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48화 (148/197)

# 14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8회

양진태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 보며 강수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시작은 십억에 불과하지만, 사회복지 지원법인 설립은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제가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교수님이 설립한 복지법인을 후원할 것입니다. 아마도 교수님이 생각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로 성장할 겁니다. 일단 지원법인 설립부터 해야 하는데 절차가 꽤 복잡하고 주무관청의 허가받는 것도 간단하지 않더군요. 교수님, 사회복지법인 설립하는데 애로사항은 없을까요?”

“허허. 내가 생각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로 성장한다고? 자네 의중을 파악하기 쉽지 않구나.”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양진태가 이어 말했다.

“자네가 지원법인이나 기본재산, 이 년간 사업운영비 같은 개념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사회복지법인 설립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아본 모양이군. 그런가?”

“예.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을 뿐이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쉽지. 기본재산 십억이 출연되면 사회복지법인 설립은 절차에 따라 진행하면 될 일이야. 정관, 임원 구성, 설립 당해 연도 및 다음 연도 사업계획서, 예산서 등 구비서류를 제출하면 주무관청의 처리기한은 17일이네. 즉, 서류만 요건에 맞게 준비하면 17일 내 허가가 날 것이야. 허가가 나면 기본재산에서 나오는 수익과 이억 원 사업운영비 내에서 할 수 있는 지원 사업을 하면 될 걸세. 내가 희망나무라는 자원봉사단체를 십 년간 운영하고 있다네. 법인 운영이나 실무는 문제없다고 봐도 무방해.”

‘십 년이나 자원봉사단체를 운영해 왔다니! 역시 양진태 교수님 찾아오길 잘했어.’

흡족한 속마음을 드러내듯 강수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본재산 십억과 사업운영비 이억은 교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만 하시면 바로 출연하겠습니다. 사회복지법인 명칭도 희망나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법인 설립에 착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망설임조차 없이 십이억을 출연하겠다며 복지법인 설립을 결정해버린 이강수를 바라보던 양진태가 황당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날 찾아와서 농담할 리는 없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자네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군.”

강수는 양진태의 반응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말했다.

“교수님, 제가 복지법인을 설립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늘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부터 심사숙고했고, 밖의 조교가 낙찰가를 언급했듯 경제적으로 여건이 됐기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강수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느낀 양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지사업에 돈을 쓰면서 빨리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사람은 보기 드문데 거참 신기하군.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내가 게으름 피울 수 있나? 바로 시작하지. 일단 내가 임원을 구성하고, 정관, 사업계획서 같은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자네가 준비할 것은 재산출연증서, 자네의 인감증명서, 재산의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 현금 출연이니 예금잔고증명이 필요하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바로 서류 준비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말을 바로 하자면 고마운 건 자네가 아니라 날세. 사실 사회복지법인 설립은 나의 꿈이기도 했어. 그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원봉사단체 희망나무이기도 해. 희망나무를 토대로 사회복지법인을 준비했지만, 목돈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네. 지금까지 자원봉사단체 회원들과 십시일반으로 육억 정도 모았다네. 이제 자네가 십억을 출연하면 기본재산은 십육억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 나야말로 자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정말 고맙네.”

양진태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닙니다. 앞으로 복지사업 하시려면 정신없이 바쁠 텐데 제가 감사하죠.”

“허허허. 복지 사업하려면 정신없이 바쁠 거라고? 그런 일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겠네.”

“그럼 저는 서류 준비하러 물러가겠습니다.”

“자네 아주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친구로군.”

웃으며 머리를 숙여 인사한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첫 단추는 끼웠으니 이제 두 번째, 세 번째 단추 끼우는 일이 남았구나.’

강수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계단으로 걸어가는 강수를 지켜보며 양진태는 기쁨과 함께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허. 무슨 계획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미대에서 걸출한 인물이 한 명 나왔구나....’

*

‘구 일이나 걸려 마나를 거의 다 채웠는데 전부 쓰고 나니 허전하군.’

강수는 모교 홍우대에서 나와 곧바로 복지법인 출연용 인감증명서와 예금잔고증명 등을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 양진태 교수에게 가져다주었다. 강수가 몇 시간 만에 일부 서류를 갖춰 가져가자 양진태 교수가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다.

양진태 교수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작업실로 온 강수는 갑자기 마나하트가 빈 것을 느끼고 책상에 앉아 허전함을 달래고 있었다.

강수가 마나를 채우는데 9일이 걸린 이유는 지난 주말에 주하와 일박 이일로 설악산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강수가 주하와 설악산 여행을 가게 된 데는 종대의 잔소리가 주효했다.

그동안 강수는 두 번째 개인전과 11월 단체전, 12월 개인전 준비 작업으로 주하에게 소홀했었다. 송지연과 동거하고 있는 종대는 애인을 배려하지 못한 강수의 꽉 막힌 행태를 눈치채고 강수에게 주하를 신경 쓰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종대의 잔소리에 지난 시간을 돌아본 강수는 주하가 자기 스케줄에 맞추기만 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 차린 강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빠르게 주말 설악산 여행을 주하와 다녀온 것이다.

비록 주하와 한방을 쓴 사람은 임해영이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강수는 설악산에서 주하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저녁 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 주하와 단둘이 고요한 밤길을 산책했다. 그리고 서늘한 밤기운을 피해 랜드로버 안에서 황홀하고 진한 스킨십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짜릿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날 저녁 차 안에서 자칫했으면 이성을 잃고 주하와 한 몸이 될 뻔한 강수는 스킨십마저 조심해야겠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오늘이 27일. 단체전 개막이 2주 앞으로 다가왔구나.’

부팅이 끝나고 모니터에 윈도 초기 화면이 떴다.

강수는 두 번째 단추를 채우기 위해 인터넷 기사를 둘러보려는 것이다.

검색창에 재벌총수 근황을 써넣고 클릭한 강수는 특별한 기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기부금이 급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를 건 없어.’

강수는 치유마법을 남발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칫 자기의 능력이 알려지고, 사람에게 주목받아서 좋은 일이 없었다. 치유마법의 사용은 희망나무가 충분한 재원을 마련할 정도면 된다.

‘가능하면 한 번으로 왕창 기부받고 끝내면 좋겠는데 그런 인물이 나올까?’

갑부들은 무엇보다 건강을 가장 중요하게 관리할 것이다.

현대 첨단의학의 혜택을 가장 완벽하게 누리는 이들이라 죽을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뉴스에 나올 일도 없다. 심지어 안젤리나 졸리는 유전자검사를 통해 유방암이 발병할 수 있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탐스럽고 아름다운 유방을 절제해버렸다.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비상식적이고 지나친 조치지만 부자는 그만큼 철저하게 병력을 관리한다고 볼 수 있다.

기사를 검색해 본 강수는 별 소득 없이 책상에서 일어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건너편 작업실로 갔다.

각자의 이젤 앞에서 고원철과 서혁중이 조용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이틀 전 ‘멸종동물을 지켜라!’ 그림동화책 1권 ‘수달’, 2권 ‘반달가슴곰’을 끝내서 강수에게 제출했다. 강수는 두 후배가 완성한 그림을 검토한 후 원본을 어제 무지개출판사에 넘겼다. 인쇄는 내일, 목요일에 들어간다고 했고, 다음 주 금요일쯤이면 서점에 깔릴 예정이었다.

나머지는 단체전이 끝난 뒤에 그리기로 했다.

원고를 넘긴 고원철과 서혁중은 강수 작업실이 정신집중 잘된다며 아예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단체전에 출품할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강수가 지나가도 고원철과 서혁중은 무심한 표정으로 물감칠에 전념했다.

강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두 후배를 일별하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말은 집중이 잘돼서라고 하지만 십중팔구는 주하가 가져오는 푸짐하고 고급스러운 저녁밥에 목적이 있을 것이다.

강수는 이젤에 세로로 긴 변형 15호짜리 새 캔버스를 걸어 놓고 염두를 굴렸다.

지금까지 완성된 그림은 106점이다.

12월 8일 세 번째 개인전 오픈까지 한 달 10일쯤 남았지만 앞으로 주하와 주말을 보내기로 내심 결정했기 때문에 30점 정도 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체전에 출품할 50점을 제외하면 세 번째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은 약 85점 내외다. 본래 계획보다 작품 수는 줄었지만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어쩔 수 없었고, 따지고 보면 85점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작품 수가 85점은 될 테니까 너무 욕심낼 건 없어. 게다가 호당 가격이 너무 올라서 낮은 가격에 팔려고 했던 원래 전시 목적마저 사라져버렸으니까 85점이면 오히려 적지도 않아. 그것보다 연말까지 뉴욕경매 출품작도 그려야 하는데 뭘 그릴까?’

뉴욕경매에 출품할 두 작품은 80호에서 100호 내외 사이즈에 맞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단체전과 세 번째 개인전을 위해 200여 장의 스케치를 그리는데 집중한 탓에 아직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없었다. 세 번째 개인전 오픈이 12월 8일이기 때문에 오픈한 후에 작품을 구상해도 시간상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때 가서 아이디어가 막히면 곤란하다.

‘미리 뉴욕경매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해 놓아야 마음이 편하겠다. ‘눈물’을 출품하니까 ‘눈물’의 주제와 성격에 어울리는 작품을 준비해야 하는데....’

눈물을 떠올리자 문득, 책장에 둔 머그잔의 풍경화가 떠올랐다.

커피나무와 커피 열매 따는 소녀가 있는 풍경화를 그릴 때 커피 농장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었다.

전 세계적으로 커피 농장은 고산지역에 있어 재배나 가공 여건이 좋지 않다. 수확기가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친 노동에 참여한다. 이 때문에 아동들의 노동력 착취가 문제였고, 국제적인 이슈가 되곤 했다. 아동 노동력 착취는 비단 커피산업만의 문제는 아니고, 초콜릿 원료가 되는 카카오나무나 바나나 같은 대단위 농장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였다.

머그잔의 풍경화에서는 그 부분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지만 뉴욕경매에 출품할 그림에는 전면적으로 부각해서 그리면 ‘눈물’이 담고 있는 의미를 더 넓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수는 다시 책상으로 가서 커피 농장 자료를 모아놓은 폴더를 열었다.

자료를 훑어본 강수는 커피 농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커피 열매 따는 소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뇌리에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아스라이 펼쳐진 고산 풍경이 머그잔의 풍경화에서는 중심적인 소재였지만, 새로운 그림에서는 고산 풍경을 제거했고, 커피나무와 소녀의 얼굴을 부각했다.

강수의 뇌리에서 커피나무와 소녀에 대한 시점과 구도가 다양하게 그려졌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 커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커피나무.

그 아래에서 커피 열매가 담긴 바구니를 어깨에 멘 소녀가 팔을 뻗어 커피 열매를 따는 장면.

커피 열매를 따는 장면이 지워지고, 무심한 시선으로 커피 열매를 바라보는 소녀.

무심한 시선으로 커피 열매를 바라보는 장면이 지워지고, 몸을 돌려 저 멀리 어딘가 한 지점을 바라보는 소녀.

뇌리에서 시점과 구도를 몇 차례 검토한 강수는 최종적으로 하나의 그림을 형상화했다.

영롱한 보석처럼 빛나는 커피 열매가 열린 나뭇가지 몇 개.

열매가 열린 나뭇가지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 커피 열매를 쥔 그녀의 조막만 한 손.

뇌리에서 형상화 작업이 끝났다.

형상화가 끝난 그림에 이제는 색깔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채색은 사실적인 나무색이나 초록의 나뭇잎 색깔 대신 비사실적인 색으로 대체되었다.

나뭇가지는 갈색이 아니라 황금색으로, 커피 열매는 검붉은 색이 아니라 영롱한 사파이어색으로, 나뭇잎은 자주색으로, 소녀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구리색으로, 소녀의 눈은 신비로운 에메랄드색으로 표현했다.

채색까지 형상화를 끝낸 그림은 강수의 뇌리에 사진처럼 찍혀 기억되었다.

강수는 스케치북을 펼치고 색연필을 들었다. 색연필을 쥔 강수의 손이 스케치북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백지 위에 보석 같은 커피 열매가 달린 황금가지가 소환되었고, 생명을 머금은 듯한 자주색 잎사귀가 피어났다. 고개를 돌린 누군가를 바라보는 하얀 피부의 남미 소녀가 환상처럼 형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소녀의 조막만 한 손은 에메랄드 같은 커피 열매를 쥐고 있었다.

‘됐어. 이 그림 제목은 커피 나무 아래 소녀.... 아니면 커피 열매 따는 소녀? 둘 중 하나로 정하고 캔버스는 80호면 되겠다. 이제 한 작품이 남았다.’

색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을 요리조리 살펴본 강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빈이네 이야기’ 카페 2층.

2층 입구에 카페 ‘빈이네 이야기’ 유니폼 상의를 입은 사장 노민석이 올라와 실내를 둘러보았다.

수십 명의 손님으로 꽉 찬 2층 실내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핑크티티 초상화 앞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이 모여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문득 노민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여름에라도 초상화를 전부 구입하는 건데.’

노민석은 핑크티티 초상화 앞에 모여 있는 손님들을 보며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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