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47화 (147/197)

# 14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7회

김용덕이 얼이 빠진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순식간에 비탈을 내려와 옆으로 다가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할아버지는요?”

“비, 비탈에서 구르셔서....”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의 상세는 한눈에도 위중해 보였다. 등산복 차림의 청년, 강수가 김용덕에게 재촉했다.

“아저씨, 빨리 119에 연락하세요. 할아버지는 제가 돌볼게요.”

“어? 그, 그래.”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 발생하자 생각이 멈춰버린 김용덕은 강수의 말대로 스마트폰을 꺼내려다 손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김용덕은 신문지로 돌돌 말은 물건을 배낭에 넣고 119로 전화했다.

강수는 김상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칫하면 숨이 끊어지겠다. 치유마법으로 응급조치라도 해봐야겠어. 마나가 거의 채워서 다행이다. 일단 심장부터.’

며칠간 마나회로 수련을 해온 강수는 마나하트에 마나를 거의 채운 상태였다. 강수는 통화하고 있는 사내를 슬그머니 등지고 앉아 마음속으로 영창한 후 작은 목소리로 치유마법을 캐스팅했다.

“치유.”

푸르스름한 기운이 손에 모이더니 김상재의 가슴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치유마법의 마나소모는 상처나 병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또한 마법사의 서클이 높을수록 상세가 깊은 상처나 중병 환자를 빠르게 치유할 수 있다. 3서클 마법사는 치유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 소모가 심해서 치유의 범위나 효과가 고위 마법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심장의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심장으로 흘러가던 마나가 중단되었다.

‘이번엔 머리.’

강수가 머리를 대상으로 치유마법을 다시 캐스팅했다.

마나하트에 채워진 마나가 머리를 향해 급속하게 빠져나갔다. 김상재의 상세가 그만큼 위중하다는 방증이었다.

욱씬!

마나가 10% 이하로 떨어지면서 심장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마나가 더 소모되면 심장에 쇼크가 생길 수 있었다.

흡!

강수는 치유마법을 중단하고 잠시 심호흡했다.

김용덕은 상대방에게 현 위치를 알려주면서 진땀 빼고 있었다. 등산로를 벗어난 산중이라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은 것이다.

창백하고 사색이 짙었던 김상재의 얼굴에 혈색이 약간 돌았다. 가늘게 내쉬던 숨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나는 심장에 20%쯤 들어갔고, 대부분 머리를 치유하는 데 소모됐다.

‘머릴 많이 다쳤구나. 그래서 마나가 순식간에 소모됐나 보다. 마나가 부족해서 완전히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다. 다행이다.’

김상재의 상세를 지켜보던 강수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예, 예. 빨리 좀 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상대방에게 설명을 겨우 끝낸 김용덕이 김상재 앞으로 와 앉았다. 그는 처량한 목소리로 김상재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험한 꼴을 보시다니 제가 죽일 놈입니다....”

김상재의 감긴 눈이 천천히 떠지며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으으, 주. 겠. 다.”

자책하던 김상재가 깜짝 놀라서 김상재의 상태를 자세하게 살폈다. 금방 숨을 거둘 것 같았던 아까와는 뭔가 달라 보였다.

김상재의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몸이 부서지는구나. 아이고, 죽겠다.”

김상덕이 몸을 꿈틀거리다 눈앞에 앉아있는 김용덕을 발견하고 물었다.

“근데 넌 용덕이 아니냐?”

“예, 아버지, 막내 용덕이입니다. 저 알아보겠어요?”

“이눔아, 자식을 못 알아보는 아비가 어딨어. 그런데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 거냐?”

김상재의 정상적인 질문에 김용덕이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저랑 같이 산에 오른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산에 오른 거라니? 기억 안 나. 아이고, 몸이야. 왜 온몸이 이렇게 아프고 쑤시지?”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곧 구급대가 올 겁니다.”

김상재가 죽는소리 하면서도 몸을 꿈틀거리며 상체를 세우려고 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이놈아, 바닥이 차가워서 그래. 나 좀 일으켜 세워.”

“예?, 네네.”

김용덕이 김상재를 부축해 나무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아이고, 살살 혀. 한데 자네는 누군가?”

김상재가 앞에 서 있는 강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근처에 지나가던 등산객입니다. 비명을 듣고 와봤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인석아, 온몸 뼈마디가 쑤시고 욱신거리는데 뭐가 무사해. 아무튼 고맙구나.”

아프다고 앓는 소리 하지만 생각보다 팔팔해 보이는 모습을 확인한 강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고 판단하고 김용덕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는 하산해서 구급대 만나면 여기 위치 알려주겠습니다.”

“아, 그럼 정말 고맙겠네.”

강수가 김상재에게 꾸벅 인사했다.

“할아버지, 몸조리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오냐. 고맙구나. 조심히 내려가거라.”

“네, 할아버지.”

강수는 구급대를 만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며 죽어가는 노인을 살려낸 치유마법의 초현실적인 효과를 절감했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의 치유마법을 활용하지 못하고 썩히고 있는 것이 아까웠다.

‘치유마법을 이렇게 썩히고 있을 때가 아니야. 통장에 십억 넘게 있으니까 양진태 교수님을 만나 복지법인 설립에 관해 얘기해봐야겠어.’

통장에 있는 돈을 복지법인 설립하는데 다 써도 조만간 와이옥션에서 낙찰금이 들어온다. 얼마가 들어올지 몰라도 세 작품 낙찰가가 9억이 넘기 때문에 몇억은 될 것이다. 그 돈이면 충분하다.

‘기왕이면 빨리 복지법인을 설립하고 기부받아서 소외 계층에게 도움을 주면 좋겠지.’

당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뇌리에 정리하며 약 20분쯤 산에서 내려간 강수는 아래서 올라오는 다섯 명의 구급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년 사내가 들것을 든 젊은 대원 넷을 인솔해 올라오고 있었다.

강수가 인솔자로 보이는 중년 사내 앞을 막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구하러 가는 거죠?”

“예. 맞습니다. 그분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곳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중년 사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분들을 못 찾으면 경찰에 수색 협조 요청하려 했는데 천만다행입니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다친 것 같습니까? 정신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제가 내려올 때는 정신이 돌아와서 말도 곧잘 하고, 나무에 기대고 앉아 계셨어요.”

“아, 위급한 상태는 아닌가 보네. 할아버지가 어디쯤 있습니까?”

뒤돌아 두 부자가 있는 장소를 가리켜 주려던 강수가 온통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이정표 없는 산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있는 위치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구나. 별수 없네. 다시 올라가야겠다.’

강수가 뒤돌아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예. 고맙습니다.”

강수가 빠르게 등산로를 올라갔다.

10분쯤 올라갔을 때 뒤에서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힐끔 살펴본 강수와 중년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빨리 산을 탔구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강수가 올라가는 속도를 늦추었다.

중년 사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강수에게 말을 걸었다.

“산을 자주 타나 봅니다.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지 쫓아가기가 힘드네.”

“네. 운동 삼아 산을 타거든요.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10분쯤 등산로를 올라간 강수가 등산로를 벗어나 옆으로 빠져서 등산로가 아닌 산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산길마저 수풀이 자란 비탈길로 이어졌다.

강수의 뒤를 따라가던 중년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길로 갔지? 길을 잃었나?’

두 부자가 등산로에서 벗어난 산비탈을 오른 것에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길을 잃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년 사내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산비탈을 올라가던 강수가 걸음을 멈추고 앞을 가리켰다.

“저기 계시네요.”

강수가 가리키는 곳에서 팔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예, 저기 있군요. 고맙습니다.”

네 명의 구급대원이 황급하게 현장으로 달려갔고, 뒤따르던 중년 사내가 문득 뒤돌아 강수를 불렀다.

“젊은이, 잠깐만.”

“네?”

“혹시 문의할 것이 있을 수도 있는데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러죠. 제 전화번호는 공일공 칠칠육사 xx일이입니다.”

전화번호를 중년 사내에게 알려준 강수는 다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도착한 강수는 샤워하고 정장을 입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생각난 김에 양진태 교수를 만나 복지법인 설립에 대해 의중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집을 나선 강수는 차를 몰고 모교 홍우대로 향했다.

*

홍우대학교 인문대 교수동.

건물 입구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잘 가꾼 50대 중반의 사내가 걸어왔다. 175cm 남짓의 신장에 적당한 체격의 사내는 유행이 지난 낡아 보이는 회색 콤비 정장에 갈색 구두를 신었고, 오른손에 가방을 들었다. 행색은 평범했으나 사내는 온화하게 웃는 얼굴상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엘리베이터를 지나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3층에 올라간 사내는 복도를 걸어 312호 앞에 섰다. 312호 명판에는 양진태 교수라고 적혀 있었다. 수염을 잘 가꾼 사내는 312호의 주인 양진태였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수수한 얼굴의 여자 조교가 책상에서 일어나 양진태를 맞으며 말했다.

3학년 전공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온 양진태는 실내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블루 톤 정장 차림의 청년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듯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1학년 때 교수님 강의 수강했던 12학번 회화과 전공한 이강수입니다.”

“12학번 이강수? 허허. 구 년 전에 내 강의를 들었군. 반갑네. 회화과를 졸업했으면 지금은 작품활동 하고 있는가?”

양진태의 질문에 조교가 그게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교수님! 한 칠팔일 전에 와이옥션 홍콩경매에서 이강수 씨의 ‘졸업반 아이들’이란 작품이 칠억에 낙찰됐다고 인터넷에서 떠들썩했잖아요. 그 기사 못 보셨어요?”

“오, 그림 한 점이 칠억에 낙찰됐다고? 으하하.”

양진태가 느닷없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옆의 조교에게 가방을 건네고 강수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힘차게 흔들었다.

“잘 왔네. 자네처럼 듬직한 제자를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 우리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먼. 한데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복지법인과 관련해서 여쭙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복지법인? 으하하. 이거 참 간만에 마음에 드는 제자가 방문했구먼. 그건 내 전공이 아니지만 조금 알고 있긴 하지. 어서 들어가서 얘기하세.”

양진태의 손에 끌려 교수실로 들어간 강수는 만면에 웃음을 흘리는 양진태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녹차를 가져온 조교가 선망의 눈빛으로 강수를 힐끔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들게.”

“네.”

따뜻한 녹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강수가 운을 뗐다.

“제가 교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열 명이 넘은 고아를 입양해 친자식처럼 키우는 교수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날 존경해서 찾아와? 음, 말 되는군. 복지법인에 관해 묻는 다고 했지? 묻고 싶은 얘기가 뭔가?”

양진태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강수가 용건을 밝혔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복지도 굉장히 좋아졌지만, 아직도 사회의 그늘진 음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죠. 한데 우리나라 복지는 그들, 소외 계층까지 전부 보살필 정도는 안 되고요. 소외 계층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서 힘닿는 데까지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사회복지법인 설립에 있어 교수님께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강수의 얘기를 듣는 양진태의 얼굴색이 환하게 빛났다.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소외 계층을 돕겠다는 자네야말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자랑스러운 제자가 아닌가? 그런 이야기라면 내가 발 벗고 도와줘야지.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는가?”

열의와 기대에 가득한 양진태의 눈빛 마주하며 강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강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복지법인의 기본재산으로 현금 십억 원을 출연하고, 이년 간 사업운영비로 현금 이억 원을 후원하겠습니다. 교수님이 사회복지 지원법인을 설립해서 이사장을 맡아주십시오.”

번쩍이는 눈으로 강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양진태가 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

한바탕 호쾌하게 웃어 재낀 양진태가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현금 십이억이면 사회복지 지원법인을 설립하는데 약소할 뿐이지 일반적으로는 큰돈일세. 내가 이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았지만, 지원법인을 설립하라는 제자는 자네가 처음이야. 뜻밖에도 귀하고 통큰 제자가 방문했구나.”

말을 끊은 양진태가 탁자 위에 놓인 녹차 잔을 들어 맛을 음미하며 강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강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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