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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03화 (103/192)

〈 103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5

* * *

한 발 먼저 홀리 하운드를 정원으로 보낸 뒤. 나는 곧장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엘렌 쪽으로 향했다.

내가 철석같이 유혹에 넘어간 줄 알고 난동 부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저택이 박살나고, 홀리 하운드는 다짐육마냥 흔적도 없어질 테지.

“ 엘렌. ”

“ 대공님? 어쩐 일로 혼자 오셨어요? 공작님은……. ”

“ 아직 연회장에 있어. 미용을 화제로 삼은 귀부인들에게 묶여 꼼짝 못 하는 신세지.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엘렌의 물음에 짤막히 대답하고는, 곧장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너무 시간을 끌면 상대가 의심할 여지를 줄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았으니까.

“ 아무튼, 어쩌다보니 바쁜 일이 생겼어. 하운드 백작의 딸이 나를 불러서 중앙 정원으로 가 봐야 하거든. ”

“ 백작의 딸이요? ”

여자가 나를 부른다.

그것도 이 어두운 중앙 정원에.

엘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는 듯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포함한 전신이 흔들렸고, 꾹 다문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 서, 설마… 아니시죠? ”

“ 아니지. ”

워낙 물음에 맥락이 없음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

아마 홀리 하운드에 흥미를 느껴 자신들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엘렌은 헬레나처럼 곧장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여자가 아니나, 불안이 극에 달하는 순간 태도를 바꿀 것이 분명했다.

물론 불안해 하는 모습 하나만 봐도 몹시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어, 조치가 필요했다.

이런 집착으로 인한 불안을 치료하려면 약이라도 있어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약은 없다.

잠시 안정을 가져다 줄 수는 있어도 잠깐 효과가 나타나다 말겠지.

“ 아으응…! 지온, 니임……. ”

그리고, 이 집착을 가라앉히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지금 같은 농도 짙은 스킨십이다.

여기서 교접까지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헬레나를 대상으로 실험해 얻은 결과가 그랬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옷이 비명을 토해낼 만큼 굴곡진 가슴을 가볍게 꽉 쥐고, 엘렌의 귀에 내 입술을 가까이 댔다.

마침 어둠에 가려져 있기도 하고, 사람 대부분이 연회장에서 노는 중이다.

보는 눈이 없다는 뜻이다.

“ 내가 너희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택할 것 같아?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지금 당장 지워버려. 하등 쓸모도 없는 망상이니까. ”

“ 네!버릴게요!버릴게요…!”

엘렌이 달뜬 숨을 내뱉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냈다.

불안 따위는 진즉에 사라진 지 오래였고, 앞으로 벌어질 행위를 기대하는 것만 같았다.

은근히 내게 안겨오는 것도 그렇고, 몸을 꼬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최대한 목소리를 깔며 속삭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쓰레기 같지만… 어쩔 수 없지.

“ 홀리 하운드는 우리 영지의 정보를 알고 싶어 해. 백작의 사주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윗줄이나 동급의 명을 받았는지는 몰라. ”

“ 아아…! 그런 일이……. ”

“ 그러니 최대한 그 여자의 유혹에 낚여주는 척 하면서 의도를 캐내볼까 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보려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홀리 하운드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왜냐하면…… .”

너나 헬레나가 훨씬 맛있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슴에서 손을 떼고, 아쉬움에 탄식하는 엘렌의 뺨에 손을 얹었다.

필요했다고는 하나다시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엘렌이나 헬레나를 물건 취급 하는 것 같았으니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넘어갈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정작 당한 장본인이 저렇게 좋아하고 있어 더욱 복잡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지, 답답해서 한숨을 쉬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었다.

마약이라도 한 듯 몽롱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붉게 상기된 뺨.

더해 몹시 아쉽다는 듯 조심스레 손을 뻗는 모습까지.

누군가 지금 엘렌의 모습을 본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읽기 쉬운 표정이라서.

“ 그래. 엘렌은 착하니까, 헬레나가 오면 내 말을 그대로 전하도록 해. 최대한 방해도 하지 말도록 해 주고. ”

“ 네. 지온 님……. ”

엘렌이 한껏 교태 섞인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막상 이대로 떠나려니 내가 아쉬웠다.

그러니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마 흔히들 버드 키스라고 부르는 행위였던 것 같다.

“ 그럼, 갖다 올게. ”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나는 홀리 하운드가 기다리고 있을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낮에도 얼핏 스치듯 본 적이 있었지만, 정말 계획적으로 잘 꾸민 공원 같은 곳이었다.

한적한 구석에 심겨진 나무 그늘 아래서 쉬기도 좋았고, 넓은 공터에 잘 관리된 정원을 보며 산책하는 맛도 있어 보였다.

마치 귀족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공간 같았다.

“ 죄송합니다. 영애 분을 먼저 기다리게 했군요. ”

나는 기대감에 약간 들떴다는 듯한 모습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당장 달려오고 싶었지만 옷매무새 등을 다듬느라 늦었다는 헛소리도 덧붙였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 뜸을 들였다는 착각을 주기 위해서.

“ 대공께서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일이니, 부디 고개를 들어 주세요. ”

정원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홀리가 무척 당황한 기색으로 내 손을 잡았다.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희미한 우월감이 녹아 있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미미하기는 하나 대공을 고개 숙이게 만든 덕에 제법 콧대가 높아진 모양이다.

“ 네. 감사합니다. ”

나는 정말 안심했다는 듯 한숨까지 쉬어가며 적당히 과장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금방 눈치 챘을 지도 모르나, 홀리 하운드는 나와 처음 만나는 처지다.

나에 관한 소문은 들었을지언정 진짜 인상이 무엇인지 파악 못 할 가능성이 높았다.

“ 호호.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무척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자, 이쪽으로……. ”

홀리 하운드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더해 손을 놓치지 않도록 꽉 쥐기까지 했다.

헬레나처럼 훈련하지 않은 여자의 힘이라 별 대수롭지는 않아도, 몹시 뻔해 보이는 의도가 엿보였다.

아마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겠지만, 나 또한 굳이 그 의도에 넘어가고자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유혹에 넘어가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셈이었다.

“ 이런 곳에 나무로 만든 의자까지 놓아 두셨나요? ”

“ 네. 아버지께서는 답답하거나 머리가 아프실 때면, 이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하세요. 사색을 위해 들르기도 하시고요. ”

나는 현대 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벤치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설치된 나무 벤치라. 홀리 하운드가 말한 대로 쉬거나 생각을 정리하기 좋아 보이는 곳이긴 한데,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 편견일지도 모르나 사람 눈을 가리는 위치가 너무 절묘했다.

대놓고 각 한 번 잡아보라는 것만 같았다.

“ 저어… 대공님께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연회장에서 나누기에는 조금 무거운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 네. 그러시죠. 저도 당신과 대화를 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

홀리 하운드는 질문보다 제 엉덩이가 더 무겁다는 것을 증명하듯 벤치에 앉았다.

그 탓에 이 여자의 무게에 이끌려 벤치에 나란히 앉는 처지가 되었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란히 앉기 싫어 손을 잡은 채 버틴다?

상상만 해도 참 멍청해 보였다.

“ 대공님은……. ”

.

“ 죽을 것 같아……. ”

지온 알트람이 연회장을 떠난 지 30분.

귀부인들의 공세에서 벗어난 헬레나는 한 숨 돌리겠다는 말을 남기며 방으로 향했다.

연회장에 지온이 없기도 했기에 방에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목적지를 향해 걷자,

“ 오셨습니까. ”

배정받은 방의 문을 지키고 있던 엘렌이 고개 숙여 헬레나를 맞았다.

그렇잖아도 어두운 피부를 가진 엘렌이 검은 옷까지 걸치고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마 어두운 구석에 숨는다면 열에 여덟이 지나칠 것이 분명했다.

“ 응. 지온은 안에 있어? ”

“ 대공께서는 밖에 나가 계세요. 정원으로 나가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 정원…? 혼자서? ”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지온의 말을 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차분하게.

다만, 설명하는 과정에서 지온이 베풀어준 은총은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말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 그래? 그렇다 이거지……. ”

이야기를 다 전해들은 헬레나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와중에도 상당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지온이 의도를 알았기에 이 정도에서 그쳤지, 아니었다면 기척을 찾아낸 뒤 큰 사단이 났으리라.

“ 엘렌. 너는 방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어. 나는 지온을 찾아 데려 올 테니까. ”

설령 연기라 해도 스스로 끊고 나오기가 무척 곤란할 터.

헬레나는 그리 생각하며 곧장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기라 해도 다른 여자가 그의 곁에서 아양 떠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엘렌 같은 예외도 있기는 하나, 예외 중에서도 예외다.

폐허 위에서 오롯이 홀로 독점한다 한들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환경 또한 만족스러운 관계를 위한 중요한 소품이라는 것을, 헬레나는 알고 있었다.

근처구나.

헬레나는 지온의 기척이 느껴지는 정원 구석 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지온이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척도 최대한 죽이고, 발소리마저 죽였다.

이 광경을 암살자 길드가 봤다면 제발 들어와 달라 권유할 만큼 뛰어난 솜씨였다.

─어머, 겸손하시긴. 대공님은 충분히 대단한 분이세요.

─하지만…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상황은 여전하죠. 헬레나에게 버려지면 그것으로 끝이니까요.

─저런. 자신이 없으신가요?

귀를 기울이자 몹시 거슬리는 대화가 들렸다.

저 멀리 지온에게 딱 달라붙어 유혹하는 암컷도 거슬린다.

헬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한창 밀회가 진행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발소리도, 기척도 숨기고 있는데다 거리도 제법 있다.

그러니 저 암컷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확신했다.

헬레나가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나무에 몸을 숨긴 채 엿보는 풍경이 너무 거슬렸다.

잠시라고는 하나 그녀의 자리를 탐하는 것을 놔두기가 싫었다.

그러나, 헬레나는 그 와중에도 스스로를 억누르며 대화를 엿들었다.

대화 도중 지온이 눈치 챘는지 헬레나가 숨은 방향을 정확히 바라봤다.

그러니 두 부부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주칠 수밖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온이 홀리, 정확히는 그 뒤에 있을 헬레나를 향해 눈웃음치며 웃었다.

그에 홀리 하운드는 순간 자기가 할 일조차 잊은 채, 이 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순간적인 생각에서 그쳤으나, 그 탓에 홀리 하운드의 심리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온은 홀리 하운드에게 기대는 척 하며 본인이 구사할 수 있을 달콤한 말을 끊임없이 뱉어냈다.

마치 그 흔들림을 눈치라도 챈 듯한 모습이었다.

─영애 같은 분께서 저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자신감이 솟는군요.

─네. 분명 대공께서는 어딜 가셔도 떳떳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홀리는 바로 지금이라 생각하며, 과감하게 지온의 품에 안겨들었다.

지온 알트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딸을 조공으로 바쳐 그의 환심을 사고, 그 속내를 캐내는 것.

브라운 하운드가 노리는 바가 바로 그랬으며, 홀리 또한 그를 알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교 연회에서 다른 귀족과 얽히는 것 또한 자신의 의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해, 그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홀리 하운드를 과감하게 만들었다.

정사까지 이르는 것이 목적이기는 해도,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진도가 너무 빨랐다.

저도 모르는 새 지온 알트람에게 진심으로 빠졌다는 증거였다.

─대공님. 부디 지금은 편히 쉬세요. 제가 위로해 드릴 테니…….

여자의 몸으로 녹이고, 그 틈을 노려 은근슬쩍 정보를 캐낸다.

홀리는 몇 번이고 해 왔던 일을 떠올리며, 지온의 입술을 탐하고자 고개를 들어올렸다.

의무 이상으로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 탓이다.

“ 감히…! ”

홀리의 행동은 이미 선을 넘었다.

은근슬쩍 자신을 깎아내려도 참았고, 가증스러워도 견뎌냈다.

그러나, 그를 빌미로 지온 알트람을 탐하려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한 분노가 이성을 뚫고 움직이라 등을 떠미는 순간.

“ 어…? ”

헬레나의 손에 얇고 곧은, 시커먼 나뭇가지와 꼭 닮은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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