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침묵의 시간
헉스는 꽤나 의욕적이었지만 아쉽게도 강준은 그다지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현실성 없는 일이었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헉스로서는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기에 그 지푸라기와도 같은 희망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가능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자 했다.
인간은 그렇게 희망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 희망이 부질없는 것일지라도 그 것이 자신을 죽이게 되는 절망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대답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벙어리처럼 그 입 다물고 있지 말란 말이다!”
헉스는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강준의 무심함에 역정을 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어느덧 자신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는 강준에 그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간격.
타고난 싸움꾼이기도 한 헉스는 싸움의 간격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간격 너머에서 경계를 하고 있는 상대를 박살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특히나 자신과 대등한 적수라면 더욱 더 힘든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
헉스는 사나운 맹수끼리는 싸우지 않는 야생의 법칙에 이를 갈았다.
야생의 맹수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우지 않는다.
자칫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입는다면 가혹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헉스 또한 정말이지 작정을 하고 강준을 죽이겠다면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도 심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조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헉스 아니 모든 생존자의 머리 속에 가득했다.
그렇기에 사냥감을 사냥하려는 것이지 위험한 사냥꾼과 혈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사냥꾼이 방심을 한다면 언제든 죽일 생각이었지만 눈 앞의 강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냥감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간간히 헉스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략하고는 했을 뿐이었다.
“이익! 익! 이!”
화를 삭이며 겨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헉스는 무심한 표정의 강준을 외면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나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누구보다 바다의 무서움을 잘 알아. 니 놈들이 뭘 걱정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 사모안들은 뛰어난 전사이며 어부들이다. 큰 바다도 작은 배 나가로 건너던 위대한 항해사들이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듯이 회상에 젖은 말을 하던 헉스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준다. 옛날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은 왠지 이해가 되는군.”
헉스는 능숙하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헉스는 배를 만들 생각이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했고 그 배를 만드는 방법은 헉스의 머리 속에 있었다.
비록 전문적인 그런 배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나무와 나무뿌리로 만들던 원시적인 배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그런 원시적인 배로 바다에 도전을 하겠다고 한다면 누구나 미쳤다고 했을 것이었지만 과거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
인류가 퍼져나가던 그 멀고 먼 과거에도 인류는 작디 작은 조각배로 온 바다를 탐험하고 정착해 나갔다.
헉스는 강준과 테일러가 말을 했던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닷가 근처에서 배를 만들 생각이었다.
비록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만 그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헉스는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닷가 쪽으로 향하는 헉스의 모습에 강준과 테일러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런 의리나 책임 따위는 없는 일이었다.
오직 침묵으로 일관을 했고 헉스 또한 그 것에 대해서 그 어떤 섭섭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연하게 이루어진 파티인 이상 누구하나 그 파티에서 나간다고 해서 막지 않았다.
그렇게 헉스가 사라지고 난 뒤에 테일러는 강준의 눈치를 봤다.
자신을 붙잡아 온 강준이었기에 자신의 행동마저 방관을 할지 말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도망을 간다고 해도 강준에게 오래지 않아 붙잡혀서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딱히 죽일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뭔가를 얻어낼 생각이신 것도 아닌 것 같으시고요. 저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테일러는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다.
물론 작은 정보를 얻게 된다면 그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겠지만 이 곳은 그런 작은 정보마저도 얻을 수 없었다.
“…….”
강준은 그런 테일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자신의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서는 자신의 손에서 놓았다.
팔랑!
강준의 손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그 것은 공기를 타고 좌우로 흔들렸다.
“……!”
좌우로 흔들리는 그 것에 테일러의 눈동자도 같이 흔들렸다.
‘종이?’
테일러는 그 것이 종이임을 알아보았다.
별 것 아닌 종이였지만 테일러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종이였다.
이 섬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종이였다.
문명의 흔적을 찾아왔던 테일러는 사실 이런 고등의 문명의 흔적을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고등의 문명의 흔적은 사실 많이 볼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용한 무기들이나 의복들 그리고 식료품의 포장지들은 가끔이거나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것 이외의 것은 볼 수 없었다.
테일러에게 있어서 그런 것이 과거의 것인지 아니면 얼마 전의 것인지 구분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런 것을 제외한 그 이외의 흔적들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다가 강준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순백의 하얀 종이는 테일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덜! 덜!
그렇게 테일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얀 종이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조금이라도 원형이 손상이 되면 안 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는 테일러였다.
잔득 더러워진 자신의 손과는 달리 너무나도 깨끗한 흰색의 종이는 성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테일러는 그 하얀 종이에 무언가 작은 흔적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 흔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마침내 아주 작은 흔적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이…이 거! 어디서 찾은 겁니까?”
이 것의 위치를 찾아야만 했다.
퍼즐을 완성시키기 위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아!”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테일러는 강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유령이었다는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테일러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종이마저도 거짓이거나 환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자신에게 극도의 혼란을 가져다 준 하얀 종이는 그대로 자신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
몇 번을 계속 끝임 없이 작은 종이 한 장을 뒤집어 보며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이 것이 내 마지막 임무인가?’
테일러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 하얀 종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임을 절감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식인을 할 생각이 사라져 버린 테일러였다.
오직 지금 눈 앞의 일생일대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학자로서의 본능만이 테일러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비밀의 주인공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테일러는 바로 눈 앞에 서 있던 강준의 비밀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눈 앞의 하얀 종이와 같이 온통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남자의 입을 열게 만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