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농업의 민족 엘프 #5
* * *
“ 후우……. ”
헬레나는 가늘고 긴 숨을 토해내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잔에 찰랑이던 피존 블러드 빛깔의 액체는 텅 비어, 군데군데 묻은 얼룩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귀족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며 숨을 죽였다.
크라우저라 해도 다소 무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들을 놀리기 위함이 아니라고 몸소 증명했으니 어찌 불만을 토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와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향이 코를 자극했다.
이제 갓 숙성을 마치고 나온 첫 와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청량한 향이었다.
모순된 두 성질이 함께 엮인 것이 놀라웠다.
과연 공작은 공작인가.
알베르트 바르칸은 지난날 헬레나와 혼인 관계를 통해 집안을 엮어보려 했던 일을 반성하며, 마치 뒤를 따르듯 와인을 입으로 가져다댔다.
평범한 감성을 가진 귀족으로서는 무척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오물로 취급받는 다크엘프이기에 그들이 수확한 포도 또한 더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세척을 해도 지워지지 않을 더러움이 선명히 묻어 있을 것이 느끼면서도, 그는 등을 떠밀리듯 짙고 붉은 액체를 맛보았다.
놀라웠다.
놀라운 맛이 아닐 수 없다고, 그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갓 숙성을 마치고 나온 것이 이 정도라면, 과연 이 물건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맛은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작 다크엘프가 만들었다 하여 이 훌륭한 일품을 멀리 한 자신의 옹졸함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바르칸 백작의 모습을, 그리고 헬레나의 뒤를 따르듯 엉거주춤한 기색으로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공작이 저렇게까지 권하는 이상 먹어보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였다.
“ 허, 허어…! ”
그들 모두가 바르칸 백작과 썩 다르지 않은 감탄을 입에 담았다.
아무리 더러운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할지라도 뛰어나기만 하다면 쓴다고 하는 말이 절실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곧 크라우저의 실력주의의 증명이자, 과장을 보태보자면 역사에 뿌리박힌 관념조차 뛰어넘는 안목의 증명인 셈이었다.
“ 어떻습니까? 맛이 제법 괜찮지요? ”
“ 그… 그렇군요. ”
“ 크흠. 여전히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공작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
속을 떠보는 듯한 헬레나의 물음에 귀족들이 헛기침을 흘리며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이 옳았다고 증명이 된 셈이나, 그렇다고 해서 다크엘프에 대한 반감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손에 꼽힐 만한 맛임에는 분명하다.
분명하지만, 다크엘프가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마이너스가 되었다.
상식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질적 요소로만 평가하기엔, 그들이 품고 살아 온 세월이 너무도 깊고 딱딱했다.
약간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포문은 연 셈이겠지.
헬레나 또한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욕심을 부리자면 너도나도 입을 모아 와인의 구입을 요구하는 것이 최고겠지만,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맛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 해도 큰 수확인 셈이었다.
그 이후에도 연회는 계속되었으나, 어딘가 착 가라앉은 기색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흘렀다.
놀라움과 어색함, 그리고 헬레나의 발언으로 인한 충격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
“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장 무언가 바뀌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싹은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
연회가 끝난 후. 나는 다크엘프들의 거처에 들러 며칠에 걸쳐 치러진 연회에 관해 이야기했다.
상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엘렌이었으나, 다른 다크엘프들도 옹기종기 모여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만들어진 난로에서 따뜻한 불씨가 피어오르는 넓은 통나무집.
나무로 만든 창이라 밖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으나, 밖에서 본 이곳은 분명 동화 속 한 풍경을 재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 그래? 참 고마운 일이야. 신기하기도 하고. ”
엘렌은 눈앞에 놓인 야채구이 꼬지를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름대로 고마움을 전하고자, 또 조촐하게나마 그들만의 연회를 꾸미기 위해 만든 요리였다.
야채에 간을 하고 구울 뿐인지라 어렵지는 않아도 불을 조절할 때 요령이 필요하기는 했다.
“ 욕심이 나지는 않으셨나요? ”
“ 가식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혀 없었어. 늘 말했듯이 우리에게 있어 인간이란 늘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존재였고, 우리는 그들 속에서 섞여 사는 것을 택했지. 적어도 엘프보다는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았고, 힘으로 누르면 그만이었으니까. ”
그녀는 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마냥 편안한 기색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대하지 않은 것은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라는 듯, 다른 엘프들도 엘렌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 그렇다고 하더군요. ”
“ 응. 그랬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사치스러워. 우리가 발붙이고 살 수 있는 땅이 버젓이 생겼고, 가꿀 수 있는 나무와 식물이 있어. 시작은 황무지였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아니잖아. 그치? ”
“ 예. 아주 훌륭하죠. 잘 꾸민 정원 같기도 합니다. ”
“ 그건 너무 과장이 심한 거 아냐? 귀족의 정원과 비교할 정도는 못 되겠지. 그래도… 우리 눈에는 그 어떤 정원보다 훌륭하긴 해. ”
조그맣게나마 부쳐 먹을 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듯, 다크엘프 무리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내 땅이 있고 없고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였다.
하물며, 이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대륙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떠돈 용병이었으니 더 그럴 수밖에.
“ 참. 그러고 보니 공작을 혼자 내버려 두고 와도 돼? 너랑 떨어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잖아. 전처럼 일이 있다면 그럭저럭 넘어가는 기색이지만, 오늘은 그런 것도 아니었을 텐데. ”
“ 위로 차 들르겠다고 하니 마지못해 허락해 줬습니다. ”
“ 정말? 정말 그것뿐이야? ”
엘렌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흘겼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을 보니 뭔가 극적인 답을 기대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헬레나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았기에 그러는 것이겠지.
그 증거로, 다른 다크엘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의 맥락을 잡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직접 헬레나와 대면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엘렌 혼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 네. 그 외에 별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
“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
나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멘탈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면 그녀의 말에 흔들렸을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기에 태연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사실, 헬레나의 반대가 있기는 했다.
다른 사람을 보내 위문품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끝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내가 말렸다.
땅을 주고 터를 닦는 데 큰 도움을 준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싫어. 꼭 지온이 갈 필요는 없잖아.
반대는 계속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 보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을 뿐이었다.
단순히 내가 곁을 떠나 이들과 같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결과, 여러모로 진한 행위를 통해 그 고집을 억지로 꺾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가 하는 공격에는 내성이 없던 헬레나였기에, 아마 지금도 집무실 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그래. 개인 사정을 너무 캐내는 것도 예의가 없는 짓이니 이쯤에서 그만 둘게. ”
다행히 내가 입을 다물기만 하자, 엘렌은 캐내는 것을 포기한 듯 아쉬운 티를 팍팍 냈다.
“ 네.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
“ 그럴 거야. 아무튼, 참 부러운 관계라니까. ”
“ 부러우시면 엘렌도 남자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
“ 내가? 농담이지? 그냥 의뢰나 사무적인 일로 만나는 인간마저도 꺼림칙한 티를 팍팍 내는데, 이 몸에 손을 댈 남자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엘렌의 눈빛이 날카로움을 더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서렸다.
무척 미약한 정도지만 불쾌감이 명백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아마 그녀도도발을 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불쾌한 감정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말만 들어 봐서는 도발을 하는 것과 썩 다르지 않아 보였으니까.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깊이 하며, 죄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려 했다. 그러나,
“ 아니면, 네가 날 안아볼래? 공작과 약혼 관계라는 건 잘 아니까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어. 애초에 귀족은 결혼을 하고서도 문란하게 논다며? 그러니 미리 경험한다 생각하고 덤벼보는 건 어때? ”
“ 엘렌?! 그건 너무…! ”
“ 조용히 해. 나는 지금 지온 알트람에게 묻고 있는 거니까. ”
예상 이상의 도발이 날아들었고, 엘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다나의 말문을 틀어막으며 눈을 빛냈다.
마치 내 대답 여부에 따라 크게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기색이었다.
이 좋은 분위기가 내 실수 하나로 망가지다니. 아무리 사이가 좋아졌다고 해도, 지켜야 했던 선을 넘은 탓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들쑤신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해자는 별 생각 없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꼼수를 부리기보다 정면으로 뚫고 나갈 방법이 없는지를 고민했다.
꼼수를 부릴 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은데다, 꼼수를 부리며 아파질 머리를 상상하면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 후우──. ”
그래. 지르자.
어차피 말아먹은 김에 해볼 수 있는 것은 전부 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은 엘렌의 손을 꼭 잡았다.
“ 갑자기 뭐야…? ”
“ 이 말이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헬레나보다 엘렌을 더 빨리 만났다면… 분명 제 쪽에서 먼저 고백했을 겁니다. 제 눈에 보이는 당신은 그만큼 매력적이니까요. ”
“ …윽?! ”
싸늘했던 눈이 당혹감에 물들고, 날카로웠던 눈빛은 토끼마냥 크고 동그랗게 변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여자들도 놀랍기는 매한가지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 장본인인 엘렌보다 놀랍지는 않아 보였다.
어찌 보면 여자를 꼬시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결코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헬레나보다 모자라는 몸이기는 하지만, 매끄러우면서도 신비로운 잿빛 피부도 참 매력적이었다.
탄탄함만 따져보면 훌륭하기 그지없기도 했다.
“ 너무… 막 던지는 거 아냐? ”
“ 저는 진심입니다. 이 때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헬레나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귀족의 성생활이 문란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적어도 저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
귀족은 결혼하고 나서도, 그 이전에도 충분히 문란하다. 문란해도 된다.
그것이 이 대륙의 상식이기는 해도 나는 그 상식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헬레나를 배신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짓을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상상이 되었던 탓이다.
“ …하아. 너 같은 남자는 처음 봐. 어린 주제에, 아니… 어려서 그런 건가. ”
“ 그럴 지도 모르죠. 아무튼, 제가 경솔하게 꺼낸 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나는 이 때다 싶어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걸했다. 너무 비굴하지 않게, 적당히 당당함을 갖춰서.
“ 알았어. 네 진심은 제대로 알았고, 용서도 받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만 놓아줘. 부끄러워. ”
다행히 진심이 통했는지, 말랑말랑해진 엘렌이 얼굴을 붉힌 채 내가 잡은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목소리도 기어들어가고 있어, 그녀가 말한 대로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가 정말로 안심했다는 듯 손을 떼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엘렌은 원망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정말로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볍게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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