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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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물건이다.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마나를 훈련하고, 기술을 익혔다.
가끔 검의 경지를 거론하며 무언가 특별한 것이 담겨있다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베고, 쓰러뜨린다.
그것만이 검의 본질이었고, 그것에 복잡한 이론이 낄 여지는 없었다.
활을 쏘는 것도, 혹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검을 사용하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결국 그 모두가 힘을 휘둘러 상대를 해친다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즉, 오러를 휘두르는 것 또한 그와 똑같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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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지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거야. ”
헬레나가 숨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처럼 넓고 먼 범위를 읽어낼 수 없지만 가까이 있다면 가능했다.
“ 고, 공작님! 그, 그것이……. ”
여우처럼 미소 짓던 홀리 하운드가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미 내게서 떨어져 거리를 둔 지 오래였으며,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로 헬레나의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새까만 가지를.
가지는 헬레나가 자주 사용하는 오러 블레이드의 모양과 꼭 닮아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오러 블레이드에서 검을 빼고 오러만 뽑아 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마 고민을 해결하고 한 단계 뛰어 넘은 것이 분명할 테지.
나는 무저갱 같은 헬레나의 눈동자와 겁에 질린 홀리를 번갈아보며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 그 모습을 보니… 자기 죄가 무엇인지 잘 아는 모양이구나. ”
“ 요,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
본래 불륜 현장을 목격하면 남자 멱살부터 잡는 것이 보통이나, 헬레나는 달랐다.
망설임 없이 벤치 구석에서 덜덜 떨며 빌고 있을 홀리에게로 다가가, 그 목을 베어버릴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저 가느다란 오러를 휘두르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나는 은근슬쩍 헬레나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 숙인 여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헬레나. 그만. ”
“ …어째서 지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혹시, 정말로 저 여자에게 갈 생각이야? ”
베지 못해 원망스럽다는 듯, 헬레나의 공허한 눈이 나를 향했다.
몹시 화가나 있음이 분명함에도 표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이 제법 오싹해 보였다.
아마 멘탈의 효과를 받지 못했다면 무심코 뒷걸음질 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내가 왜? 어딜 봐도 헬레나보다 부족한 여자인데.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덤덤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헬레나의 발작을 가라앉히는 것이 가장 우선인데다, 작전도 물 건너간 상황이다.
그러니 홀리 하운드에게 관심 있는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 정말? ”
“ 정말이지. ”
“ 그래. 지온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
하지만, 감히 꼬리 친 죄는 죽어 마땅해.
헬레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리 없이 팔을 휘둘렀다.
어느 새 검은 오러를 역수로 쥔 채, 홀리 하운드의 골통을 노린 찌르기로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이미 마스터에 도달하고도 또 하나의 벽을 뛰어넘은 기사의 찌르기.
보통 사람 같으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서있다 죽기 십상이며, 훈련한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받아치기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오러의 밀도가 격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천만 다행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늘기 때문에 맞을 곳만 잘 고르면 적당히 다치는 선에서 끝맺을 수 있을 듯싶었다.
예를 들면, 내 어깨로 받아내듯이.
“ 으윽! ”
“ 지, 지온…! ”
오러가 어깨를 관통하자 시리면서도 화끈한 격통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헬레나는 내가 몸으로 막을 줄 몰랐는지 무척 당황해 했으나, 무저갱 같은 눈동자는 여전했다.
“ 아, 지, 지온……. ”
눈빛은 여전하지만 목소리가 떨렸고, 몸 또한 그랬다.
극도의 불안함, 그리고 나를 찔렀기에 느끼는 놀라움 등의 복잡한 감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느 새 오러도 사라져 있었고.
“ 헬레나. ”
“ 아……. ”
나는 표정이 무너져가는 헬레나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며 이마를 맞췄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단숨에 키스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마 극도로 침착한 상태이기에 이런 짓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 진정하고, 우선 천천히 호흡부터 해. ”
“ 나, 나는 전혀, 전혀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나도 알아. 그러니 내 걱정은 일단 접어두고, 천천히 호흡해. 천천히……. ”
눈을 맞추고 조곤조곤 이야기하자, 헬레나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크게 들이쉬고, 얕고 길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호흡에는 안정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이대로 몇 분 정도 계속하다 보면 제법 괜찮아질 터였다.
후우… 후우. 몇 분에 걸쳐 호흡을 가다듬자, 헬레나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불안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이야기가 통할 정도는 되었다.
“ 미… 미안해. 내가, 내가 흥분해서 이렇게……. ”
“ 걱정 마. 독 먹고도 안 죽었으니까, 이 정도로 안 죽어. 부족하지만 꾸준히 훈련도 하고 있고. ”
나는 어깨에 구멍이 뚫린 것도, 그 구멍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헬레나를 달래는 데 집중했다.
명색이나마 마나를 다루며 내구력이나 생명력이 높아진 덕분이었다.
“ 하지만, 벌은 받아야겠지. ”
막상 벌이라고는 하나 사심도 채우고, 무엇보다 헬레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나는 헬레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한 달 동안 내가 원하는 대로 봉사할 것을 명했다.
“ 봉사…? ”
“ 그렇지. 공작의 위엄이 땅에 떨어질 지도 모를 옷을 입고, 창부처럼 아양 떨면서…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 용서해 줄게. ”
“ 즉, 그건……. ”
“ 사실상 물건 취급을 받는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
이야기를 꺼내면서 깨달았지만, 내가 말한 대로 한다면 상당히 무거운 벌이 될 수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긴 하겠지만 위엄이 깎여나갈 것은 확실하며, 귀족 사회의 시선으로 보아도 굴욕적이기는 하다.
정작 얼굴을 붉히며 전부를 바치겠다는 헬레나가 그리 생각할 지는 의문이지만…….
“ 아. ”
갑자기 한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났다.
전혀 의도치는 않았지만, 오히려 좋아.
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떠는 홀리 하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 후,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 마침 잘 됐네요. 우리는 할 얘기가 무척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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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급처치지만, 치료… 다 끝났어. ”
하운드 저택의 손님방.
나는 이곳 테이블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아 헬레나의 치료를 받았다.
홀리 하운드의 도움으로 간단히 마련한 약을 바르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붕대를 감았다.
정확히는 작은 구멍이 난 왼쪽 어깨만.
“ 고마워. ”
나는 헬레나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맞은편에 앉은 채 두려워하는 홀리 하운드를 향해 눈을 돌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런지 떨림도 많이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내지 못했는지 움츠러든 기색이 엿보였다.
“ 당신도 알다시피, 제가 당신을 구했습니다. 그건 알죠? ”
“ 네, 네에……. ”
홀리는 두려워하면서도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답했다.
자초지종을 엄밀히 따져보면 이쪽의 죄가 더 크겠지만, 헬레나의 광기가 이 여자의 눈을 가린 것 같았다.
불륜과 은밀한 만남이 성행하는 귀족사회라고는 하나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헬레나가 저지른 행위는 그 선을 넘었음을 홀리 하운드에게 깨닫게 한 것 같았다.
“ 그러니, 앞으로 던질 제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니, 순순히 답만 해 주신다면 책임을 물을 일도 없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용히 묻어가도록 하죠. ”
은연중에 모두가 무시한다고는 하나, 나는 대공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억지 명분을 뒤집어씌우면, 설령 백작이라 하더라도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다.
눈앞의 여자도 그를 아는지 한 결 편해진 표정으로, 또 불안 대신 긴장감이 역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좋습니다.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슬슬 물어보죠. 먼저 우리를 초대한 것은 하운드 백작만의 뜻입니까? ”
“ …아닙니다. ”
“ 아닙니다, 라. 역시 백작의 딸이라 그런지 뒷사정도 아는 눈치군요. 그러면 누가 우리를 초대하라고 지시, 혹은 권유를 했습니까? ”
하운드 백작의 뜻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갔지만검증할 겸 주모자를 정확히 알아내고 싶었다.
명확히 알 수 있는 일을 굳이 추측만으로 넘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 킬리네어… 공작님이십니다. ”
“ 으음. ”
역시.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 마냥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 왜 우리를 초대하라 지시했습니까? ”
“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크라우저 공작령에 벌어진 일들의 근본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지시를 내리셨어요. ”
“ 호기심 때문에 저질렀다는 거군요. 우리 영지에서 일 벌이는 규모가 제법 크니… 그럴 수도 있겠지. ”
충분히 다른 귀족의 견제를 받을 만한 상황이기는 하다.
아마 우리가 공작이 아니었다면 진즉 급이 높은 귀족들이 시비를 걸었겠지.
나는 귀족파 수장으로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던 루크를 이해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그래서 백작은 당신을 이용했다, 그 말입니까? ”
“ 네. 저를 조공으로 삼아 일의 진위를 캐내실 생각이셨어요. ”
“ 조공이라……. ”
헬레나가 나를 애지중지 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협박과 같이 억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을 맞춰주며 살살 꼬셔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귀족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은밀한 교류가 상식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을 줄 생각도 못했겠지.
보통 귀족과 사고방식이 다르니까.
“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우리 상황을 잘 몰랐단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군요.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
주모자나 그 의도를 명백히 알았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헬레나가 폭주한 것은 예상도 못했지만, 그렇기에 일이 빠르고 잘 풀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 너 또한 그러라는 말과 함께 축객령을 내렸다.
내 집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자리의 주인이 헬레나도 아닌 나였으니까.
“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게는 이미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 의미를 잘 곱씹어 보도록 하십시오. ”
“ 네. 그럼, 저는 먼저……. ”
홀리는 경고와도 같은 내 말을 마음에 새기려는 듯, 무겁기 그지없는 기색을 띠며 방을 나섰다.
“ 주… 주인님. ”
어색한 분위기의 주범이 가시자, 헬레나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나를 불렀다.
공석에서는 평소처럼 부르되, 크라우저 저택 부지나 사석에는 나를 주인으로 부르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부족함 하나 없는 공작님을 노예처럼 부린다는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오싹함으로 인한 흥분이 크게 솟아올랐다.
“ 그래. 무슨 일이야? ”
“ 네. 그게… 루크 킬리네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
헬레나의 주인님 발언에 엘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크 킬리네어를 어떻게 하느냐.
이 질문이 제법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뒤에 서 있는 엘렌의 얼굴이 너무 우스워 뜸을 들이고 말았다.
놀람을 드러내면서도 희미한 질투심도 엿보이는, 제법 복잡한 얼굴이었기에.
“ 아까도 말했듯이 불문에 붙일 거야. 의도가 너무 뻔했다고는 해도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고,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곳곳에 간자를 파견하는 일은 드물지도 않으니까. ”
“ 그렇…죠? ”
“ 그렇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도 했으니까, 아마 다음부터 이런 일도 없을 거야. ”
헬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불편해 하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 크게 폐를 끼친 것도 아니고, 간을 보다 들킨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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