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침묵의 시간
“…….”
강준과 테일러와 떨어져 나온 헉스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육지는 지옥 같았지만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고 평화로워서 이상향 같은 느낌마저도 들고 있었다.
저 너머 건너편에는 유토피아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헉스는 무심결에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찰싹!
차가운 바다 거품이 헉스의 발을 때리고서는 이내 스며들어왔다.
그 차가움에 정신이 돌아오는 헉스였지만 그의 생각을 가득 채우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섬 사나이 인 헉스이기에 바다에 대해서 무척이나 잘 알았다.
바다는 모든 것을 주지만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엄하고 가혹한 그렇기에 바다를 경외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섬 사나이들은 그렇기에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순응의 대상으로 보려고 한다.
하지만 사나이들은 때로는 도전을 해야만 하고 정복을 해야만 하는 강렬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헉스는 지금이 그런 도전의 때라고 여겼다.
“이건 도망이 아니다.
헉스는 도망이 아니라 도전이라고 외치며 어린 시절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들었던 전통 사모안의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절대 외양으로 나갈 수 없는 뗏목에 지나지 않았지만 먼 과거부터 그런 배로 거친 바다를 건너 왔었다.
철제 못이나 장비들이 없이도 먼 조상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배를 만들어 왔고 그 배를 가지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를 탐험했다.
인간의 유전자 깊숙이 박혀 있는 탐험과 도전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 배워 왔던 데로 하면 돼!’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지만 헉스는 묵묵히 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특유의 강인한 체력과 힘 덕분에 무거운 통나무들을 바닷가 근처로 옮길 수 있었고 튼튼한 넝쿨로 단단히 고정을 시켰다.
단순한 뗏목이 아닌 사모안 특유의 기술을 가미함으로 해서 무척이나 튼튼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헉스가 홀로 배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냥꾼들이 언제 자신을 노릴 지 알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스스로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불의의 습격을 받는다면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헉스는 엄청나게 신경이 곤두 선 가운데 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헉스가 배를 다 만들 때까지 누구하나 헉스를 습격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강준이 막아주고 있었다.
강준은 헉스가 배를 만드는 것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고 있는 중이었다.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넝쿨이나 나무를 헉스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까운 곳에 놓아두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후우! 운이 좋군. 이런 곳에서 이런 좋은 재료를 찾을 수 있다니 말이야.”
만일 헉스가 배를 만드는데 모든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지도 몰랐지만 오직 배를 만들어 타고서는 섬을 빠져 나갈 생각 뿐이었기에 그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강준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뗏목을 만들어낸 헉스는 자신의 손목의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육지까지 얼마나 걸릴지 아니 육지에 도착을 했다고 해도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빠르게 도움을 받고 섬의 지옥을 끝낼 수도 있을 터였다.
자신들을 붙잡아 온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국가급의 세력은 절대 아닐 터였다.
무려 수천명의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일이었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죽음의 게임을 시킨 존재들이었으니 국제 사회가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것도 일단은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놈들이 어디서 보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헉스는 과연 자신이 몰래 이 섬을 빠져 나갈 때 자신을 이 곳에 가둔 자들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어둠에 몰래 빠져나가야 그나마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일주일의 생명을 연장할 인간이 필요했다.
그 것에 고민이 잠시 되었지만 이미 자신의 손에는 가득 피가 묻혀 있었다.
“그래. 살아남는다면 죗값은 치르겠다.”
헉스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다며 결심을 한다.
더 이상 과거의 자신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악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실 헉스는 강준과 테일러와 함께 자신이 만든 뗏목으로 바다를 건너고 싶었다.
“좋은 녀석들이었지.”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마지막 만찬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그 전에 구조가 된다면 좋겠지만 만약 세 사람의 시간이 다 된다면 헉스는 가장 먼저 자신을 희생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세 명 중 한 명만이라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일을 자신의 가족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헉스였다.
하지만 강준과 테일러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운이 좋게 찾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언제까지고 그들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자신이 만든 뗏목을 잘 숨겨두고 헉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셋이 모여 있던 곳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설득을 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억지로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헉스는 자신들이 숨어 있었던 동굴에 강준과 테일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강준과 테일러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남기고 간 음식 쓰레기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자를 볼 수 있었다.
강준이 생존자 대부분에게 크리스마스 만찬을 선물로 준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던 듯 싶었다.
꽤나 냄새 가득히 풍겼기에 굶주린 이들 중에 일부가 자신들의 은신처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헉스는 그렇게 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본능만이 남아 버린 사냥감을 습격했다.
“으윽! 윽!”
방심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상대가 헉스라고 할지라도 쉽게 붙잡히지 않았을 터였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결국 남자는 헉스에게 붙잡혔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가만히 있어. 딱히 지금 죽일 생각은 없다.”
“……!”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고 한 쪽 팔을 꺽은 상대가 죽일 생각이 없다는 말에 믿지 못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일단 설명을 할 시간은 없으니 기절이라도 해 있으라고.”
“헉!”
헉스는 남자의 뒷통수를 내리쳐서는 기절을 시켜 버리고서는 자신의 어깨에 메고서는 무언가 아쉬운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들이 먹다 남긴 피라니아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서는 숨겨둔 뗏목으로 향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살아서 육지에 도달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헉스였다.
그렇게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물까지 준비를 한 헉스는 뗏목의 가운데 기절해 있는 남자를 묶어 두고서는 점차 어둠이 내리는 시간을 틈타 강준과 테일러가 손으로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뗏목을 밀어 내었다.
출렁! 출렁!
바닷물에 뗏목이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뒤집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지만 헉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힘을 주어 섬에서부터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고 나자 뗏목은 해류를 탄 거인지 점차 빠르게 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흐음!”
흔들림 때문인지 헉스로부터 뒷통수를 얻어맞아 기절을 했던 남자가 깨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상황 파악을 못하다가 자신이 바다 한 가운데라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 나가는 중이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날뛰지 마라. 그리고 바다에 익숙하니까 그리 걱정 안 해도 돼.”
남자는 헉스의 말에 놀란 눈을 했다가 오래지 않아 이해를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헉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아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 둬.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니까.”
남자는 헉스의 말에 점점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며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자신 또한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먼 옛날 한 영화에서처럼 뗏목에 의지해 탈출을 꿈꾸게 되었다.
“…….”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섬에서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 것은 바로 강준이었다.
강준은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뗏목을 지켜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 뒤 강준의 입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말을 하던 강준이 입을 열었던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놀람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눈동자가 흔들린 강준은 결국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서는 섬의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