔히 악으로 깡으로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지금 저 서인족들의 모습이 그에 딱 맞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움직이다 기절하는 놈도 종종 있었다.

더 소름이 돋는 것은, 기절하고 깨어나자마자 기술을 갈고 닦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혼자서 검을 휘두를 때도 있었고, 둘, 혹은 여럿이서 대련을 할 때도 있었다.

스케빈 또한 자연스럽게 그 틈에 섞여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댔다. 하나같이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비록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나온 결과라고는 하나, 기다렸다는 듯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 심하게 구르는 나머지 이대로 괜찮은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너무 구르다 뻗어버리면 답도 없으니까.

나는 차마 뭐라 표현하기 힘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 이브가 자리 잡고 있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법 규모가 큰 지하실이라 방도 많고 크기도 넓었다.

“ 아, 대공님. 훈련은 잘 되어가고 있나요? ”

“ 너무 잘 하고 있어서 문제야. ”

나는 반갑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이브의 옆에 앉았다.

한창 나무로 만든 조각상에 마법진을 새기는 중이라 어두운 벽돌바닥 곳곳에 톱밥이 어지러이 흩날려 있었다.

나무 조각상은 인왕상을 본 따 만들었는데, 내 부족한 설명만 듣고 만들었다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했다.

“ 잘 하고 있어서 문제라니요? ”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문제라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이브도 알지 모르겠지만, 잠도 안 자고 훈련을 하고 있으니 문제야. 과하지 않도록 적절히 끊기는 하지만, 워낙 악에 받쳐서 말려도 듣질 않아. 그렇다 해서 억지로 막기엔 흐름이 끊겨 문제가 될 테고. ”

“ 어… 대충 알 것 같아요. 참. 마법은 거의 다 완성되고 있어요. 대공님이 부탁하신 대로 조각상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내구도 강화와 번개를……. ”

이브도 한 번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제법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이리라.

한껏 들뜬 채 반도 알아듣기 힘든 마법이론을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만 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음에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싸매며, 어지럽지 않은 척 애썼다.

싫은 내색을 하다 풀 죽을 이브를 생각하면 버틸 수밖에 없었다.

“ 그래. 고생이 참 많아. ”

“ 아, 대공님…….”

그래도 사람이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이브를 품에 끌어안으며 반쯤 억지로 대화를 끊었다.

끌어안는 도중에도 계속 입을 열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잠깐 뇌리를 스쳤으나,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이브가 뺨을 비비는 대 정신이 없었던 덕이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끌어안다보니 자연스레 팔에 힘이 들어갔고, 이브도 기다렸다는 듯 더욱 깊게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대면좌위라는, 남들에게 보이기 다소 민망한 자세가 되었다.

그나마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 만약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면 여러모로 할 말이 없었다.

“ 이브. ”

“ 네. ”

이브의 이름을 낮게 부르자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수줍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한 기대감을 띤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낙 급박한 상황 속에서 지냈던지라 할 여유가 없기는 했다.

지금이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만큼 숨통이 트이긴 했으나, 그 전까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내느라 정신도 없었다.

나는 머리 안쪽이 점점 새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브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놀란 이브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으나, 곧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반짝였다.

“ 음… 일단 방으로 가자. ”

“ …네. ”

여태껏 가만히 있던 욕구가 고개를 든 것은 서로 매한가지였던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묻고 답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

천재라 해도 여러 종류의 천재가 있듯, 머리가 굴러간다는 말도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일머리가 좋을 수도 있었고, 잔머리가 좋을 수도 있었으며, 혹은 전투 기술을 익히는 머리가 좋을 수도 있었다.

서인족은 그 중에서 잔머리와 공간지각이 좋은 축에 속했다. 서인족들이 하나같이 조각에 능숙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다만, 슬프게도 가장 중요한 전투기술이 그들에겐 없었다.

어느 정도는 민첩함을 살릴 줄 알았기에 싸움을 아예 못 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기사나 오래 된 용병처럼 깊이가 없어 한계가 뚜렷했다.

“ 여러분은 체구도 작고, 힘도 모자랍니다. 그러니 최대한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방식은 피해야 합니다. 흘리고, 피하고, 깎아내어 틈을 찌르는 방식이 좋겠네요. ”

그러나, 제대로 된 지도를 받기 시작하자 그 실력이 놀랍도록 늘었다.

서인족의 전투적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가르치면 완전히 씹어 먹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독기 덕분이다.

지온도, 서인족도 그를 알았기에 서로를 다그치거나 더 삼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상태였던 탓이다. 이런 상태에서 등을 밀어버리면 정말 숨이 끊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인족 영토에서 수도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사흘이 조금 안 된다.

그러니 그 시일을 잘 맞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약자였고, 여전히 짓밟히기 쉬운 위치였으니까.

“ 내일은 푹 쉬고, 몸 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려! ”

“ 예! ”

스케빈이 독이 바짝 오른 눈으로 소리치자, 그를 지키는 다른 서인족들 또한 독이 바짝 오른 채 답했다.

그는 서인족 대족장의 아들이자 이번 선별식에 참여하는 후보였기에, 그가 보이는 태도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서인족 전사들이 미로 같은 넓은 지하실 곳곳에 뿔뿔이 흩어지자, 스케빈은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을 비롯한 몸 곳곳에 칼날로 인한 생채기가 가득했고, 땀에 흠뻑 절어버린 탓에 악취 또한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표정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여태껏 악과 깡으로만 버텨왔던 그에게 제대로 된 희망이 보였기에.

“ 쯧. 좀 쉬어가면서 하시지. ”

잠시 후. 그 희망을 준 장본인, 지온이 미간을 곱게 찌푸리며 주저앉은 남자 앞으로 다가왔다.

악취 때문에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혹사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 대표라는 놈이… 혼자 놀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혼자 놀 수는 없다.

지온은 스케빈이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한 마디, 그리고 여태껏 보아왔던 그의 태도에서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또, 어딘가 서인족 답지 않은 우직함을 엿볼 수도 있었다.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종족을 불문하고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지온은 그리 생각하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 책임을 느끼십니까? ”

“ 느끼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 위치를 거론하기 전에, 저 때문에 죽은 목숨이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

“ …그래요. 생각해보니 그랬었지요. ”

주위 사람이 죽어갈수록 더욱 독해졌지만, 그럴수록 죽어가는 목숨 또한 더욱 늘어만 갔다.

스케빈은 피와 시체로 벽을 세워 자신을 보호해 준 이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도 눈앞에 비릿하면서도 선명한 피가 스케빈의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에.

지온도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떨떠름한 투로 답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본의 아니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여 미안함을 느낀 탓이다.

“ 오다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일 출발하신다면서요? ”

“ 예. 더 이상 늦어지면 수도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자동으로 포기 의사를 밝히는 셈이니까요. ”

달에 한 번 수도를 방문해야하는 규칙.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 왕실은 그가 선별식을 이어 갈 의시가 없다 판단하여, 왕이 될 자격을 박탈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별식을 계속하고 싶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지온은 새삼 그 규칙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수도에 이르거나, 수도에서 거점에 이르는 동안 많은 위협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수도 안은 어떻습니까? ”

“ 수도 안은 안전하지요. 적어도 수도 내에서 유혈을 일으키는 것을 용서치 않으니까요. 만약 누군가 바깥에서 하던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 자격 박탈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

수도는 안전하다.

이 규칙은 다른 대표로서도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경계를 완전히 풀 수는 없을 노릇이나, 수도 내에서라면 그 정도를 조금 낮추고 한 숨 돌릴 수 있을 터였다.

“ 독살 위험은 없겠습니까? ”

“ 독살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직접 손을 쓰는 암살은 허용하지만 독만큼은 엄히 금하고 있지요. 그래서 수도에서 무언가를 먹을 때에도 기미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기에 수도에서 하루 이상 머무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

“ 안전한 곳에서 버티기만 하려는 것을 막기 위함이겠군요. ”

“ 예. 그렇지요. ”

지온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날며칠을 수도 안에서 머무를 경우, 약육강식을 내세우는 선별식이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울 것을 느꼈다.

다르게 말하면 선별식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 저기…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면 그럴 여유도 없을 것 같아서요. ”

“ 제게요? 말씀하시죠. ”

지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근히 재촉하자, 스케빈은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 그쪽 공작께서는… 대공께서 이렇게 직접 움직이는 걸 허락하셨습니까? 듣기로는 사랑이 참 지극하신 분이라 들었는데……. ”

헬레나의 괴팍한 소문은 한 나라는 물론 국경까지 넘어 있기에, 스케빈도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헬레나가 보통 귀족이었다면 왕국 사이, 혹은 다른 국가의 일부 귀족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끝났을 테지만…….

지온은 떠나기 직전까지 눈물을 글썽이던 헬레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 그렇지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애정을 주는 사람입니다. 참 고맙지요. 그래서 진심을 다해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터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걸고요. ”

“ 터전을 지킨다라……. 대공께서는 정말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보십니까? 저는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네요. ”

“ 가능성이 없다고 말 못할 수준이긴 합니다. 제가 하는 이 행동도 결과적으로 보면 단순한 설레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멍하니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도 없을 노릇이라서요. ”

그저 우연히 알았다면 모를까, 그 칼리우드 공작이 심각하다는 말과 함께 정보를 내놓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왕국의 세 공작들이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움직이는 데에는 그 결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지온은 굳게 믿었다.

스케빈은 그런 사정에 눈이 어두웠으나, 지온이 책임감을 갖고 먼 타지까지 왔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 또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더 높은 자리를 노리는 남자였기에.

“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

“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평생 영지 안에서 여유롭게 지내고 싶습니다. ”

오늘따라 왜 헬레나의 얼굴이 생각나는지 원. 지온은 걱정과 그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품은 채, 시선을 위로 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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