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3회
삼성동 크리스티 한국 지부 지하 1층.
수장고 앞에 서 있는 고한슬은 이강수가 나무 박스로 포장해서 보낸 3점의 그림을 앞에 두고 포장을 뜯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출품작은 사진 파일로 받아 보았으나 원화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포장을 뜯으면 다시 포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역시 다시 포장하더라도 원화를 봐야겠어.’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에 전시된 그림은 예상하지 못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비록 캔버스 크기도 작고 평범한 시골 풍경, 자연 풍경이면서도 절대 평범하지 않은, 비상한 예술성이 내재한 그림이었다.
이강수가 보내준 세 작품은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에 전시된 그림에 비교하면 크기부터 달랐다. 눈물은 25호,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변형 80호, 커피 열매 따는 소녀는 변형 90호다. 일반적으로 캔버스 사이즈가 큰 그림일수록 장엄하고 사람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그림 파일로 세 작품을 보았기 때문에 원화에 대한 궁금증이 더 강렬했다. 고한슬은 원화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나무 박스를 옮기는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성운 씨, 이 작품들 포장 제거해 줄래요?”
보통 키에 단단해 보이는 체격의 인턴사원 나인식과 이강수가 보내온 세 작품을 수장고에 보관하려던 김성운이 포장을 제거하라는 고한슬의 지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포장을 다시 해야 할 텐데요?”
“다시 포장하는 게 문제 되나요?”
“아닙니다. 공구를 가져오죠.”
입술을 꾹 다물며 굳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간 김성운이 잠시 후 공구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김성운과 나인식이 툴을 이용해 작은 나무 박스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제거했다. 나무 포장을 제거한 김성운은 작품을 살펴볼 수 있게 조명이 설치된 수장고 한쪽 벽에 걸어놓았다.
나무 박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림은 ‘눈물’이었다.
고한슬은 눈물을 감상하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가슴에서 뭔가 서러움과 분노가 뒤엉킨 먹먹함이 복받쳤다.
그림은 작가의 주관이 배제된 듯이 굉장히 객관적인 시점으로 표현되었다. 그 객관적인 시점이 오히려 보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흑인 소년의 눈에는 절망도, 분노도, 좌절도, 항변도, 애원도 깃들지 않았다. 그저 맑고 깨끗한 눈빛으로 관객을 피해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
불현듯 코가 잘린 아랍 소녀를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아랍 소녀의 눈은 수많은 보석이 빛나는 것처럼 신비롭고 영롱했다. 소녀의 코가 정상적으로 있었으면 소녀는 활짝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잘린 코가 그 아름다움을 파괴했지만, 소녀의 얼굴은 야만과 폭력의 잔인함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작품 ‘눈물’ 속 흑인 소년의 코는 잘리지 않았지만, 착취와 불평등, 부조리한 세상의 본질을 무심한 표정과 벗은 상반신의 검은 피부가 대변하고 있었다.
김성운과 나인식이 두 번째 그림을 벽에 걸었다.
단색조 화풍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이었다.
“아-”
고한슬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고한슬은 카카오나무의 요정들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단색조는 일정한 패턴을 통해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가까이 다가가 본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제목과 다르게 마치 추상화처럼 무정형의 패턴과 추상적인 형태의 작품이었다.
고한슬은 뒤로 적당히 물러났다. 약간의 거리를 확보하자 카카오나무와 배경 속에 녹아 있는 요정 같은 아이들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 작품도 엄청나구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거나 언뜻 보면 혼돈의 세상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나무와 아이들이 나타나네. 짙고 밝은 명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마지막으로 커피 열매 따는 소녀가 나무 박스 안에서 나와 벽에 걸렸다.
마지막 세 번째 그림은 커피나무 아래 커피 열매가 든 바구니를 옆에 낀 소녀가 계곡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아래에 시선을 주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 장엄하고 아름답다.’
장엄한 고산 풍경은 아득한 기분을 들게 했고, 바구니에 가득 찬 커피 열매가 소녀의 노동과 소녀가 처한 비참한 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소녀는 도시를 동경하며 산 아래를 바라보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고난을 잊고 잠시 자연의 따뜻한 속삭임에 마음을 뺏긴 것일까? 아마도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각각의 심리와 가치관에 따라 그림은 다양한 모습으로 읽힐 것이다.
세 작품을 전부 살핀 고한슬이 파르르 몸을 떨며 전율했다. 그림 한 점 한 점이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선사해 전신으로 감동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휴우-”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감상하던 고한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림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포장 뜯어 원화를 본 것이 얼마나 대행인지 몰랐다. 원화로 이강수의 작품을 보지 못했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고 팀장님, 그림이 예사롭지 않은데요?”
“네?”
고한슬이 생각에 빠져 자기 말을 듣지 못하자 김성운이 부연 설명했다.
“이강수 화가 그림이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습니다. 이강수 화가 프로필 보니까 생각보다 젊은데 그림은 완숙한 경지에 이른 느낌이 드는데요.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놀랍네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 성운 씨는 이강수 전시회에 한 번도 안 가봤나요?”
“예. 안 갔습니다. 기사는 가끔 봤는데 그림값 거품 논란도 있고, 말이 많더군요.”
“언제 기회 되면 이강수 씨 개인전에 꼭 가 봐요. 여기 작품 못지않으니까요.”
“그런가요? 저번에 ‘졸업반 아이들’이 7억에 낙찰됐던데 이 작품들은 시작가가 얼마인가요?”
고한슬이 눈물을 가리켰다.
“저기 작품 제목이 ‘눈물’인데 시작가는 5억이에요.”
“아, 작품이 좋긴 한데 5억이면 꽤 높은 시작가인데요? 사이즈 작은 작품이 5억이면 요가 두 작품은 더 높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커피 열매 따는 소녀,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각각 4억 원이에요.”
“어, 그래요? 작가가 눈물을 굉장히 아끼나 보군요. 캔버스 사이즈가 훨씬 작은데도 시작가가 더 높으니 말입니다.”
고한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한슬은 이강수가 보내준 시작가를 확인했을 때 김성운처럼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은 결코 과한 시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세 작품은 저번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의 출품작에 비해 캔버스 크기도 크고, 예술적인 의미가 한 단계 높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특히 눈물은 25호로 다른 두 작품에 비교하면 사이즈가 훨씬 작다. 하지만 이강수는 다른 두 작품보다 눈물의 시작가를 높게 책정했다. 눈물은 이강수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 분명했고, 작품성이나 사회성을 반영한 메시지나 예술적 완성도도 감히 흠잡을 곳이 없어 보였다.
다른 두 작품 시작가는 호당으로 계산하면 대략 500만 원 내외다. 그에 반해 변형 90호인 커피 열매 따는 소녀가 440만 원, 80호 크기의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500만 원이다.
“성운 씨, 이 그림들 원래대로 포장해서 보관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김성운이 나인식과 강수의 세 작품을 다시 포장하기 시작했다.
*
신축년 마지막 날 12월 31일이 서서히 밝아졌다.
강수는 어제 고한슬에게 연락해 크리스티 한국지부로 그림 3점을 보냈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송년회 모임을 가졌다.
신축년 마지막 날, 오전 7시.
평상시보다 늦게 잠에서 깬 강수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커튼이 쳐진 거실은 정적에 잠겨 있었고 컴컴했다.
째깍! 째깍!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
고요한 거실에서 시간이 1초 단위로 소멸하고 있었다. 폐쇄된 공간의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강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휴, 머리야.”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지끈거림과 함께 갈증을 느낀 강수는 식탁 위에 있는 생수를 한 잔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갈증을 지웠다.
“크, 살겠다.”
잔을 식탁에 내려놓은 강수가 거실로 가 커튼을 젖혔다. 밖은 뿌옇게 여명이 밝아오며 어둠이 옅어지고 있었다. 신축년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고, 17시간 뒤에 새해가 새로운 진군을 시작할 것이다.
‘크리스티에 그림도 보냈고, 이젠 뉴욕 전시 작품만 준비하면 되는구나.’
어제는 크리스티 한국지부에 그림을 보낸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2차에서 끝내고 자정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머리가 약간 지끈거렸다.
오늘 밤은 종각에서 주하와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그 전에 몸도 풀 겸 북한산에서 수련 좀 하고 와야겠다.’
강수는 작은 방으로 가 등산복을 입었다. 몸을 비틀며 가볍게 스트레칭한 강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동 입구로 나오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휘감았다.
강수는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전신 관절이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느낀 강수가 수련 장소를 향해 조깅하듯 달려갔다.
익숙할 때도 되었지만 산을 타는 것은 항상 고통스럽다. 다리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지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며 피를 펌프질한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폐는 숨 가쁘게 공기를 들이킨다.
“후흡, 후후.”
두 번 숨을 들이마시고, 두 번 내뱉는다. 장딴지와 허벅지가 찢어질 것만 같이 부풀어 오른다. 전신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한계까지 다다를 때쯤 어느 순간 햇볕에 눈 녹듯이 고통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극악한 고통이 사라지자 전신이 날듯이 가벼워지고 기분은 상쾌해진다.
그렇게 10분 남짓 더 달리자 수련 장소가 나타났다.
“휴우-”
수련 장소에 도착한 강수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배낭에서 수건을 꺼낸 강수는 흠뻑 땀에 젖은 등산복을 벗고, 땀을 닦은 후 새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시원하군.”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운동을 하고 나면 몸도 가뿐하고 기분은 상쾌해진다. 그래서 며칠에 한 번은 수련할 겸 비탈진 산길을 뛰는지도 모른다.
강수는 바위 위에 쿠션 방석을 깔고 그 위에 가부좌하고 앉았다.
마나하트는 3서클에서 요지부동이다. 4서클 마나하트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련의 절대량이 요구된다. 아니면 순간적인 각성에 의한 마나 축적 같은 행운이 필요하다. 강수는 두 번이나 우연히 각성을 통한 마나 축적으로 단기간에 3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가끔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마나 축적이 떠올랐지만,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자랄인이 지구에 오지만 않으면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4서클 마나하트가 당장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수는 조급해하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수련하자.’
숙취는 거의 없어져서 수련하는데 문제 되진 않았다. 강수는 사념을 중단하고 호흡에 집중했다. 대기 속에 흩어져 있는 마나가 호흡을 통해 폐부로 들어와 마나하트의 인력에 끌려 마나하트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뽀로롱, 뽀롱.
꾸꾸꾸- 꾸욱!
휘이잉-
인적 끊긴 사위는 산새 소리 울음과 차가운 바람만 스쳐 지나며 정적을 깨뜨릴 뿐 고요했다.
*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종로 보신각 주위는 제야의 종소리를 돋기 위해 몰려든 시민으로 들끓었다. 시민뿐만이 아니라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중계했고, 기자들은 플래시를 터트리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강수와 주하, 임해영, 이동석이 보신각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타종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해영이 김주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24시간 밀착 경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해영과 공식적으로 사귀고 있는 이동석도 별수 없이 강수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강수가 주하와 단둘이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이동석도 임해영과 단둘이 만날 수 없었다.
임해영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동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김대풍 어르신이 귀국하면 출퇴근한다고 하니까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임해영의 김주하 24시간 밀착 경호는 김주하의 할아버지 김대풍 어르신이 해외에서 귀국할 때까지라고 했다. 김대풍 어르신이 4월에 귀국하면 임해영의 경호는 출퇴근으로 바뀐다. 김대풍 어르신 귀국까지 3개월 넘는 시간이 남았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이제 좀 있으면 타종하겠다. 오빠는 새해 무슨 소원 빌 거예요?”
주하가 강수를 올려보며 물었다.
“글쎄? 소원이라면 우리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고, 또 행복해지기를 빌어야지. 주하는?”
“저도 오빠랑 같아요. 한 가지 더 있는데 오빠 뉴욕 개인전도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있어?”
“네에.”
“뭔데?”
“헤헤. 그, 그게....”
김주하가 말하기 곤란한 듯 쑥스럽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동석이 김주하의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크크. 제수씨, 아이를 갖고 싶은가 보네. 그것도 허니문 베이비.”
“허니문 베이비?”
강수가 주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주하는 이동석의 말에 토 달지 않고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살짝 내렸다.
주하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동석의 말이 맞았다.
강수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 낳겠지만 허니문 베이비보다는 조금 나중에 낳으면 좋겠는데. 둘이서 신혼을 보내야 하지 않겠니?”
주하가 고개를 들고 강수 팔을 껴안았다.
“오빠, 신혼도 좋지만 우리 허니문 베이비 가져요. 난 오빠 닮은 아이 빨리 낳고 싶어요. 무엇보다 어머님이 손주를 너무너무 보고 싶어 하세요. 오빠가 외동아들이라 손주가 더 그리운가 봐요.”
“응,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한 강수가 내심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건 안 되지. 아이 낳았다간 신혼은 한 방에 날아가는 거야.’
강수도 어머니가 손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허니문 베이비는 KTX급 열차였다.
‘그건 곤란해.’
강수는 이 문제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대충 넘어가고 신혼여행 가면 절대 안에 사정하지 말자고 각오를 다졌다.
“우와아-”
“십! 구! 팔!”
이때, 거대한 함성과 함께 시민이 카운트다운을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제 타종하네요.”
강수 일행도 카운트다운에 동참해 숫자를 줄여나갔다.
“칠! 육! 오! 사! 삼! 이! 일!”
때앵-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10만여 명이 운집한 보신각 주위로 새해를 알리는 우렁찬 종소리가 퍼져나갔다.
펑펑!
누군가 밤하늘로 쏘아 올린 폭죽이 섬광을 남기고 터졌다. 섬광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불꽃을 뿌리며 공중으로 치솟은 다른 폭죽이 터지면서 찬란하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보신각 주위에 모인 시민들은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종소리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 소원을 빌었다.
강수는 신혼이 끝난 2, 3년 후에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고, 김주하는 허니문 베이비가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임해영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의 행복을 빌었고, 이동석은 임해영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민석 형님이네?’
노민석의 전화였다.
“민석 형님, 안녕하세요?”
[강수야, 연락이 늦었다. 홍콩경매에서 대박난 거 축하한다.]
노민석의 목소리는 항상 쾌활하고 활력 넘쳤는데 오늘따라 차분한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기사 보셨나 보네요?”
[그래. 연주가 알려줘서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다는 기사 봤지. 그림 한 점에 칠억이면 우리나라에서도 톱클래스 작가 아니냐? 그 정도 그림값 받는 화가가 몇 안 될 턴데 말이야. 정말 대단하다.]
“형님, 낙찰가가 그림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제가 봤을 때 졸업반 아이들은 경매 특성상 경쟁 붙어서 그런 가격이 만들어진 것 같거든요. 거품 가격일 겁니다.”
[글쎄? 그런 기사도 있지만 향후 네 그림값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사도 있더라.]
강수가 스스로 거품 가격이라는 말을 하자 노민석의 목소리가 밝아졌고, 가벼워 진 것 같았다.
“맞아요. 그림 한 점으로 뭘 알겠습니까?”
노민석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그래. 그리고, 저기... 강수야.]
“예? 형님.”
[그, 내 카페에 전시해 놓은 핑크티티 초상화 있지 않냐.]
“아, 예. 말씀하세요.”
노민석이 어렵게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핑크티티 초상화를 일년 동안 카페에 전시해 놓다 보니까 이제 카페의 일부가 되어서 말이지. 카페를 접지 않는 이상 두고두고 전시해야 할 것 같아서 아예 내가 핑크티티 초상화를 구매하고 싶은데 어때? 혹시 초상화를 나한테 팔 수 있을까?]
“핑크티티 초상화요? 음, 그건....”
강수는 핑크티티 초상화의 판매를 생각해보았다. 초상권이 걸림돌 될 소지가 있으나 세나만 빼면 핑크티티 소속사의 부탁을 받고 그린 그림이라 문제는 없었다. 세나 초상화도 소속사의 홍보물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허락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핑크티티 소속사에서 초상권을 문제 삼을 리 없다. 단지 기본적인 사항을 점검해봤을 뿐이었다.
“딱히 문제 될 게 없어서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림값은....”
강수는 그림값으로 얼마를 받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홍콩경매 이전이었다면 호당 25만 원 선에서 계산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단체전에 출품할 작품은 호당 280만 원 내외에서 정할 계획이었다. 초상화를 노민석에게 선물로 주지 않는 이상 적정한 그림값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
침묵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노민석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몇 달 사이에 그림값이 너무 올라 미안했지만, 카페가 잘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나마 말하기 편했다.
“형님, 제 그림값이 좀 올랐는데요.... 호당 이백만 원, 초상화 한 점당 사천만 원입니다. 너무 비싸죠?”
노민혁이 즉시 대꾸했다.
[아, 아닐세. 홍콩에서 낙찰된 그림값을 생각하면 비싸다고 할 수 없지. 오히려 나한테 싸게 판매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실은 다음 달에 개막하는 단체전에 출품하는 작품가보다 호당 가격을 낮게 책정하긴 했죠.”
[거보라고. 내 말이 맞았지. 핑크티티 초상화는 내가 구입하도록 하겠네. 다섯 점이니 이억이군. 참, 풍경화도 구매하고 싶은데 머그잔에 그렸던 풍경화는 얼마면 될까?]
“풍경화는 선물로 드리죠. 그리고 형님. 지금까지 부친 대여료는 그림값 이억에서 빼세요.”
[어? 그래도 되나?]
“물론이죠. 대여하다 구매하는 것이니 대여료를 빼야죠.”
[그렇게 편의를 봐주니 정말 고맙네. 그림값을 빨리 마련해서 조만간 자네 작업실에 찾아가겠네.]
“네. 언제든지 오세요.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강수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밖은 이미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이제 곧 매서운 북서풍이 불고 동장군이 찾아올 것이다. 11월 단체전과 12월 세 번째 개인전을 남겨 두었지만, 2021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무척 빠르게 흘러간 것 같았다.
‘내년엔 뭘 하지?’
12월까지는 할 일이 빡빡하게 잡혀 있지만, 내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딱히 계획이 없었다.
‘내년에도 그림 작업 외에 할 일이 없는 건가? 아,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가 떠올랐다.
내년에 치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주하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고,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희망나무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내년엔 희망나무의 후원금 모금을 본격적으로 알아봐야겠다. 국내에서 치료할 갑부가 없으면 꼭 국내에 국한할 필요는 없으니까 외국 갑부도 알아봐야지. 설마 외국에도 없으라고?’
상념에 잠겨 있는 강수 옆으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서혁중과 고원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