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마법병단 #1
* * *
“ 그래. 그랬었다는 거지……. ”
들어본 것과 겪어본 것은 차원이 다르다.
브라운 하운드는 오늘만큼 그 말을 절실히 깨달은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헬레나의 광기. 그리고 그를 보호하던 새파란 어린놈까지.
그들의 삶과 생각은 보통 귀족과 달라도 너무 달랐고, 그로 인해 오판했음을 브라운은 인정해야 했다.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평범한 귀족인 그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나,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 물러나 보거라. ”
“ 네. 알겠습니다. ”
자신이 겪은 일을 보고한 홀리 하운드가 정중히 고개 숙이며 집무실을 나선 직후.
브라운 하운드는 펜을 들어, 루크 킬리네어에게 올릴 짤막한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온 크라우저는 보통의 귀족과 여자를 대하는 성질이 다르며, 그로 인해 여자를 통한 계획이 효과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놈의 품을 갈구하는 공작의 집착.
그리고 그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까지.
모두가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 후우……. ”
지온 크라우저를 떠받들고, 추양하며, 그 틈을 메우는 식으로 종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어린 나이에 신분상승을 해냈고, 그로 인해 홀로 서고 싶을 욕망이 있으리라는 예측도 빗나갔다.
그럼에도 브라운, 더 나아가 루크 킬리네어는 한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어린 대공의 가슴에 야심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보통 귀족처럼 여색을 밝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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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
하운드 백작령에서 돌아온 뒤. 나는 이스 크라우저의 부름을 받아 그의 집무실 객석에 앉아 있었다.
내 어깨에 작은 빵꾸가 난 것은 둘째 칠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아니나 다를까, 헬레나였다.
하운드 백작 저택에서 약속했던 대로 우리 저택에 돌아온 다음 날.
그녀는 내가 명령한 대로 당연하다는 듯 하녀복으로 갈아입고,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는 모습이 몹시 이상해 보였겠지.
“ 헬레나 말씀이시군요. 우선 결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저와 한 약속 때문입니다. ”
“ 약속이라니…? 자네가 헬레나에게 하녀 노릇을 하도록 명령했단 말인가? ”
“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 때문에 정신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개인적인 욕심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해도, 헬레나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어깨에 찔렸다 한들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 무난히 넘겨도 되었을 테지만, 그랬다가는 헬레나가 죄책감에 몸부림 칠 터였다.
어찌 되었던 스스로 만들어 낸 오러로 내 어깨를 찔렀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으니까.
“ 으음……. 헬레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자네가 엮인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아이니까. 하물며 이번에는……. ”
이스도 그를 짐작하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 예. 이유야 어찌되었던 저를 찔렀으니,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제 착각과 오만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
“ 마음의 짐이라. 일리는 있군. ”
이스가 말한 대로 일리가 있는 명령이기는 했다.
내게 명령을 받은 헬레나의 표정이 제법 밝아졌고, 죄책감을 느끼는 듯 우울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딘가 기대하는 기색도 있다.
그것만 봐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어 보였다.
“ 그리고, 이번에 도진 광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수확도 있었습니다. ”
“ 수확이라면? ”
“ 헬레나가 벽 하나를 뛰어넘었으니까요. ”
비록 내 어깨에는 구멍이 나서 안정이 필요하지만, 영지 전체로 보면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강한 헬레나가 한층 더 강해졌고, 품을 수 있는 마나의 양도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검이 없어도 오러를 가공해 무기처럼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설령 무기를 빼앗기거나 박살이 난다 해도 언제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으니까.
“ 아아. 그랬지. 자네의 어깨를 뚫었다던 그 검은 오러 말이로군.그렇잖아도 강했던 아이가 한층 더 강해지다니. 이것 참……. ”
이스는 순순히 기뻐하기보다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더 강해진 힘을 가지고 미쳐 날뛰기라도 하는 날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내 입장에서 보면 그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부터 헬레나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왕국 내에 없었고, 대륙 전체로 봐도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그러니 조금 더 강해졌다 한들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엘렌이 있어 일종의 브레이크가 생긴 셈이지만, 그렇게 막느냐 마느냐로 다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어찌 되었던 지금의 헬레나는 내 여자이고, 서로 물고 빨며 사랑하게 된 사이니까.
“ 너무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요. ”
“ …음. ”
결국 이스는 헬레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헬레나의 남편이다.
그러니 두려워해서 안 될 처지였다.
부모나 배우자로서 정을 주어야 할 인간들이 지레 겁을 먹고 견제한다면, 사실상 구렁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힙노스의 목적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지만…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컸다.
“ 그래. 그 말이 맞지. 나 또한 노력할 테니, 자네도 잘 부탁하네. 사실상 가장 큰 역할을 짊어 진 셈이니까. ”
“ 걱정 마십시오… 라고 자신 있게 말씀은 못 드리지만, 노력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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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공작님! 공작님께서 어찌 이런……. ”
“ 너무 놀라진 마세요. 다 제 잘못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
크라우저 저택의 주방.
헬레나는 지온을 위한 간단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소매를 걷어 붙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그의 충실한 종으로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헬레나 본인인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에 발 들였지만, 정작 주방에서 근무하는 인간들이 놀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지온을 따라 자주 주방에 들른 덕에 친근하기는 해도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던 탓이다.
“ 하, 하지만……. ”
“ 얼른, 가르쳐 주세요. 제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여러분도 곤란하실 테니까요. ”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 한 사람이 변명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상 헬레나의 미소 뒤에 가려진 압박감을 느낀 탓에 강제로 다물었다는 것이 옳았다.
공작이 하인 노릇을 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주방 최고 담당자 바트를 포함한 하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으나, 이윽고 체념하고 말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사양을 한다면 귀족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구나, 헬레나 크라우저가 그의 반려와 엮인 일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지온과 헬레나 중 하나를 골라 욕을 해야 한다면 헬레나를 고르라 말할 정도겠는가.
“ 예. 그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결국, 바트와 헬레나 사이에 끼인 하인이 한숨을 쉬며 밀가루 포대를 들고 왔다.
지온이 자주 구웠던 간단한 과자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날붙이 다루는 데 가장 뛰어난 헬레나 하더라도, 요리는 처음이니까.
그러나, 헬레나의 솜씨가 예상 외로 뛰어났던 탓에 하인들 모두가 감탄했다.
몸을 다루고 검을 다루는 데 뛰어난 덕인지 어색함이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도저히 초보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최소한 주방에서 좀 굴러본 사람 같은 솜씨였다.
밀가루를 치는 것부터 시작해 개량, 반죽을 자르고 다듬는 것까지.
“ 고마워요. 덕분에 잘 만들어 진 것 같아요. ”
“ 아닙니다. 공작님께 이렇게 뭔가를 알려 드릴 수 있어 제가 다 영광입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
인자하게 웃으며 떠나가는 헬레나를 배웅한 직후.
헬레나의 옆에 붙어 지도했던 하인을 포함한, 주방의 모두가 큰 한숨을 내쉬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너무 긴장했던 탓이다.
“ 허어! 죽는 줄 알았다! ”
“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 나 같이 천한 놈이 공작님께 뭔가를 가르치다니. 길 가던 개도 안 믿겠다. ”
그들은 악몽 같은 상황을 함께 겪은 사람으로서 온갖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와중에도 귀족에 대한 악담 하나 섞이지 않은 것이 크라우저의 인품을 증명하고 있었으나, 괴로웠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 그나저나, 대공께서 공작님께 하녀 일을 하게 하시다니. 도저히 속을 읽을 수 없는 분이셔. ”
“ 우리가 그걸 알면 요리가 아니라 점쟁이를 했겠지. 다 깊은 뜻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
어차피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관심을 끊는다.
그것이 아래에서 일하는 자들의 현명한 길이라고, 주방의 하인들 모두가 생각했다.
아무리 인품이 좋다 한들 선을 넘는 순간 어찌 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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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 셨나요? ”
“ 어… 맛있었어. 정말 처음 구워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더라. ”
간단히 숨을 돌릴 겸 휴식을 취하던 중, 헬레나가 과자를 구워 가지고 왔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맛을 볼 수밖에 없었고, 놀랍게도 상당히 맛있었다.
즉, 지금 내뱉은 소리도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 …감사합니다. ”
조금 전 까지 긴장하던 헬레나가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아무래도 맛이 있나 없나 자신이 없어 불안했었던 것 같다.
내 곁에서 하녀처럼 시중들라 말하기는 했지만, 설마 직접 먹을거리까지 만들어 오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도 상전처럼 대우받기는 해도 그 성질이 달랐으니까.
“ 저어… 다음엔 뭘 하면 될까요? ”
“ 글쎄. 남은 일도 별로 없으니 좀 더 쉬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엘렌은 최근 들어 엘프 노예들의 감독을 하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워, 헬레나와 둘만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약간 어색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본래 셋이 있는 편이 더 어색했는데,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휴식을 할까 일을 마저 끝낼까 고민하다, 결국 일을 먼저 끝내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쉬다 일하게 되면 더 귀찮고 짜증이 나니 미리 끝내버리려는 생각이었다.
헬레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서류작업을 도왔다.
이제 곧 중앙기사단이 찾아와 훈련을 받을 시기였고, 다크엘프의 회유도 제법 매끄럽게 진행되는 중이라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이럴 경우 다크엘프 무리가 들어오는 시기와 기사단의 훈련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질 수도 있었다.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 그냥 넘기기도 찝찝한 상황이었다.
뭔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 주인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내가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지, 헬레나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며 몸을 딱 붙였다.
나를 걱정하는 건 틀림없어 보이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 팔을 끌어안은 채 상체를 문지르고 있었기에.
“ 괜찮아. 그런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는 짓이 제법 괘씸해. ”
“ 그게 무슨… 아응! ”
허벅지에 손을 얹고 살살 문지르는 것도, 상체를 문지르는 것도… 그 의도가 너무 뻔해 보였다.
그래서 좋은 것이긴 하나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정된 기한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내가 주인이니까.
그래서 헬레나의 허리를 팔로 감은 채 그녀의 아랫배를 살며시 누르며, 내 허벅지에 얹은 손을 점점 위로 이끌었다.
“ 그 천박한 몸으로 나를 유혹하려 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
“ 아…! 주인님……. ”
어찌 보면 단순한 역할놀이에 불과할 뿐이지만, 헬레나는 이 놀이에 몹시 심취한 듯 몽롱한 눈빛을 보였다.
벌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취향을 바꿔 즐겨보는 역할극이 아닐까?
나는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하며, 헬레나의 허리를 감은 팔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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