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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5화 (135/192)

〈 135화 〉 킹 메이커 #4

* * *

여기가 서인족이 사는 영토라.

나는 고작 두 곳이었지만 그들에 비해 몹시 열악하다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견인족 영토는 특별하지는 않으나 활기가 있었고, 양인족 영토는 옷감을 뽑는 이들답게 단정한 도시 풍경을 자랑했다.

그에 비해 서인족은 농사를 짓는 사람부터 작은 나무를 깎아 조각상을 만드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활기라고는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핏발 선 눈을 하고 있어 참 신기했다.

악에 받힌 눈빛과 힘 빠진 어깨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으니까.

“ 눈빛은 살아 있는데… 왜 힘이 없어 보이는 걸까요? ”

“ 약하기 때문이겠지. ”

우리는 서인족 측에서 내세운 선별식 대표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서인족은 몸짓이 빠르고 머리를 제법 굴릴 줄 알지만, 약하기에 빌붙을 곳부터 먼저 계산한다고 들었다.

어차피 선별식에 참여해 권력을 쥐어보려 한들 중간에 꺾일 것이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브는 내 답을 곱씹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그래도 눈빛을 보니… 완전히 다 내려놓은 것 같지는 않았죠? ”

“ 그렇지. 그래서 다행이야. 아직 버티고 있다면 협상을 해 볼 여지가 있을 테니까. ”

악에 받친 눈빛을 본 덕에 외지인을 경계하는 기색조차 반가울 지경이다.

더구나 아직 서인족이 버티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기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만약 서인족이 선별식에서 떨어졌다면 아주 골치가 아팠을 테니.

경계부터 중심지, 일종의 수도가 있는 곳 까지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본래 세력이 약한 곳이라 그런지 영토도 작았다.

서인족으로서는 슬픈 일이겠지만, 나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중심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니.

“ 중심지라 그런지 어느 정도 발달은 되어 있네요. ”

“ 그렇긴 한데… 서인족이 조각으로 유명하던가? 그런 말은 보고서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

서인족은 체구가 작아 그런지 농사를 짓던 밭들도 어딘가 아담하고 허전한 구석이 있었으나, 중심지는 제법 발달된 티가 났다.

여관부터 술집에 이르기까지,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곳곳에 작은 나무를 조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제법 특이하기는 했다.

더구나 취미 삼아 즐기는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뛰어나, 당장 팔거나 예술전을 열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 당장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 기록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조각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잖아요. ”

이브는 함께 사람들의 손에 들린 조각을 보고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 금속공예나 그림, 장신구 등에만 가치를 매기는 대륙의 풍조에 물든 탓이겠지.

그래서 이 정보는 돈이 되며, 설득력을 높이는 근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거겠지. 일리도 있고. 아무튼……. ”

길 가던 사람에게 선별식에 참여한 당신네 대표가 어디 있냐고 물은들 답해 줄 리도 없거니와, 오히려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서인족이 아무리 약해도 떼로 몰려들면 두 사람 정도야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법 했다.

나는 그 때문에 일단 적당한 여관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돌아볼 생각을 굳히며, 말을 천천히 몰았다.

“ 어디에 있을까요? ”

“ 글쎄. 일단 저 눈에 띄는 관사엔 없겠지. ”

나는 이브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브의 손가락은 척 보기에도 중심 업무를 수행할 법한 견고하고 큰 관공서 같은 건물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피하는 것이 옳았다.

내가 아니라 선별식에 참여한 서인족의 입장에서.

암살, 회유, 협박, 매수, 전면전, 결투 등등… 정해진 선 안이라면 그 모든 것을 저질러도 되는 것이 선별식이다.

고로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 자리를 잡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서인족은 약하니까. 다만,

“ 그래도 들르긴 해야지. ”

관사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곳이니만큼 끈을 댈 수는 있을 것 같아, 나는 여관에 자리 잡기 무섭게 밖으로 나섰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기에 이브도 함께였다.

나는 길을 걸으며 허름한 여관을 지키고 있던 주인의 의심 섞인 눈초리를 떠올렸다.

본래 수인족이 아닌 사람이 이런 곳까지 오는 일이 드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쉬어가고자 들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어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다면 진즉 도시 전체가 난리가 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 보통 인간이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우선 가장 우선할 목적지인 관공서 같은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 입구 근처를 지키고 있던 서인족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 배꼽까지밖에 오지 않는지라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 탓에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가시 돋친 말과 무거운 분위기 덕에 침착하게 답할 수 있었다.

“ 저는 상인입니다. 새로운 판로를 찾아 서인족의 영토까지 왔는데, 혹시 어느 정도 직위가 높은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대족장 같은 분과 만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

나는 부족 전체의 대표라 할 수 있을 대족장을 자연스럽게 거론하며, 품에서 증명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국경을 지키고 있던 견인족 사내에게도 보였던 증명서였다.

문제는 서인족 남자의 키가 작기에 나도 자연스레 허리를 굽혀야 했고, 그 탓에 허리가 약간 무거웠다.

아무래도 상체를 반쯤 아래로 굽히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오시오. ”

서인족 남자는 증명서를 내게 돌려주기 무섭게 등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저 혼자 걸음을 떼니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지만, 일단 남자의 등을 따라 쭉 걸었다.

그 사이사이 따가운 눈초리도 많이 받았지만 양호한 편이었다.

그저, 이브가 약간 위축된 기색을 보이는 걸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지.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이브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적당한 수준으로 힘을 주고, 깍지까지 꼈다.

“ 아…! ”

“ 미안해. 이렇게 손 잡아주는 것 말고는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

“ 아니에요. 오히려 분에 넘칠 만큼… 너무 기뻐요. ”

나는 이브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웃는 모습을 보며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하는 사람이 풀이 죽어 있으면 은근히 신경 쓰이기 마련이라, 온전히 내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 안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사람이 곧 올 겁니다. ”

막다른 골목 같은 구석에 다다르자, 서인족 남자가 한 마디 툭 던진 뒤 자리를 떴다.

눈앞에 놓인 의자와 칸막이가 달린 책상이 설치된 꼴을 보자 무심코 은행 창구가 떠올랐다.

문제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의자에 이브를 앉히려 했었다.

내 권유를 들은 이브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반대했기에, 뜬금없이 자리 하나를 두고 치열한 양보가 벌어졌다.

그러다 내가 의자에 앉고, 이브가 내 허벅지 위에 앉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오히려 좋아.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소테른 왕국의 상인이라고요? ”

드륵.

잠시 의자에 앉아 기다리자 번듯한 차림을 한 남자가 내 앞에 앉으며 물었다.

태도나 말투는 예의발랐지만 눈매가 몹시 날카로워, 척 보아도 사람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상인 치고는 내 옷차림이 너무 허름했던 탓일 수도 있고, 혹은 이브를 허벅지에 앉힌 채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썩 환영받지 못하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빈 손에 쥐고 있던 증명서를 책상 위에 얹으며 입을 열었다.

“ 그렇습니다. 새 판로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

“ 흐음. 판로라. 어떤 물건을 파실 생각입니까? ”

남자는 책상에 놓인 증명서를 손에 든 채 뚫어져라 째려보며 물었다.

증명서에 찍힌 인장이나 내용을 적은 필체 등을 보며 진품인지 아닌지 가리려는 기색이었다.

보통 진위여부를 가리는 사람들이 저런 태도를 보이곤 하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어떤 물건을 파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까.

처음 계획은 도시를 한 번 둘러보고 찝쩍댈 생각이었지만, 여기서 한 번 질러볼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차피 일분일초가 아까운 때니 떡밥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어차피 어느 길로 가던 위험은 감수해야 하고.

나는 잠깐 호흡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답했다.

“ 서인족 선별식 대표의 승리요. ”

“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

“ 서인족 대표의 승리라 했습니다. 그를 위해 서인족 대표와 만나고 싶으니, 선을 대 주시지요. 이브, 품에 있는 걸 꺼내줘. ”

이브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품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모두 금화만 넣어 채운 묵직한 주머니로, 이것만 들고튀어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소박하게 아껴 쓴다면 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그에 표정이 일그러지던 남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 아니, 이건 또 무슨……. ”

돈주머니와 나란히 놓인 검은 색 더크, 정확히는 더크에 씌인 푸른 오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 상인을 칭하며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표정이 굳어버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최대한 간절하게 말했다.

“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서로 절박한 사람끼리 통하는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

.

돈을 얻을 것이냐 칼을 맞을 것이냐.

어느 한 쪽을 골라라, 라는 식으로 칼을 내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러를 쓸 줄 아는 놈이 거래를 하러 왔다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려는 셈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놈들은 죽느냐 사느냐로 이해한 듯 몹시 심각한 기색을 보였다.

적어도 자기소개도 없이 내 눈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그렇게 이해했었고, 우리를 내버려둔 뒤 잠시 자리를 떴었다.

이해하고, 알리고, 열을 올린 채 이야기를 하느라 창구 뒤쪽이 몹시 소란스러웠으나, 그 끝에 나온 결론은 참 간단했다.

일단 우리를 믿지 못하겠으니 양 손을 묶은 채 연행하겠다고 하더라.

당연히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했다.

곁에 있던 이브도 그리 생각했는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눈을 가리고, 손도 묶여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어딘가로 계속 걷기만 했다.

그 와중 우리를 감시할 겸 안내하던 인간들이 몇 명 더 늘었고, 피부를 훑고 지나는 축축한 느낌이 강해지기도 했다.

아마 지하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 천천히 앉아라. ”

걷고 또 걷던 중, 익숙하면서도 불친절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것이나 울림이 깊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동굴 같은 곳에 도착한 듯싶었다.

아니면 사방이 막힌 곳일 수도 있었다.

나는 순순히 지시에 따라 천천히 엉덩이를 내려 의자에 앉았다.

눈은 안대로 가려 안 보이지만 감으로 알 수 있었기에,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없었다.

“ 풀어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젊고 부드러운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저 멀리 날아갔다.

정확히는 안대를 벗긴 남자의 손에 잡힌 채 흐느적대는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새 내 옆에 앉아있던 이브도 그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짙은 청록색 등불이 약하게 주위를 밝히는 벽돌로 이루어진 방.

나는 그 음습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품으며, 눈앞에 앉아 있는 소년 같은 남자를 응시했다.

잿빛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남자였다.

“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몹시 신경이 날카로울 시기이기도 하고, 반가움을 표하기엔 서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

“ 이해합니다. 선별식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

지나치게 숙일 필요도 없지만, 너무 고개를 빳빳이 들어서도 안 된다.

아무리 필요한 것을 주러 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태도가 거만하면 자연스레 반감을 사기 쉬워,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한 말투와 표정을 지었다.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 소개는 의문이 전부 풀린 뒤에 하도록 하죠. 곁에 있는 여자는 당신의 아내입니까? 보고를 들어보니 제법 친밀한 사이 같던데. ”

“ 예. 우리 영지의 마법사입니다. ”

내 여자이기는 하나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는 신분이며, 도움을 주러 온 이상 이브의 정체는 알아서 탄로 날 상황이다.

물론 아직까지 거래가 성사된 것이 아니기에 서두르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마법사 같은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릴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나는 그것을 믿고, 떡밥을 던지는 마음으로 이브가 마법사임을 밝혔다.

“ 우리 영지? 마법사? ”

소년 같은 남자는 마법사라는 말을 듣자눈을 게슴츠레 뜨며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놀람보다는 의심이 더 크기에 이런 반응을 보인 것만 같았다.

“ 오러 유저에 마법사라. 대체 이런 사람들이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겁니까? ”

“ 그 얘기를 하려면 우선 제 소개부터 해야겠지요. ”

얽힌 사정이 제법 복잡하지만, 그 첫 단추를 꿰매기 위해서는 내 소개부터 해야 했다.

다소 빙 둘러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맥락을 잡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대뜸 앞뒤 다 자르고 본론만 이야기한다 한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고.

나는 머릿속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갈지 대략적인 틀을 잡은 후,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소테른 왕국 공작령에 자리 잡고 사는 지온 크라우저라고 합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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