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결투 #5
* * *
“ 엘렌 레드후드……. 무슨 일로 여기에 왔나요? ”
헬레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불청객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탓에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 탓에 목소리 뿐 아니라 눈빛마저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 특별하게 일이 있어 들른 건 아니오. 저택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나서 들렀을 뿐이지. ”
“ 용병이라 그런지 감은 날카롭나 보네요. 그럼 별 거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슬슬 물러나 주시겠어요? ”
지극히 정중한 말투였으나 잔뜩 가시가 돋쳤음을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엘렌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쓰게 웃을 뿐이었으나,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거리를 좁혀왔다.
그것이 헬레나의 심기를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 저는 분명 물러나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 나도 그러고 싶지만… 소드마스터와 한 수 겨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것, 내 상대도 한 번 해주었으면 좋겠소. ”
엘렌은 불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헬레나를 응시했다.온몸이 미약하게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흥이 오른 기색으로 욕심을 내고 있었다.
헬레나와 손을 섞어보겠다는 욕심 말이다.
땡볕 아래의 다크엘프가 드러내는 열기는 여름의 그것마냥 무척 뜨거웠다.
마치 열성적인 고백을 하듯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며, 그 때문에 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 ……. ”
헬레나는 난처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전과 같이 날선 기색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헬레나 님. ”
나는 헬레나의 어깨를 쿡쿡 찌른 뒤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물러날 기색이 없다면 가볍게 상대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해, 대련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래. 어쩔 수 없지. 썩 내키지는 않지만. ”
헬레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 새 손에 목검을 쥐고 있었으며, 엘렌 또한 기다렸다는 듯 헬한 발 먼저 연무장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누워 쉬는 동안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두 여자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물러날 수 있었다.
“ 이왕 이렇게 된 것 성실하게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지요? ”
“ 물론이오. ”
엘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헬레나의 목검에서 활화산 같은 검은 오러가 치솟았다.
고작 눈 깜빡할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위압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찰나에 모든 것을 태우는 것 같았던 오러가 어느 새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헬레나가 자주 사용하는 형태이자 내가 자주 보았던, 검의 중심에 심지를 꽂아둔 듯한 오러였다.
“ 이것 참, 괜히 벌집을 쑤신 꼴이 아닐지……. ”
난처한 듯이 중얼거리는 엘렌의 이마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을 보아 정령을 불러낸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내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정령으로 인한 변화를 피부로 겪었기에 얻은 확신이었다.
“ 자, 그럼… 가겠소. ”
어딘가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이던 것도 잠시.
엘렌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띠기 시작함과 동시에, 공기를 찢는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
그 이후의 소란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만할 정도였다.
헬레나는 내게 보여준 동작이 장난이라는 듯 매섭게 몰아쳤고, 엘렌은 마법을 이용하여 그 진로를 어떻게든 막으려 애썼다.
양 손목과 목을 동시에 노리는 바람의 칼날을 쏘거나, 바닥에 물을 깔아 균형을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꽃으로 눈을 멀게 한 것이 압권이었는데, 그것에 대처하는 헬레나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불꽃의 섬광에 눈이 먼 틈을 노린 탄막을 눈을 감고 정확히 받아친 것이었다.
더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엘렌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시야가 암전된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했다.
아니, 오히려 눈으로 보았을 때 보다 더욱 정교하고 날카롭다는 느낌이었다.
내 느낌이 정확한지 확신은 못 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날카로움을 더하는 칼끝이 그런 인상을 품게 만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드마스터가 의외로 약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곧 커다란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엘렌이 생존이라는 분야에서 유별나게 강했을 뿐이었다.
“ 후우…! 이 정도라면 결투에서도 크게 문제는 없겠네요. ”
헬레나는 약간 달뜬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칼끝이 소매나 갑옷 끝에 닿은 적은 많았으나, 정작 치명타로 잇지 못했던 탓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 나야말로 마스터의 검은 정말 오랜만이었소만… 가장 살벌하기 짝이 없더군. 대련을 신청했던 내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오. 주제도 모르고 범의 아가리로 들어갔으니 말이오. ”
“ 겸손도 너무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주제를 거론하기엔 그 실력이 무척 뛰어나시더군요. 덕분에 마법사를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엘렌 또한 죽다 살아난 사람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갗을 베인 듯한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있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 그 당사자는 오죽할까.
헬레나는 그런 엘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무척이나 대범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더구나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귀족이 그 주축이다. 그러니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당연했다.
“ 어, 으음……. ”
“ 손이 부끄럽습니다. 얼른 잡아 주시죠. ”
“ 아, 그래야지. 음. ”
엘렌은 헬레나의 독촉에 못 이기는 척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품을 찝찝함은 둘째 치더라도, 악수를 거절했다간 모처럼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리라.
“ 고맙소. 그대는 내가 상대한 마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오. ”
“ 제게는 과분한 칭찬이네요. ”
두 여자는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나는 그들이 쏟아내는 칭찬의 세례를 가만히 지켜보며 새삼 오싹함을 느꼈다.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아직까지 성장할 여지가 크게 남겨져 있다는 뜻도 되었다.
그러니 오싹할 수밖에.
“ 그럼, 나는 한 발 먼저 방으로 돌아가겠소. 인사가 늦었지만, 좋은 방을 마련해 줘서 고맙소. ”
“ 네. 살펴 가시길. ”
엘렌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사라지니, 빈자리만큼 허전해진 연무장에 나와 헬레나만이 남게 되었다.
어느 새 금실처럼 반짝이던 햇살도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무척 긴 시간이 흘렀음을 알리고 있었다.
“ 언제 오후가 된 거지……. ”
대련을 하는 사람도, 보는 측도 혼이 쏙 빠질 만큼 농밀한 한 때였다.
그러니 나 또한 시간가는 줄 모르다, 헬레나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주워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그러게. 시간 참 빨리도 간다. ”
“ 그만큼 집중했다는 뜻이겠지. 대련이라고는 했지만 반쯤 죽일 생각으로 덤벼든 것도 한 몫 거들었을 테고. 아무튼, 이런 적은 처음이야. ”
헬레나는 연무장 구석에 걸린 수건을 집어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전투에서 고비를 겪은 적이 없었던 그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인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밀린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그 정도로 강했어? ”
“ 지온도 봐서 알잖아? 그만큼 강한 존재와 겨뤄보는 건 처음이었어. 그러니 소드 익스퍼트급과 결투하는 것이 위험하다 말하는 것도 다 거짓말처럼 들려. ”
더구나, 엘렌의 마법은 유달리 대인전에 특화되어 있었다는 말도 흘렸다.
그녀가 마법사와 겨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마음먹기에 따라 마법을 더 크게 펼치는 것도 가능했을 거라고.
나는 의심할 것도 없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실력만큼이나 역량을 재는 솜씨도 뛰어난 헬레나가 단언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나 또한 엘렌이 얼마나 위협적인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수긍했던 면도 있었다.
유산을 얻으면 세계 붕괴의 한 축을 담당할 잠재력을 갖춘 여자였으니까.
“ 어쨌든 수고 많았어. 내일도 잘 부탁해. ”
“ 응. 그렇게 할게. 지온의 부탁이니까 절대 소홀히 하지는 않을 거야. 그 대신……. ”
헬레나는 잠시 말을 끊은 채 서로의 손이 맞닿을 만큼 거리를 좁혀왔다.
얼굴까지 붉힌 것을 보니 무언가 조용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에 잠자코 답을 기다렸더니, 긴장을 탁 풀리게 하는 김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헬레나의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였다.
“ 오늘 저녁은… 조금 든든하게 부탁해. ”
예. 그렇게 해 드리지요.
◎◎◎
약간 소란스러웠던 어제 이후에도 헬레나의 훈련은 계속됐다.
그와 동시에 일과를 소화하는 것은 다소 힘에 부쳤지만, 한 숨 돌리고 나면 어느 정도 움직일 기력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체력이 더욱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나는 다크엘프 몫의 식사도 함께 만들었기에 더욱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헬레나의 손님이라고는 하나 하인들이 다크엘프를 찝찝하게 여겼으니, 서로가 어색할 상황을 최대한 피하게 하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헬레나는 처음 내 결정을 듣곤 난색을 표했으나, 억지로라도 모셔야하는 하인들의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기 드물게 다크엘프에 대한 반감이 미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머지는 아니었으니까.
“ 하아…! ”
“ 지온…! 아주 훌륭해! 조금 얕긴 했지만 내 배를 정확히 때렸어! ”
“ 그, 그래……. ”
결투를 며칠 앞둔 오후 무렵, 나는 여느 때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헬레나에게 효과가 있을 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 배에 자그마한 충격을 안겨 준 것이 무척 뿌듯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취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헬레나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지만, 그 직후 얼굴을 붉힌 채 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내가 하는 짓이라면 폭력조차 기쁘게 받아들일 것 같아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배빵에 기뻐하는 여자라. 그거 참 귀하군요.
“ 응! 이 정도면 익스퍼트 급의 기사라도 상대할 만 할 거야. 지온도 오러를 쓸 수 있으니까. ”
“ 내 오러 수준으로도 괜찮을까? 객관적으로 말해 줘. ”
“ 내가 보기엔 가능하다고 봐. ”
나는 익스퍼트 급의 오러에 오러로 부딪히는 것이 불안했으나, 헬레나의 말을 듣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다.
내 말이 없었더라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분명 사실이겠지.
만약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나를 배려해서 수준을 부풀렸다면, 결투에서 크게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 다행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몰아붙인 게 의미 없진 않았나봐. ”
“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의미가 없을 수가 없지. ”
헬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점심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좀 더 휴식을 취해도 될 법 했으나, 조리를 하는 입장에서는 움직이지 않기도 미묘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움직일 힘을 찾으려 애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주방에 발을 들일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목욕까지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물을 뒤집어써서 먼지를 씻어내야 했다.
“ 끄응……. ”
그래. 슬슬 일어나야지. 그래야 씻고 점심준비라도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여전히 후들거리는 팔로 억지로 몸을 지탱해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허리와 배에 힘을 주어 단숨에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 지온! 좀 더 쉬어! 아직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
“ 훈련은 훈련이고, 내 할 일은 해야지. 결투가 끝나면 이 정도로 힘들게 훈련하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야. ”
나는 헬레나의 배려를 정중히 사양하며 땅을 딛고 섰다. 결투가 끝나지 않은 이상 느슨하게 행동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특히 훈련을 핑계로 일을 거르기 시작하면 단숨에 게을러질 것 같아 불안했다.
물론 헬레나는 그런 내 모습마저 기꺼이 수용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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