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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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나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
“ 그렇군요. 벗어날 생각은 아니시라는 거군요. ”
정곡을 찌르기는 한 것 같아도 그 속내가 들어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속내까지 들어맞았다면 좀 더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황당하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으니까.
“ 죄송합니다. 엘프 놈들의 습격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나머지… 큰 실례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
“ 아… 괜찮습니다. 몸의 상처는 나아도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니까요. ”
일단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자, 브라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몰아붙이던 와중에 빠지는 기색을 보였으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점점 여유가 돌기 시작하는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자, 그러면 슬슬 다른 분들도 대접하러 가고 싶은데… 부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대공이나 공작님을 모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
“ 이해합니다. 집주인이 초대한 손님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
“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 먼저……. ”
브라운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곧장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크고 웅장한 파도 같은 기세였다.
그 탓에 그들을 상대하며 피로가 점점 쌓여갔으나, 워낙 소란스러웠던 탓일까.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난 헬레나가 적절하게 도움을 주어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소위 어그로를 끌어 무리를 분산시킨 셈이었다.
“ 자, 여러분! 오늘의 연회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그만 여독을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 남은 시간은 많으니, 오늘 안에 기를 전부 빼 버릴 필요는 없겠지요.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절제가 필요한 법이기도 하고요. 안 그렇습니까? ”
분위기가 무르익고 식어가기 시작할 무렵, 브라운이 아주 시기적절하게 연회를 끝마쳤다.
그가 말한 대로 남은 시간이 이틀에서 사흘인지라 즐길 시간은 충분했다.
다른 귀족들도 그를 아는지 연회장이 떠나가도록 웃어대다,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 정리는 다 된 거야? ”
“ 거의 다 끝나긴 했는데… 계속 생각한다 한들 마지막 매듭이 지어지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일단 숨을 돌리려고. ”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던 중. 헬레나가 아직 떠들썩함이 맴도는 복도를 걸으며 물음에 답했다.
“ 미안해. 지온에게 너무 떠넘겨서 피곤했지? ”
헬레나가 무척 미안하다는 기색을 띠며 물었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그렇고, 큰 부담을 끼치지 않았는가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 괜찮아. 오히려 내가 여태껏 끼친 폐가 훨씬 크고, 그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
“ 지온은 얼마든지 그래도 돼. 하지만 그게 반대로 흘러가면……. ”
“ 나는 아무 상관없어. ”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다보면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오늘처럼 한 쪽이 짐을 짊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생각헀기에, 나는 헬레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
3층 가장 구석방 앞에 다다르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엘렌이 고개 숙이며 우리를 반겼다.
연회장 내에 호위가 들어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에, 이렇게 방 앞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 다리 아프게 계속 방 앞에서 기다린 거야? 들어가서 편히 쉬고 있지 그랬어? ”
“ 아뇨. 대공님이나 공작님께서 쉬시지 않았으니, 제가 먼저 발 뻗고 쉴 수는 없겠지요. 도리에 맞지 않으니까요. ”
분명 하는 말이 그럴 듯하기도 하고, 충성심이 넘쳐 보이기도 해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저 헬레나의 허리춤을 안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는 질투어린 눈빛이 설득력을 떨어뜨렸을 뿐.
아. 이것이 질투이자 집착의 힘일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대단하다.
“ 그래. 그러면……. ”
끼익.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뒤를 따르던 엘렌의 허리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문의 잠금쇠는 이미 잠가둔 지 오래였기에 사람이 들어올 걱정은 없었다.
애초에 때늦은 야밤에 부를 만한 사람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 아…! ”
백색과 흑색. 극과 극을 달리는 색의 차이를 빼면 차이점이 없는 허리의 감촉이 좋았다.
탄력이나 둘레도 그렇고, 생김새도 더할 나위 없었다.
안을 때 마다, 혹은 만질 때 마다 늘 새로웠다.
나는 엘렌과 헬레나의 신음을 들으며, 피로를 달랠 겸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면 청소하러 온 하인들이 식겁할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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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애송이……. ”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밤. 브라운은 침실 침대에 누운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의 옆자리엔 부인보다 조금 어린 귀족 여자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었다.
같은 귀족파 소속이나, 그보다 신분이 낮은 어느 남작의 부인이었다.
조공이냐,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오롯이 합의에 의한 결과였다. 신기할 것 하나 없었다.
당장 브라운 하운드의 부인 또한 다른 남자의 침실에서 허리를 흔들며다른 남자의 정을 맛보고 있을 테니까.
귀족의 연회란 그랬으며, 어두운 밤에 이루어지는 사교란 그런 것이었다.
아마 지독한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 나무 그늘에 숨어 몸을 섞는 이들 또한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또한 교류이기에.
단순히 타인의 여자, 타인의 남자를 맛봄으로써 느끼는 부도덕한 쾌락만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기는 하나, 서로가 모르던 정보를 교류하며 시야를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부수적이라고는 하나 실리이자 명분이 되어 주었다.
유출하는 정도는 각자의 역량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애송이.
브라운은 지온의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쓴 것을 먹은 듯 텁텁하기 짝이 없는 입도 그렇고, 여러모로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 혹은 다른 귀족들의 평균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지온 크라우저는 운 좋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저 크라우저 공작과 접하기 쉬운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쩌다 보니 얼굴이 제법 반반하다.
그 때문에 헬레나의 눈에 들기 쉬웠고, 결국 대공이라는 전례가 드문 출세를 이루었다.
그러니 지독하게 운이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브라운 백작은 그리 확신했다.
“ 으음……. ”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민에 잠겨들었다.
크라우저 공작령에서 일어나는 일을 캐내려면 실질적 배후인 놈을 구슬리는 것이 좋다.
킬리네어 공작가의 수장, 루크 킬리네어는 그렇게 말하며 명령을 내렸었다.
처음에는 루크 같은 애송이의 말을 들어야 하나 고민할 법도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킬리네어 내부의 소란을 수습하고 자리를 공고히 한 그의 수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명령에 따라야 하겠지만, 어떻게 그가 원하는 정보를 캐낼까.
그것도 오만하게 콧대 높아진 애송이를 상대로.
브라운은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 줄 의향까지는 있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허리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운이 좋은 것을 빼면 영지도 없는 자작가의 애송이에게 그러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 떄문이다.
“ 어리다? ”
브라운은 눈을 번쩍 뜨며 무심코 내뱉은 말을 천천히 곱씹기 시작했다.
어리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대공이라는 분에 넘치는 신분을 얻었다. 또한 오만하다.
그는 뇌리를 스치는 요소들을 잘 섞어 생각해 보다, 나름대로 기막히다 할 수 있을 결론에 다다랐다.
당장 누구나 생각하고, 브라운 또한 태연자약하게, 또 당연하다는 듯 저지르는 행위.
바로 여자를 통해 놈을 농락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지온이 운 좋게 크라우저 공작의 사랑을 얻어 대공이 되었다고는 하나, 을의 입장에 불과하다.
결국 그는 데릴사위에 불과하며, 결국 헬레나의 사랑이 있을 때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그로 인한 열등감이나 불안이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 심리적인 틈을 잘 파고들면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브라운은 그리 생각하며,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또한 검증되지 않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브라운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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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이틀 째.
나는 어제보다 훨씬 활발해진 헬레나의 곁을 지키며 귀족들의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대부분 자기 사업이 어떻다느니, 어느 지방의 물건이 아름답다니 하는 이야기였다.
사치나 미술.
그에 썩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귀로 주워들은 지식만 가지고 대꾸하기 바빴으나, 헬레나가 잘 받아치는 덕에 무난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어머, 아까워라! 공작님 같은 아름다우신 분이야말로 드레스나 장신구가 꼭 필요한데! ”
그러던 중, 한 귀부인의 오지랖을 시작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졌다.
헬레나의 원판이 워낙 좋다는 아부를 시작으로 부족한 요소를 언급하며, 은근슬쩍 다른 자리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 아, 저기……. ”
그에 헬레나는 난처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며 내게 도움을 청했지만, 나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정신 사나운 수다스러움에 휘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끼리 통하는 것이 있듯, 여자끼리만 통하는 것도 있다.
즉 그들만의 세계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일단 지켜보기로 결론내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귀족의 연회장이기도 하고, 경비가 없는 것도 아니니 크게 곤란한 일은 없겠지.
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을 홀짝이며 인파에 휩쓸려가는 헬레나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래도, 귀부인 특유의 허영으로 찌든 쓸데없는 바람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예 미용과 연을 끊고 사는 것도 아닌데다, 나도 자주 손을 대는 편이었으니.
“ 저… 실례합니다. ”
혼자 씹고 뜯고 맛보며 여유를 즐기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해, 처음 보는 여자였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기는 한데,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 누구… 시죠? ”
“ 아.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를 못 드렸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홀리 하운드라고 합니다. ”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 홀리 하운드가 아주 예의 바르게 고개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름을 들어보니 하운드 백작의 딸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핏줄이 아닐까 생각했다.
“ 하운드라면… 혹여 백작님의? ”
“ 네. 딸입니다. 어제는 다른 귀부인들과 섞여 있느라 인사조차 올리지 못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
단정해 보인다는 인상에 걸맞게 사죄마저 단정하다.
나는 속으로 고개 숙인 홀리 하운드의 첫인상을 그렇게 평가하며 고개를 들도록 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다 패악질을 부릴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상대가 다른 귀족이라면 모를까 백작의 딸이었기에.
“ 괘념치 마십시오. 귀부인들의 활기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는 저도 잘 아니까요. 방금 옆에서 겪어보기도 했는데… 정말 기가 팍 죽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
“ 어머나. 어리신 나이에 공작령에 여러 공헌을 하시는 분이요? ”
이 여자는 입을 가리며 웃거나,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들으며 정성들인 맞장구를 쳤다.
호들갑스럽게 큰 것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니. 뭘 봤다고 대체 진심이지?
내심 수상쩍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가운데, 돌연 홀리 하운드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 저… 대공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정원을 산책하시지 않으시겠어요? 달빛 아래의 정원은 무척 운치 있는 곳이랍니다. ”
한참 말을 주고받으며 안면을 익혔다 생각하던 차, 뜬금없이 정원을 걷자는 말을 꺼내들었다.
수줍어하는 것도 그렇고, 의도가 너무 뻔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어설퍼서 귀엽게 느껴진다… 고, 생각하겠지.
이걸 낚여줄까? 말까?
나는 체통을 지키려는 듯 잠시 망설이는 척 하다, 일부러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 좋지요. 잠시 옷을 다듬은 뒤에 내려갈 테니, 먼저 정원으로 내려가 주시죠. 곧 따라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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