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2회
박진수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20대 중반의 이목구비가 시원한 여직원이 상냥한 미소로 맞았다. 사무실은 한쪽에 회의용 탁자가 놓여 있었고, 칸막이로 나눠진 공간이 여섯 개였는데 각각의 공간에는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명의 남녀 직원이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양진태 이사장님과 선약이 있습니다만.”
“선약하셨으면 박진수 이사님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여직원이 박진수를 안쪽 구석에 마련된 이사장실로 안내했다.
“박진수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이사장실에서 양진태가 반색하며 앞으로 나와 박진수와 악수했다.
며칠 전, 박진수는 희망나무에 전화해 기부와 관련하여 상담을 요청했었다. 희망나무가 출범하자마자 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고, 귀한 방문객이 아닐 수 없었다.
“앉으시죠.”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았고, 여직원이 물었다.
“녹차와 커피 있는데 차는 뭐로 드릴까요?”
“녹차 부탁합니다.”
“유경 씨, 나도 녹차.”
“네.”
여직원 박유경이 밖으로 나가자 양진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박진수에게 명함을 건넸다.
“희망나무 이사장을 맡은 양진태입니다. 우리 희망나무는 이제 막 출범한 신생 사회복지법인인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진수도 명함을 꺼내 양진태에게 내밀며 정식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별말씀을요. 저는 주식회사 알로직에서 상무 이사직을 맡고 있는 박진수입니다.”
박진수가 전화 통화로 기부에 관해 상담했을 때 양진태는 자기의 기부가 이강수와 연관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강수는 기부와 관련해서 희망나무 측에 자기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박진수도 원하는 바였다. 어떤 거래에 의한 기부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것 없었다. 순수하게 자진해서 기부한 것이 아니면 기부의 의미마저 훼손될 뿐만 아니라 어디 가서 기부했다고 말도 못 한다.
이때, 사무실로 박유경이 녹차 두 잔을 가지고 들어와 탁자에 놓고 나갔다.
녹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박진수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양진태 앞에 놓았다.
양진태가 서류 뭉치를 내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주식 기부에 관한 서류입니다.”
“아, 주식을 기부하시는군요. 어느 회사 주식인지요?”
“제가 재직 중인 알로직 회사 주식으로 3만 3천 4백 주입니다.”
“3만 3천 4백 주면?”
박진수가 빙긋 미소 지었다.
주식은 1주에 몇백 원짜리 동전주가 있는가 하면 몇백만 원씩 하는 황제주도 있다. 1주 가격에 따라서 기부금액에 큰 차이가 난다.
“오늘 알로직 주가는 6만3천 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3만 3천 4백 주는 약 21억 정도 합니다.”
“21억이요!”
주식이 돈으로 환산된 금액을 들은 양진태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며 짤막하게 외쳤다.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니오. 알로직 주식 3만 3천 4백 주, 약 21억 원입니다.”
“아, 네. 솔직히 굉장히 놀랐습니다. 혹시 저희 자원봉사자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요?”
“아뇨. 그런 분 없습니다.”
“그렇군요. 기부는 너무 감사한 데 이렇게 큰 금액을 개원한 지 한 달도 안 된 저희 희망나무에 기부하시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기부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양 교수님이 자기를 희생하며 오랫동안 사회 봉사해온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양 교수님과 같이 헌신하시는 분이야말로 이 사회의 빛이고 소금이 아니겠습니까? 양 교수님이 이사장으로 계시는 ‘희망나무’는 제 돈을 누군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유용되지 않고 올바로 사용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죠.”
“제가 유명한 사람은 아닌데 저를 알고 있다니 뜻밖입니다.”
“조용히 자기 신념을 실천하시는 그런 점이 더욱 믿음 갑니다. 자기 피알 차원에서 자원봉사 한답시고 요란 떠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상대방은 철학과 교수다. 생색내겠다고 길게 얘기해야 말실수하고 꼬투리 잡힐 수 있다.
박진수는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기 위해 신경을 썼다.
“그런 점에서는 박 이사님도 마찬가지군요.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기부하시네요.”
“저야 정치인도 애널리스트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인데 소문낼 이유가 없죠. 혹시 기부 사실을 알고 누가 물어보더라도 익명의 독지가라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속세를 떠나 ‘도’ 닦겠다는 분들이나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산다는 분들도 대부분 돈과 명예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하면 심지어 더 많은 이득을 취하겠다고 불법을 저지르기도 하죠. 또 큰돈을 기부하면 대부분 기부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고 명성이나 명예를 추구 하는데 이사님은 반대로 기부 사실을 숨겨달라고 하시는군요. 박 이사님은 도인보다 더 도인 같고, 세상사를 초월하신 분 같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양진태가 진심을 담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실은 저도 기부 사실을 언론에 알려볼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평범한 회사원이라 그럴 이유가 없었을 뿐입니다.”
박진수가 언론 보도를 피하고 싶어서 피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에게 5억만 기부하겠다고 했는데 21억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지면 사달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박진수가 언론 보도를 피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 사회는 매달 약간의 돈을 기부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익명의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의 기부가 결식아동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그에 반해 억대의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은 기삿거리가 될 만큼 매우 드물다.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익명의 사람과 달리 기부를 이용해 명성을 얻으려거나 사업하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 수백억 원을 벌었다고 알려진 어떤 이는 모교 대학교와 몇몇 단체에 수억 원씩 기부했다. 그의 기부 행위는언론사에 알려졌고, 각종 언론매체에서 그의 기부행위를 보도했다. 특히 아르바이트로 모은 수백만 원을 주식에 투자해 수백억 원을 벌어 기부하는 청년이라며 주식의 귀재인 것처럼 기사를 내보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가 기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부분 60개월 내외의 약정으로 기부했고, 주식으로 수백억을 벌었다는 내용은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거짓이었다. 비록 기부는 사실이었지만 영웅 심리에 사로잡힌 그는 거짓을 바로잡지 않고 묵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처럼 명성에 나약하고, 기부를 통해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기부자의 속물적인 본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부 사실을 숨겨 달라는 박진수의 요청에 속으로 꽤 놀랐다. 박진수가 기부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양진태는 박진수의 기부를 순수하게 평가한 것이다.
“인류의 정신과 문명이 한 차원 높게 진화하지 않는 한 돈이 사람과 사회를 움직이고 지탱하는 근간이죠. 박 이사님이 기부해주신 귀한 돈을 헛되이 쓰지 않겠습니다.”
“네, 양 교수님을 믿겠습니다.”
박진수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서류에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저는 회사에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할까 합니다.”
“박 이사님, 벌써 가시게요?”
“잠깐 시간 내서 왔거든요. 볼일 다 봤으니 가봐야죠.”
박진수가 사무실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박진수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 양진태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양진태는 이유 없는 기부는 없다는 진리를 20년 넘게 봉사 활동해오며 체득했다. 학연이나 지연, 아니면 인척 관계든 기부자의 신상은 십중팔구 자원봉사자와 연관 있기 마련이다. 기부금액이 커질수록 연관 관계는 더욱 뚜렷하다. 하지만 박진수 이사가 어느 자원봉사자와 연관되어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희망나무는 이제 갓 출범한 신생 법인이다. 21억 원이라는 거액을 희망나무와 연관 없는 사람이 기부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더구나 기업이나 기관도 아니고 개인이 한 번에 21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기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알로직 박진수 이사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와 연관될만한 봉사자가 없군. 설마 봉사자와 연관이 없는 걸까?’
문득 자원봉사 회원이 아니면서 희망나무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강수가 뇌리를 스쳤다.
‘이강수?’
이강수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복지법인 설립은 아직도 요원했을 터.
이강수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자기가 알 도리는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기부자와 연관된 사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당장 궁금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진수에게 받은 서류를 살펴보고 현재 주가를 확인한 양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진수의 주식 기부는 21억 원이 맞았다.
‘21억 원이나 되는 큰돈을 그냥 받기가 미안한데? 스스로 밝히지 말라고 부탁했으니 어쩔 수 없군.’
박진수는 자기의 기부 행위를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박진수의 당부가 없었으면 고마운 마음에서라도 제자가 몸담고 있는 몇몇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제공했을 것이다.
양진태는 주식 양도 서류를 챙겨 들고 책상에 앉았다. 그는 양도받은 주식을 처분해 법인의 기본재산으로 편입할 계획이었다.
*
휘이이잉-
시베리아에서 기원한 영하의 차가운 기운이 겨울바람을 만들어 한반도를 야수처럼 할퀴었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치는 맹렬한 기세의 추위가 연말연시의 길거리를 덮쳤지만 새해를 앞둔 흥분과 설렘으로 들뜬 사람의 활력을 꺾지 못했다.
어느새 2021년, 신축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저물어 갔다.
강수에게 2021년은 거대한 성공을 이룬 뜻깊은 해였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인생에 있어 최고의 해였다. 무엇보다 세 번째 개인전의 성공은 기존 두 번의 개인전과는 양상이 달라졌다는 데 의미 있었다. 기존 두 번의 개인전이 미술에 관심 있는 네티즌과 미술 애호가, 컬렉터의 관심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존재를 알렸다면 세 번째 개인전은 일반인까지 갤러리로 끌어들이며 미술의 대중적 관심을 확산시켰다.
특히 화이옥션 홍콩경매로 촉발된 상식을 초월한 그림값 상승은 미술계조차 의아해했고, 많은 미술 관계자를 혼란케 했다. 결국 세 번째 개인전 출품 작품이 완판되고, 117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나서야 미술계 관계자들이 이강수 그림의 작품성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2월 30일 목요일.
대학로 예벤호프 2층.
수십 개의 좌석이 놓여있는 넓은 실내지만 가는 연말을 아쉬워하며 모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실내의 한쪽, 창가의 탁자에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녀 7명이 치킨과 안주 몇 개를 시켜놓고 늦은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수와 주하, 그리고 강수의 친구인 김종대, 이동석, 장범일이고 두 여성은 송지연, 임해영이었다.
“자, 주목합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건배를 안 할 수 없죠?”
자주색 털스웨터를 입은 김종대가 의자에서 일어나 만면에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쓸어보고 생맥주잔을 들었다. 김종대를 따라 남자들은 생맥주잔을, 여자들은 맥주가 든 유리컵을 들었다.
“올해는 작년과 달리 구성원이 늘어서 기분이 무척 좋다. 우선 올해도 작년처럼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간 것을 감사하고, 솔로였던 동석이가 아름다운 해영 씨 만난 것을 축하하고, 강수가 국내 미술계를 네 번의 전시회로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내년엔 범일이도 제수씨 만나기를 기원하고, 마지막으로 강수를 뺀 우리 세 명의 거대한 도약을 위하여 건배하자.”
김종대가 송년회 인사말을 끝내고 마지막 건배를 하려는 찰라, 이동석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종대야, 강수는 왜 빼냐? 강수도 같이 도약해야지.”
“얌마, 강수가 더 도약할 데가 어딨냐? 강수야, 넌 우리가 조금 쫓아갈 때까지 기다려 줘라. 너 혼자 저 꼭대기로 가버리면 우리가 너무 처량하다.”
강수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주하가 생긋 웃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후후. 내년엔 뉴욕에 진출할 계획인데 나야 뉴욕에서 무명이나 다름없지 않냐? 아마 내년엔 뒤로 퇴보할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쫓아와라. 그럼 중간에서 만나지 않겠냐?”
이동석이 피식 실소했다.
“에이, 농담이라도 그건 아니지. 너는 이미 우리 클래스를 훌쩍 넘어섰거든. 강수는 세계를 향해서 훨훨 날개짓 해라. 우리도 노력해서 작품 할 테니까.”
장범일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이동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동석아, 저번 단체전 그림 정말 좋더라. 내년에 첫 초대전도 열고, 너도 드디어 빛을 보나 보다.”
장범일의 말에 김종대가 동감을 표시했다.
“요즘 동석이 작업하는 거 보면 장난 아냐. 이 자식, 완전 포텐 터졌어. 내년 초대전은 기대해도 될걸.”
강수도 한마디 했다.
“동석이가 자기 색깔을 찾은 것 같아. 동석아, 저번 작품 할 때 감각을 살려서 구상표현주의 쪽으로 쭉 나가면 너만의 작품 세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하하. 그러냐? 이거 참. 기분은 좋은데 면전에서 칭찬받으니까 좀 그렇다?”
이동석이 쑥스러운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년 봄에 열리는 크리스티 홍콩경매가 강수 뉴욕 진출의 성패를 좌우할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떤 거 같냐?”
“뉴욕 진출의 전초전이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중요하지. 내년 봄 홍콩에서 강수 그림이 얼마에 낙찰될지 너무 궁금하다.”
장범일의 말에 김종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로 걱정할 게 아닌 거 같은데? 홍콩에서는 이미 큰 성공을 거뒀으니 내년에도 그에 못지않은 결과를 내지 않겠냐?”
이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바래야지. 그래야 뉴욕 전시도 성공 가능성이 커지니까. 강수야. 뉴욕 전시에서도 그림 완판하면 뉴욕에 집 한 채 사라. 우리도 네 덕에 뉴욕 가서 세계적인 예술가들하고 교류 좀 하게.”
이동석의 넉살에 강수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설마 뉴욕에서도 내 그림이 전부 팔릴까? 만약 완판하면 동석이 말대로 집 한 채 사서 아지트 만들어 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와서 마음껏 작업해라.”
“이야, 역시 강수가 화끈하다니까. 친구 잘 둬서 뉴욕에서 맘껏 작업할 수 있게 생겼구나.”
잔 든 채 건배는 하지 않고 수다 떨고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지친 듯한 얼굴의 임해영이 끼어들었다.
“저기요, 잔 들고 있다 팔 떨어지겠어요. 건배부터 하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앗, 미안합니다. 얘기하다보니. 이제 건배하자. 거두절미하고 모두에게 희망찬 새해를 위하여!”
“위하여!”
창!
김종대가 선창했고, 일행이 마음속으로 희망찬 새해를 기원하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이날 저녁, 강수와 일행들은 저물어가는 신축년의 12월 30일을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