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결투 #6
* * *
“ 하하, 이것 참……. ”
마차 바퀴 덜컹거리는 소리가 은근하게 들려오던 중, 엘렌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그러세요? ”
“ 음. 새삼스레 긴장이 돼서 그렇소. 한 나라의 왕궁에 들어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거든. 그 점이 참 묘하게 느껴져서 그만. ”
“ 아… 그러셨군요. ”
무심코 던진 질문의 답이 의외였던지라, 나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가 아이처럼 들뜨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엘렌의 반응도 충분히 수긍이 갔다.
용병으로서 전쟁터에 불려 다니고, 다크엘프로서 천대의 눈길을 받고 사는 그녀이기에 왕궁과 연이 멀 만도 했다.
오히려 어느 왕족들과 연이 가까우면 그것이 더 의심스러웠겠지.
“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전하는 공증인일 뿐이니까요. 또 결투가 끝나면 바로 돌아갈 테니 다른 인간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
“ 배려는 참 고맙소만… 나도 그렇게 눈치만 보고 사는 여자는 아니오. 오히려 거친 눈길이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지. ”
엘렌은 헬레나가 배려 차원에서 꺼낸 말에 거친 미소로 화답했다.
다크엘프가 어떤 눈총을 받고 사는지는 본인이 잘 알지만, 선을 넘으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 전해져왔다.
그에 헬레나는 피식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자기만의 기준에 철저히 따르는 듯 보였으니 이제 와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삶의 경험이 짧은 인간들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우스웠다. 우리의 배 이상을 살아오고, 또 살아갈 여자였으니까.
“ 그러시다면 다행이네요. ”
“ 그래도 그 배려는 고맙게 받겠소. 당신 같은 인간들은 여태껏 처음 만났거든. 그래서 그런지 대하기가 곤란할 때도 있지만, 참 마음이 편안하오. ”
엘렌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않더라도, 반 정도는 열어젖힌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초대한 입장에서 보면 참 다행이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결투를 앞에 두고 너무 여유로운 것이 아닐까 싶다가도, 오히려 이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을 바꿨다.
지나친 긴장은 위축으로 이어져 제 실력을 내기 어려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여자들이 그 정도로 실력이 깎일 만한 수준은 아니겠지.
◎◎◎
우리는 마차를 타고, 검문을 받아 왕궁 안의 기사단 훈련장으로 발을 들였다.
크라우저의 저택에 마련된 것보다 크고 잘 정돈된, 마치 큰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연무장도 있었다.
─허억! 다크엘프…!
나는 검문소에서 엘렌을 보고 놀란 병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묵을 지켰다.
비단 그 병사뿐만이 아니라, 이 연무장에 이르기까지 거북한 시선들을 받아야 했던 탓이다.
더구나 그 농도가 얼마나 짙던지 당사자가 아닌 내가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 괜찮으세요? ”
“ 풋. 뭘 그리 신경을 쓰고 그러시오? 내 앞서 말했듯, 오히려 이런 시선이 더욱 편하다 하지 않았소? 보시오. 저토록 알기 쉬우니 상대의 속내를 가늠할 필요도 없어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소. ”
“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
나는 엘렌의 대범함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만큼 감격했다.
덕분에 얼마 없던 긴장감마저 풀어져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부작용으로 흐트러진 모습까지 보일 뻔했다.
“ 크라우저 공작. 정말 괜찮겠소? ”
내가 한참 정신과 태도를 가다듬고 있던 중, 엘렌이 헬레나와 맞은편에 자리 잡은 킬리네어 측의 인간들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마치 개미떼 같은 기사들의 무리가 참으로 압권이었다.
“ 괜찮으냐고요? 아. 저 기사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 그렇소. 공작께서 상대할 이들은 익스퍼트 급의 고수 백이라고 들었는데… 면면들이 참 만만치가 않아 보이오. 상급도 많고, 최상급도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
“ 저 정도는 예상했던 바입니다. 괜찮아요. ”
헬레나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감을 표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근본이 소심한지라 섣불리 승리를 점치는 편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그 본래의 모습과 상당히 동떨어진 기색이었다.
나는 그것을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지면 뒤가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오만보다는 얼른 방해물을 치워야겠다는 강박감에 쫓기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보았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헬레나가 얼어붙을 듯 냉랭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을 리가 없으니까.
“ 10대 1이라……. 연무장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그 편이 적당하겠지요. ”
한 발 먼저 연무장에 오른 헬레나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여럿이서 한 명을, 더구나 여자를 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아 보였음에도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상대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 소드마스터이기에.
다만, 나로서는 외곽을 철저히 둘러싸 퇴로를 막지 않은 것이 의문스러웠다.
물론 쪽수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행동의 폭이 제한되고 꼬여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 되리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외곽을 둘러싸 퇴로를 막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연무장 바깥에서 철저히 자기 위치를 지키기만 하면 그만인 것처럼 보여서다.
“ 아마 외곽에 기사를 배치하지 않은 건… 기사로서의 긍지나 자존심,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
어느 새 내 곁으로 바싹 다가온 엘렌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의문에 정확히 답하는 것을 보니, 내 표정이 어지간히 알기 쉬웠나보다.
“ 그런가요? 공작의 권유를 받고 오른 시점에서 그런 감정에 휘둘리는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 ”
“ 나로서는 완벽히 부정 못 할 의견이네. 그래도, 내 생각은 그래. 아니면 역으로 아군을 방해할 가능성을 고려해 차례대로 나서기로 결정한 건지도 몰라. ”
“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건 전부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네요. ”
“ 그렇지 뭐. ”
결국 우리의 생각은 모두 추측이라는 다소 허무한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머리를 싸맨다 한들 이미 결투가 시작된 상황이다.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거니와, 알아낸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헬레나가 저들을 죽이지 않고 승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그럼, 시작하시게. ”
상석에 앉은 소테르 국왕의 근엄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결투의 첫 막이 올랐다.
기사들은 국왕의 선언을 듣기 무섭게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본래 상대가 항복 선언을 하거나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 규칙이었으나, 적어도 그들이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줄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상처입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기사로서 활동이 불가능할 치명상을 입는 순간 죽는 것보다 더한 악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기사들은 공작의 회유와 협박에 응해 이 자리에 섰지만, 일이 어느 쪽으로 굴러도 스스로의 몸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것은 몸을 사린 탓에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 어서 오시죠. ”
순간, 헬레나의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기사들의 신경을 자극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도 않고 칼끝을 까딱거리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상대를 도발하는 폼이 참 예사롭지 않다.
헬레나와 마주한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좀처럼 앞으로 나서질 못하고 있었다.
시간제한이 딸린 결투가 아니다.
그러니 다소 여유롭게 대처할 법했으나, 연무장에 선 기사들을 포함한 나머지 무리들의 심장은 아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강도를 높여가는 헬레나의 압박감이 심장을 옥죄었기에.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기사들은 가볍게 눈을 맞춘 뒤일제히 앞으로 돌진했다.
정확히는 헬레나를 조이는 진형을 그린 뒤 일제히 덮칠 생각이었다.
정면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수가 제한되어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례라.
헬레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들을 보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려, 특유의 검은 오러를 칼끝에만 맺히게 했다.
평소에도 오러를 무척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편이긴 했으나, 이번 행동은 오러의 소모량을 극단적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또한, 그 행동은 다른 뜻이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너희들 정도는 칼끝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 으윽…! ”
비록 그 격의 차이가 너무도 크게 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면 자연스레 열이 받기 마련이다.
기사들은 헬레나의 그 뜻을 잘 알았기에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타고 남은 연기처럼 남아 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노가 대신했다.
그리고 그 분노를 담아 있는 힘껏 휘두른 검은 각기 다른 열 방향에서 덮쳐들었다.
목, 어깨, 팔, 발목, 다리 등등… 모든 방향에서 빈틈없이 들이닥치고 있어, 명백히 상대를 죽일 작정으로 휘두른 검이었다.
그에 소테르 국왕의 낯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설령 노예가 된다 한들 소드마스터라는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저 공격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 커다란 손실이 나게 된다.
그 나름대로 계산을 통해 공증을 서기로 한 결투였으나,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는 안 되었다.
다만, 국왕의 그 걱정은 아주 쓸데없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 허억…! ”
대체 언제!
기사 중 하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튕겨 나온 검을 바라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분명 검을 휘두를 때 까지만 해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헬레나가, 어느 새 몸을 한 바퀴 돌려 모든 검을 쳐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다고, 지온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헬레나의 움직임만을 주시했던 그는 겨우 짧은 호흡 한 번을 할 순간에 공간을 수놓는 검은 선을 볼 수 있었다.
온전히 다 볼 수는 없었으나, 대부분은.
“ 쯧. ”
헬레나는 혀를 차며 전방의 기사 셋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등 뒤에 서 있던 기사 둘이 예상보다 빨리 자세를 고쳐 잡고 덤벼들었기에, 그것보다 훨씬 더 빨리 대처해야 할 상황이었던 탓이다.
“ 끄아아!! ”
검은 건틀릿에 가려져 있던 기사들의 팔에 깊이 파고들었다.
오러가 칼끝에만 맺혀 있었던 덕에 팔이 반쯤 잘려나가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으나, 자칫하면 물건을 쥐지 못할 만큼 치명적인 상처였다.
손목과 가까운 팔뼈까지 흠집이 났으니까.
그렇기에 기사들은 신음했고, 어쩔 수 없이 검을 놓치고야 말았다.
“ 이 정도로 칼끝이 흔들리다니. ”
헬레나는 어느 새 몸을 빙그르 돌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으나, 정작 칼끝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헬레나를 공격했던 기사들의 팔이 눈 깜빡할 사이에 깊은 상처를 입었으니까.
“ 한심하긴. ”
본래 헬레나는 상대에 예의를 갖춰 대하는 편이었으나, 지온이 엮인 경우에는 그 예의를 쓰레기처럼 구겨버린 듯 행동했다.
저 건너편 상석에서 비릿한 미소를 띠는 킬리네어 공작을 향해 영지전을 신청한 것도 그러했으며, 기사들을 향해 도발을 서슴지 않는 것 또한 그 행동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리를 향해 낮게 이빨을 들이밀던 검을 쳐낸 직후 바닥을 구르는 것도 그랬다.
굳이 바닥을 구를 만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것은 불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철저히 깔아뭉개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 포석이란, 상대의 발목 뒤 힘줄… 즉, 아킬레스건을 끊는 것이었다.
“ 아아악!! ”
“ 힘이! 힘이 안 들어가…!! ”
몸을 지탱하는 강한 줄이 끊어지면 서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제아무리 강한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나중에 마법사를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현 상황에서는 도저히 설 수 없을 상처였다.
“ 후웁! ”
그러나헬레나의 모욕은 지금부터라는 듯 더 충격적인 광경이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발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기사들의 상갑을 걷어 차, 투척용 바위 대신으로 쓴 것이었다.
“ 커헉?! ”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탓일까.
헬레나의 등을 노리던 기사들은 각자 동료의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연무장 바깥으로 훨훨 날아갔다.
그 힘이 얼마나 셌던지, 발로 걷어찬 플레이트 메일의 상갑이 흉하게 우그러졌을 정도였다.
“ 다음. ”
허나, 정작 그 참상을 일으킨 헬레나는 지극히 무덤덤하게 다음 상대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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