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52화 (52/192)

〈 52화 〉 사냥 #1

* * *

“ 그래. 놀랍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꺼려진다는 게 이유겠지. ”

와인의 시음회 자체는 성공했으나, 판로를 뚫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맛은 훌륭하다 치더라도 다크엘프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은지라 어쩔 수 없기는 했다.

헬레나는 그것이 안타까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도 안타깝다는 마음은 같았지만 헬레나보다는 덜할 듯싶었다. 발안자로서 아쉬움이 가장 클 만했음에도 착잡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남의 일을 보는 것 마냥 미약한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 결국 시간이 답이라는 거로군. ”

“ 그렇겠지. 조금씩 풀어 나가면서 정착시키는 수밖에 없을 거야. ”

결국 시간이 답이라는 것이겠지.

나는 헬레나의 답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소극적인 답안이라 한들 지금으로서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공작이 즐긴다는 와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알아서 흥미를 가질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리라.

“ 좋아. 그러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썩 상쾌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방책까지 나온 이상, 괜히 골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또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 시간 낭비이기도 하고.”

“ 그렇긴 하지. ”

소문은 기다린다 치더라도, 그 외에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나는 눈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겨울이니만큼 수확 시기도 지났고, 눈이 쌓인 도로를 정비하는 자잘한 일 정도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정작 그런 잡일마저도 다른 사람들이나 영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테니, 사실상 한가로이 짝이 없었다.

그러니, 이 한가로운 시기를 타서 무언가 짤막하게라도 할 수 있다면…….

“ 아. ”

“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내가 멍해진 틈을 타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헬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은근슬쩍 내 허리를 감싸며 몸을 밀어붙이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누군가를 걱정하는 목소리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설령 흑심이 있다 해도 괜찮았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기이니만큼 스킨십을 통해 달래고자 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놀이거리가 그리 많지 않은 세상이니 지루함을 달래는 법도 원초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헬레나의 흑심보다 뇌리를 스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을 뿐이다.

“ 아니. 별 일은 없는데… 아마 곧 생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래. ”

“ 생겨? 무슨 일이? ”

“ 몬스터 사냥 말이야. 우리 쪽에서 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

나는 허리춤을 감싼 헬레나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헬레나의 품에서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상황에서 서로 눈을 보고 이야기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 몬스터 사냥? 그건 리슬링 변경백 쪽에서 담당하는 일이잖아. 굳이 거기까지……. ”

리슬링 변경백.

대대로 중립을 표명하는 가문의 백작이자, 충성보다는 나라의 보존을 중시하는 다소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소문에는 그러한 행동을 보고 속을 알 수 없다는 등 변경백을 둘러싼 여러 소문이 나돌았으나, 나로서는 참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주기적으로 광활한 숲에 들어가 몬스터의 수가 일정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묵묵히 솎아내는 점.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라에 충성한다고 하면 보통 왕가에 충성하는 것과도 비슷한 말인데, 그것과 일선을 달리하는 사상도 마음에 들었다.

경우에 따라 위험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나, 진짜 애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 …아. 그렇구나. 가서 다크엘프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좋게 하려는 생각이지?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

“ 그래. 내가 말 안 해도 잘 아네. ”

“ 지온은 내 남자고, 나는 지온의 여자니까. 이런 생각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어. ”

헬레나는 앞보다 뒤를 힘주어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지배하는 것보다는 지배받는 쪽을 더 선호하는 그녀였으니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요즘 들어서 헬레나 쪽에서 나를 요구하는 일이 부쩍 늘어나기는 했으나, 그 본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 원정대는? 얼마나 꾸릴까? ”

하아──. 헬레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마치 말로만 듣던 창부의 유혹이 따로 없어 보였다. 그것도 쉽게 떨쳐낼 수 없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색기를 드러낸 채.

나는 슥, 몸을 돌려 헬레나를 정면에서 끌어안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용병단 형식으로 꾸려 가면 되겠지. 다크엘프를 포함해서, 인솔자 몇 명 정도만……. ”

“ 지온이 갈 생각이라면 나도 데려가. 아버지에게는 내가 미리 말씀드려 놓을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 정도 투정은 그 분도 이해해 주실 거야. ”

헬레나는 내 속내를 훤히 읽어낸 듯 무척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다.

그녀의 아버지인 이스에게 일을 떠넘기려는 생각까지 한 것을 보니 짧은 순간에 작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아니라면,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쭉 해왔던 것이겠지.

아무튼, 나쁠 것은 없었다.

예전처럼 속도에만 눈이 팔려 헬레나와 납치되는 척 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금 할 일이 그리 없는 좋은 시기다.

더해, 소드마스터가 직접 나선다면 안정성이 한층 더 보장되는 셈이니 든든하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공작 스스로가 위험한 굴에 들어가려는 것을 극구 말려야 정상이겠으나, 내가 본 헬레나는 몬스터보다 더 흉악한 무력을 갖춘 여자다.

그러니 몬스터 소굴에 직접 발을 들이기에 조심은 할 테지만, 또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하겠어? 헬레나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는 거지. ”

“ 거짓말. ”

내 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헬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동자에 담긴 빛을 읽어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기색이었다.

“ 나를 지배하는 유일한 남자가, 힘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

그녀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한 탓인지 뇌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욕구를 마음껏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이 생각이 아닌 반사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겪는 순간이었다.

살다보면 이게 정녕 뇌를 거치는가 싶을 정도로 괴상한 말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과는 성격이 약간 달라 보였다.

정을 갈구하는 본성이 머리를 집어 삼켜 사람을 단순히 말하는 짐승으로 만들고 있었다.

“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

“ 다크엘프에게서 들었지. 여러모로 험악한 일을 많이 겪었고, 또 오래 살 여자들이니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더라.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요 사이에 말하는 투와 행동에 거침이 없어졌다 생각했더니, 설마 그들이 관여되어 있을 줄이야.

나는 설득을 포기한 채, 일단 헬레나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거절당하면 소심한 그녀는 자책에 자책을 거듭한 끝에 우울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가 달래야 할 텐데, 그럴 바에야 지금 당장 헬레나에게 맞춰주는 것이 현명했다.

◎◎◎

다음 날. 우리는 예정했던 일을 하기 위해 엘렌의 거처로 말을 몰았다. 마차는 너무 눈에 띄고 거창하기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말 두 필만을 데리고 갔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말을 모는 헬레나의 표정이 몹시 밝았다. 때때로 배를 쓰다듬으며 뺨이 붉어지기도 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보면 참 반응하기 묘했기에, 나는 그녀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 전후사정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이 참! 얼른 끝내자니까 이렇게 또 질질 끌면 어떻게 해?!

엘렌의 거처 근처에 이르자 시끄러운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언성이 높아진 것을 보면 무언가 일이 있을 것 같았으나, 목소리가 밝은 것으로 보아 가벼운 투정인 듯싶었다.

헬레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에서 내려, 한쪽 나무에 줄을 묶어둔 뒤 곧장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강해지는 수다소리에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 미안해. 그래도 평시에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용병으로서도…….

─우리가 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알아! 엘렌의 마음도 잘 알고! 근데 밥은 좀 먹고 하자, 응?! 벌써 때가 지났잖아!

─그, 그래…….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올리비아의 투정 아닌 투정은 지극히 당연했고, 다른 여자들도 그에 공감하듯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덕분에 홀로 구석에 몰린 채 쩔쩔 매는 엘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몹시 볼 만했다.

“ 크, 크흠. 추태를 보여 미안하게 되었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나머지……. ”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엘렌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차 두 잔을 마련했다.

허브를 우려내 만든 차라 그런지 달콤하면서도 우아한 향이 느껴졌다. 홍차와는 다르게 맛도 깔끔해 먹기에도 편했다.

“ 그렇긴 하지요.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니까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헬레나는 우선 고개 숙여 사죄를 표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덕분에 엘렌이 다시 한 번 당황하여 손사래를 쳐야 했지만, 부끄러움은 없었기에 훨씬 안정된 분위기가 흘렀다.

“ 아, 아무튼… 이렇게 아침 일찍 들르셨으니, 무언가 용건이 있는 것이오? ”

“ 네. 여러분에게 몬스터 사냥을 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

“ 음?! 몬스터를…? ”

예상대로, 엘렌은 몬스터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자세를 바로 했다.

살면서 몬스터 토벌도 몇 번 해보았을 테지만, 여태까지의 세월에 비하면 그 비율이 몹시 낮은 수준일 터였다.

몬스터 토벌보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것만 보아도 그 점은 명백했다.

“ 몬스터라.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시오? ”

“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이유가 큽니다. 제가 아직은 밖에 돌아다니고 싶은 나이라서요. ”

“ 음… 하긴, 공작께서는 충분히 젊으시지. 거기다 그만한 무력도 있으시니, 그저 집 안에 박혀만 있는 것이 답답할 만 하겠소. ”

엘렌은 적당히 에둘러 말한 헬레나의 변명을 이해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헬레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 덕도 있었으리라.

사실을 말하는 사람 특유의 힘 말이다.

“ 어느 정도까지 잡으실 예정이오? ”

“ 최대 목표는 트롤까지 잡아두고 있어요. 하지만 오크 사냥이 주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아시다시피 번식력이 가장 뛰어난 개체니까요. ”

“ 그렇긴 하지. 가죽도 좋아 벗겨 쓰기도 괜찮고… 고급 소재 중에서는 대중적인 편이니 그 쓸모가 아주 클 거요. ”

우리가 목표로 하는 변경백 영지의 너머엔 몬스터의 천국이 있다.

몬스터가 살기 좋은 환경이라서가 아니라, 몬스터가 아주 득실대는 환경이기 때문에 천국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몬스터들이 무리를 이루고, 약육강식의 원초적인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크의 번식력은 참 대단했다.

자기네들끼리 잡아먹히는 와중에도 생태계 밖의 인간들이 경계를 해야 할 정도니까.

“ 좋소. 애초에 공작께서 이리 부탁하러 오셨으니 거절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런 겨울날은 농사꾼들이 쉬는 날이지. ”

비닐하우스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 대륙에 그런 시설은 없다.

그러니 계절에 순응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 당연했고, 겨울에 쉬는 것 또한 그 이치를 따른 결과였다.

엘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고마워요. 야영 물자 등의 준비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여러분은 가볍게 개인 짐만 꾸려서 오시면 될 겁니다. ”

“ 알겠소. 인원은 몇 명이나 준비하실 계획이시오? 소규모요? 아니면 원정대를 꾸리실 생각이시오? ”

“ 여러분의 용병대를 포함해, 저와 지온 정도만 따를 겁니다. 아버지께는 이미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고요. ”

허락이라기보다는 보고에 가까웠지만, 허락이라면 허락이다.

이스 또한 이럴 때를 대비해 일에서 손을 떼지 않은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로서는 딸의 응석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을 지도 모르나, 결국 나의 망상일 뿐이다.

이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으므로, 그저 이런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그것이 썩 틀렸다고만은 생각지 않았다.

헬레나의 밝은 표정을 이스 또한 보았고, 그로 인해 만족해하는 눈빛을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 소규모로군. 하긴, 어찌 보면 현명한 생각인 듯 싶소. 공작께서도 그렇고, 지온 공도 그렇고… 두분 다 제법 무력을 갖추신 분들이시니, 규모를 크게 꾸려 괜한 희생을 내지 않는 것도 좋아 보이오. 대신, 그만큼 우리가 가져갈 몫은 얼마 없겠지. ”

“ 그렇겠지요. 수가 적은 만큼 전리품을 가져가는 데 한계가 있을 겁니다. 현지에서 짐꾼 대신 쓸 사람을 고용한다 해도 그 한계가 뚜렷하겠지요. ”

영지 내의 병사를 데려가는 것은 꺼림칙하나, 변경백 영지에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다.

돈과 위협의 균형을 생각해보고 덤벼드는 사람들일 테니, 데리고 가는 부담감이 무척 줄어들 것이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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