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농업의 민족 엘프 #4
* * *
“ 음… 정말 미안하게 됐소. ”
엘렌은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연신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건너편에 자리한 헬레나가 여전히 도끼눈을 뜬 채 쨰려보기 바빴기에 한껏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했다.
집무실에서 응접실로, 응접실에서 또 서로가 마주하는 상황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입장에서 한숨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억눌러야만 했다.
제법 달래가며 화를 억눌렀기에 저정도에 그치는 것이지, 집무실에서 보인 반응을 그대로 끌고 왔다간 사단이 터졌을 지도 몰랐다.
“ …하아. 어쩔 수 없지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사전에 약속을 잡고 오시길 바라요. 오늘처럼 서로 얼굴 붉힐 일을 피하고 싶으니까요. ”
“ 꼭 그렇게 하리다. 그럼, 나는 이만 내 자리로 돌아가 보겠소. ”
엘렌이 내심 어처구니없어 할 것이 분명했음에도, 나는 별 말 없이 그녀를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거니와, 나로서는 이러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 아 참.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언제 혼인을 하실 생각이오? ”
돌연, 엘렌은 문 앞에서 등을 돌린 채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녀로서는 그저 별 이유 없이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겠지만, 헬레나의 눈빛이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혼인이라는 단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다.
“ 혼… 으흠!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
더해, 냉랭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봄 날씨만큼 따뜻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냈다.
손바닥 뒤집듯 너무 심한 변화였다.
“ 음? 별 이유는 없소. 그저 크게 신세 진 두 분이 언제 가정을 꾸리나 궁금했을 뿐이오.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정을 이루면 좀 더 단단해지고 좋지 않겠소? ”
“ 산전수전 다 겪은 분답게 훌륭한 혜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물론 그 말씀대로지만, 결혼은 적당히 때를 봐서 할 예정입니다. 제가 혼기가 찬 나이이기는 해도, 지온이 아직 어리니까요. ”
잊기 쉽지만 나는 열다섯이다.
물론 옛날 시대나 지금 이 대륙이나 일찍 결혼에 이르는 것이 썩 이상한 일은 아니나, 그저 내가 꺼림칙했기에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정말로 별 것 없었다.열다섯부터 기둥서방이라는 게 찝찝했을 뿐이다.
헬레나와의 결혼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치르기엔 미묘하게 마음에 걸린 탓이다.
“ 아… 그러고 보니 알트람의 후계자께서는 이제 열다섯이었지. 행동거지 때문에 내 잠시 나이를 잊고 있었소. ”
“ 후후. 그럴 수 있지요. 지온은 예전부터 참 어른스러워서……. ”
헬레나는 자기 아이 자랑에 급급한 부인마냥 활발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에 엘렌은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하다는 듯한 기색을 띠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응접실의 문을 닫은 것이리라.
다만,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곧 헬레나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을 보였다.
“ 오, 그랬소이까? 후계자께서는 어릴 때부터 사려가 깊었던 모양이오. 지금 우리에게 준 은혜도 그렇고, 타고난 성품이 훌륭하다는 뜻이겠지. 참 훌륭하오. ”
“ 그래요. 지온은 정말 훌륭하지요. 그리고 또……. ”
나는 노골적인 칭찬세례 속에서도 침착하게 자리를 지켰다.
돌연 헬레나가 나의 하복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굴을 붉힐 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어김없이 효과를 발휘하는 강철멘탈 덕이다.
“ 이런, 너무 늦어버렸군. 정말 실례가 많겠소. ”
“ 아뇨. 저도 오랜만에 즐겁게 이야기할 상대가 생긴 것 같아서 기뻐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
제법 긴 시간에 걸친 수다가 끝나고, 엘렌은 맥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응접실을 나섰다.
헬레나의 얼굴에 꽃이 핀 모습이나 분위기를 보면, 조금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훈훈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엘렌은 나를 구실로 삼아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려는 셈이었겠지만… 참 참혹한 대가다.
◎◎◎
“ 자자! 다들 서두릅시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계시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세요! ”
“ 예! ”
귀족들을 모아 치르는 연회의 당일.
나는 오랜만에 홀로 주방에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요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총괄 감독은 앤디가 맡아 진행하고 있었으나, 그는 연회 준비의 전체적인 책임을 맡고 있어 주방에 얼굴 비추기가 어려웠다.
그렇다 해서 주방의 책임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트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내 몫의 요리를 만들거나, 가끔 옆의 사람을 도우면 그만이었다.
재료의 밑 준비는 깔끔하게 마쳐둔 지 오래이나, 조금이라도 더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에 맞춰 조리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주방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 야! 거기 양파 좀 더 볶아! 아직 색이 덜 났잖아?! ”
“ 샐러드 드레싱이 모자라다고! 얼른 좀 만들어서 내 줘라! ”
평소 사이좋기로 정평이 난 주방 식구들이 언성을 높여가며 서로를 채찍질했다.
뜨거운 불앞에서 냄비를 흔들고, 한쪽에서는 접시를 꾸미거나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등 손이 비는 사람이 없었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요리를 하는 짬짬이 주변 상황을 살폈다.
헬레나는 주빈들을 맞아 대응하기 바쁘지만, 나는 곁을 지키는 일 뿐이었기에 일부러 주방에 내려와 일을 돕고 있었다.
헬레나의 평소 모습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처음에는 당연히 반대했다. 그러나 귀족 사이에 치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다는 내 변명을 믿었기에 주방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더해, 내가 만든 요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도 섞였지만…….
“ 아무래도 좋지. ”
나는 내 몫의 마지막 요리를 만든 뒤,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훔쳐냈다.
매일같이 하루 대부분을 뜨거운 열 앞에서 보내는 요리사들은 자연스레 땀을 잘 흘리지 않게 된다고 하던데, 참 부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모든 요리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노동 강도가 더럽게 높은 탓에 고생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니까.
“ 지온 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
크라우저의 주방을 담당하는 바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아무리 주방 일에 익숙한 그라고 해도 한바탕 전쟁을 치렀으니 지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 바트 씨도 정말 고생 많았어요. 미리 요리를 만들어 두면 좋았겠지만, 그러면 식는다고 불평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 ”
“ 그렇지요. 감히 공작님 앞에서 그런 불만을 드러낼 분은 없을 지도 모르나, 불만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은 즉 주인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기도 하고요. ”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 당연히 연회의 주최자인 주인이 욕을 먹게 된다.
바트가 말한 대로 면전에서 이게 뭐냐고 불평할 인간은 없다 치더라도, 두고두고 씹어 먹을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나면 자연스럽게 체면이 깎이고 만다. 쉽게 말하면 쪽팔리는 셈이다.
“ 아무튼, 이것으로 나머지 뒷정리만 하면 그만이니… 지온 님은 슬슬 올라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 나 참. 정신없이 주방에서 일할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같은 파벌의 모임이라고는 하나, 골칫덩이인 제가 얼굴을 비추기엔 영 찝찝하네요. ”
“ 골칫덩이라니, 그 무슨 말씀을! 애초에 그 일은 헬레나 님이 워낙 정이 깊으신 분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지온 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크라우저 저택에 아무도 없습니다. ”
바트는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었다.
덕분에 진작 불이 꺼진 주방이 아직도 가동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너무 금칠을 해 주시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
“ 절대 아니지요. 애초에 아가씨… 공작님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은 지온 님 뿐이십니다. ”
마치 기둥서방으로 들어붙어 잘 빨아먹고 사는 한량이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바트는 그렇게 꼬인 심사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나도 액면 그대로 그의 칭찬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라면 심기가 약간 불편한 정도에서 그쳤겠지.
“ 그 덕분에 큰 실수가 있었지만…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몰래 이층으로 올라가 가볍게 씻고 가야겠습니다. 땀투성이가 된 채 헬레나 님의 곁을 지키는 것도 안 될 일이니까요. ”
“ 어우, 그럼요. 두말할 것도 없지요. 얼른 올라가 보십시오. ”
나는 바트를 비롯한 주방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몰래 이층으로 올랐다.
꼭 위로 향하는 대계단이 아니더라도 올라갈 수 있는 샛길은 많았기에, 그곳을 통하면 그만이었다.
“ …다크엘프가 만든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 찝찝하시겠지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
급히 내 방으로 달려가려던 걸음이 무언가에 묶인 듯 꼼짝도 않았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홀에 마련된 연회장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한 여자의 말 때문이었다.
“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와 킬리네어 공작의 결투에 큰 도움을 준 것이 그들입니다. 그렇다 해서 오물이라는 생각을 단번에 벗어버릴 수는 없겠지요. 저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 여자, 헬레나는 와인잔을 손에 쥔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향해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다크엘프의 포도로 만든 와인임을 막 밝힌 듯싶었다.
나는 내 방으로 향하다 말고, 눈에 띄지 않는 난간에 붙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 지 유심히 살폈다.
나와 관련해서는 정도를 지나치는 것이 헬레나지만, 그렇지 않다면 공작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충분히 소화하는 여자니까.
“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오물이 숨을 쉽니까? 오물이 저희들처럼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가 회장에 울리자, 귀족들 모두가 일제히 침음을 흘렸다.
왕궁에서 보았던 면면들을 이렇게 다시 보니 기분이 참 묘했지만, 그들이 한 여자의 말에 저리 위축된 것도 참 놀라웠다.
“ 지금 말문이 막힌 여러분들이 그러하듯,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크엘프도 결국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아인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떠나, 현실이 그렇습니다. ”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여왔다.
내가 삼키는 침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마치 누군가가 삼킨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나 혼자만의 망상일 지도 모르나, 분명 그랬던 것 같다.
헬레나의 목소리는 그 울림이 깊고 아름다웠고,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몸짓은 당당하면서도 기품이 넘쳤다.
자신에게 떳떳하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는 기품이었다.
“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 크라우저 가문은 결코 겉만 보고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
그녀는 바로 지금, 모두가 상념에 잠겨있을 때 크라우저를 대표하는 능력주의를 입에 담았다.
크라우저의 능력주의는 그들이 다루는 아랫사람들 보다는 그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 그리고 가문을 이끌어 갈 후계자들을 겨냥하기 위한 사상이었다.
말단이 능력이 없다 하여 내버리는 것과는 달랐다.
나는 틈을 찌르는 듯한 헬레나의 말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내가 쉬는 숨소리가 저기까지 닿을 리 없겠지만, 이토록 고요한 분위기에선 그것마저 방해가 될 것 같았으니까.
“ 그래요! 능력입니다. 능력만 있다면, 또는 마음가짐이나 품성이 갖춰진 자라면 기꺼이 씁니다. 이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크라우저의 뿌리 깊은 전통이자 자부심입니다. 그러니……. ”
세상에!
누군가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 탄식을 내질렀다.
더구나 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이 연회에 참여한 대부분이 그럴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음이 분명했다.
독약을 먹는 것도 아니고 저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헬레나가 솔선하여 와인잔을 호쾌하게 비우는 모습이 충격적일 만도 했기에.
그저, 충격을 주기 위함이라고는 해도 와인을 물처럼 마시다니. 참 여러모로 놀랍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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