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5회
“이 군 혹시 로비에 있는 조각 봤는가?”
박삼호에게서 눈길을 뗀 강수가 대답했다.
“주차장에서 곧장 올라와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못 봤군. 조각은 내려가서 보면 되고, 내가 이 군을 보자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림 때문이야. 로비에 있는 조각이 밋밋해서 로비에 그림을 하나 걸어 놓고 싶단 말이지. 그걸 자네가 그리면 어떻겠는가?”
뜻밖의 제안에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로비에 걸 그림이면 굉장히 커야 되겠네요?”
“그렇지.”
“500호 정도 돼요?”
김용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림 걸어야 할 벽이 가로 5미터, 높이 5미터 정도인데 알아본 바에 의하면 800호면 적당할 거라고 하더라.”
“우와, 800호면 어마어마하겠다. 아빠, 강수오빠 그림값이 호당 삼십만 원 하거든요. 800호면 최소 이억 사천만 원은 주셔야 해요. 아셨죠?”
“엉? 신인작가 그림이 이억 사천이나 해? 인석이 애비한테 바가지 씌우네.”
김주하가 펄쩍 뛰었다.
“아빠, 바가지라뇨! 저번 전시회에서 강수오빠 그림 호당 이십칠만 원 했어요. 그래도 오프닝 당일 완판됐다고요. 호당 삼십만 원이면 비싼 거 아녜요. 더구나 그림도 800호가 넘잖아요. 그 정도는 주셔야죠.”
“하하. 네가 이 군 매니저 됐구나. 한데 아비한테 그 돈 다 받으려고? 좀 싸게 안 되겠냐?”
“아휴, 아빠도. 이억 사천이면 싼 거예요. 강수오빠 요즘 얼마나 잘나가는지 아세요? 작년엔 핑크티티 초상화가 대중적으로 이슈를 끌어서 TV에도 나왔고, 상하이에서 연 아트페어에서도 출품작 전부 완판됐거든요. 그림값 오르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래. 안다, 알어. 그래서 이 군한테 그림 맡기는 거야.”
몇 달 전부터 김용극은 로비 빈 벽에 그림 한 점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여러모로 알아보았다. 이름 있는 작가는 최소 억대였다. 신인화가나 무명화가는 몇천이면 됐지만, 작품의 가치나 작품성을 믿을 수 없었다.
로비 벽에 그림을 걸어 놓으면 빌딩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예술 작품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주하의 남자친구 이강수가 화가라는 말을 듣고 별 기대하지 않고 이강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강수는 신인화가지만 여타 신인화가와는 다르게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았다. 특히 핑크티티 초상화가 전시된 카페 ‘빈이네 이야기’를 많은 블로거가 소개했다.
핑크티티 초상화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김용극은 직접 카페에 찾아가 초상화를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핑크티티 초상화와 머그잔 도안으로 그렸다는 고산 풍경을 본 김용극은 이강수 그림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끌림을 느꼈다. 이강수의 그림에 매료된 김용극은 고민을 접고 이강수에게 그림을 맡겨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주하가 신난 듯 또 입을 열어 나불거렸다.
“그렇다니까요. 지금은 개인전 한 번만 연 신인화가라서 그렇지 1, 2년 지나면 강수오빠 800호 그림, 이억 사천이면 거저나 다름없어요.”
딸이 입에서 침 튀기는지도 모르고 이강수를 치켜세우는 모습에 김용극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억 사천이 거저라고? 좋아, 까짓거 이억 사천에 하자. 아, 그리고 보니 이 군 의사를 묻지 않았네. 어떤가? 800호짜리 그림 그릴 시간은 있는가?”
주하 아버지가 부탁하는 의뢰인데 시간 없어도 그려야 한다. 더구나 시간도 충분했다.
“예. 시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 제가 전속으로 있는 선암갤러리를 통한 의뢰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값은 절반인 일억 이천만 원이면 됩니다.”
“일억 이천? 오호, 갤러리 몫을 받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본래 선암갤러리를 통하지 않으면 의뢰받지 않지만, 아버님이 직접 부탁하시니 그려드려야죠.”
“하하. 주하 덕분에 일억 이천만 원이나 아낀 셈이군.”
“호호. 그럼요. 아빠, 여기서 얘기할 게 아니라 로비로 내려가서 어디에 그림을 걸고 싶은지 보면서 얘기하세요.”
“그럴까? 로비로 내려가세.”
박삼호 전무는 입가에 미소만 지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빌딩주이자 회사 오너가 나서서 하는 일에 자신이 개입해 봐야 득 될 일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선 네 사람은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김용극을 발견한 안내데스크의 보안 요원이 경직된 얼굴빛으로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손을 들어 답례한 김용극은 강수와 로비를 한 바퀴 돌았다.
로비 중앙 엘리베이터 홀 왼편으로 안내데스크가 있고, 오른편에 카페 블랙벅스가 자리했다. ‘가족 나들이’라는 제목의 대리석 조각은 빌딩 출입구인 방풍문 왼편에 있었는데 관심을 두고 보지 않으면 시선이 가지 않는 구석에 설치되어 있었다.
김용극은 엘리베이터 홀 오른편 벽, 카페 블랙벅스와 닿아 있는 대리석벽 앞으로 걸어갔다.
“저쪽은 안내데스크가 있어서 괜찮은데 이 벽이 비어 있어서 말이야. 여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걸고 싶다네.”
빈 벽은 김용극이 알아본 대로 800호 내외 그림을 걸면 적당할 것 같았다.
“아버님은 어떤 그림을 원하시는지요?”
“어떤 그림? 사실 자네가 그렸다는 핑크티티 초상화와 그림 몇 개를 찾아봤다네. 자네 그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더군. 그래서 말인데 내 빌딩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 마음에 평화와 행복을 줄 수 있는 편안한 그림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던 그림이 좋겠는가?”
김용극의 말을 들으며 강수는 문득 ‘향유고래의 꿈’이 떠올랐다. 200호나 300호 캔버스에 두 작품을 그릴 생각이었지만, 대리석벽에 맞게 800호 크기 내외로 그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버님, 제가 향유고래의 꿈이라는 작품을 구상해 놓았는데 그 그림이 어떨까요?”
“향유고래의 꿈?”
강수가 대리석벽에 대충 형상을 그리며 설명했다.
“네. 이 대리석벽을 캔버스라고 본다면 바닷속에서 향유고래 백여 마리가 이쪽을 향해서 헤엄치는 그림입니다.”
강수가 벽에 그린 형상을 상상해보았는지 김용극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닷속 백여 마리의 향유고래 떼... 향유고래의 꿈이라. 그거 괜찮군. 박 전무는 어떤 것 같은가?”
김용극이 툭 던진 질문에 박 전무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바닷속 향유고래 그림이면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평화롭고 편안한 느낌을 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데 향유고래는 인간의 무분별한 포경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 향유고래 백여 마리가 군집해서 헤엄치는 광경은 향유고래를 부활시키자는 뜻도 있고, 향유고래를 지키자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어서 뜻깊은 그림 같습니다.”
“하하. 역시 박 전무야. 해석이 멋들어지군. 이 군. 향유고래의 꿈으로 하세. 그림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작품 구상은 끝내 놨기 때문에 조수 둘하고 같이 그리면 열흘이나 보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작업실에서는 800호 작업할 공간이 안 됩니다. 우선 작업할 공간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작업실이 좁단 말이지? 박 전무, 우리 빌딩에 작업할 공간은 없나?”
“공간은 있지만 그림이 너무 커서 이동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군.”
“사장님, 이 작가가 다른 곳에서 작업해도 그 커다란 작품을 가져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아예 이 자리에서 그리는 건 어떨까요?”
“뭐? 여기서?”
김용극이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이 군, 어디 작업실 구해서 그릴 것 없이 바로 여기서 그리는 건 어떤가?”
“저야 여기서 작업하면 좋지만, 우마나 물감, 물통 등 작업 도구를 벌여놔야 하고 특히 기름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불쾌할 겁니다.”
“뭐, 그 정도 불편이야 감수해야겠지?”
“사장님, 업무시간을 피해서 오후 7시 이후부터 작업하면 입주사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 그래. 역시 박 전무는 아이디어맨이야. 오후 7시 이후에 작업하면 민원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자네는 밤에 작업해도 되는가?”
조명만 충분히 밝혀 놓으면 밤에 작업해도 어려움은 없었다.
“예. 조명만 밝히면 괜찮습니다.”
이때, 근무복을 입은 50대 중반,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김용극 옆으로 다가왔다. 50대 중반의 사내는 빌딩 관리소장이고, 40대 후반의 사내는 기전과장이었다.
두 사내는 김용옥에게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오, 주 소장, 할 얘기가 있었는데 마침 잘 왔네.”
“예, 말씀하십시오.”
김용극은 강수를 소개하고, 강수가 오후 7시부터 회화 작업하게 된 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주 소장은 이강수 작가가 그림 그리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지원을 해주게.”
“예, 사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작업하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 저, 사장님. 그림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할 예정인지요?”
김용극이 강수를 바라보자 강수가 대답했다.
“내일 그림 재료 준비해서 모레부터 하겠습니다.”
“모레, 수요일 밤부터 한다는군. 부탁 좀 하네, 주 소장.”
“옛, 알겠습니다.”
주 소장이 빠릿빠릿하게 말했다.
“아빠, 얘기 끝났으면 식사하러 가요.”
“점심때가 됐지? 박 전무, 점심 약속 없으면 우리랑 같이 가지.”
“약속 없습니다.”
“잘됐군. 같이 가세. 식당은 어디가 좋을까?”
주하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빠, 근처에 ‘농가’라는 한정식집 있어요. 거기로 가요.”
“응? 네가 ‘농가’를 어떻게 아냐? 언제 가봤냐?”
“가보긴요. 인터넷 검색해봤죠.”
김용극이 껄껄 웃었다.
“허허, 세상 참 희한해 졌어. 난 인터넷이 어떨 때는 요술 램프 같기도 하고, 어떤 땐 장막 뒤에 있는 무슨 괴물 같기도 하단 말이야.”
“아빠 말이 맞아요. 인터넷은 모두에게 꼭 필요한 정보의 바다지만, 그 유용성 못지않게 해악도 많으니까요.”
주하가 김용극의 팔을 잡았다.
“헤헤.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예요. 빨리 밥 먹으러 가요.”
“그래. 인터넷이 알려준 ‘농가’로 가보자.”
네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강수는 박삼호 전무를 힐끔 쳐다보았다.
박삼호 전무의 좋지 않았던 첫인상이 적지 않게 희석되었다. 사람은 첫인상이나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껍질 안에 있는 본연의 성품은 첫인상이나 외모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야. 앞으로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아야지.’
강수는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반성하며 빌딩 밖으로 나왔다.
*
다음날 정오 무렵.
마나회로 수련을 끝낸 강수는 점심을 사 먹고 향유고래의 꿈을 그리는데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죽산화방으로 차를 몰았다.
요즘은 마나회로 수련을 일주일에 두 번밖에 안 한다. 마법을 써서 마나가 고갈된다든지 하면 마나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매일 수련해야겠지만, 마법을 사용할 일 없으니 마나는 항상 완충 상태였다.
죽산화방에 도착한 강수는 캔버스를 주문하고, 대용량 물감과 붓, 오일 등 화구를 사서 작업실로 갔다.
강수가 작업실로 들어가자 고원철과 서혁중이 작업을 멈추고 강수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셨습니까? 오늘 많이 늦었습니다?”
“어. 물감 좀 사느라고.”
“물감이요? 물감은 꽤 있는데요?”
물감은 작업에 지장 없이 넉넉하게 주문해 비치해 놓는다. 물감은 아직 살 때가 아니었다.
“다른 작업에 쓸 물감이야.”
“다른 작업이요? 무슨 작품 의뢰 맡았나요?”
“그래.”
강수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리와 좀 앉아라. 얘기 좀 하자.”
고원철과 서혁중이 소파에 앉자 강수는 ‘향유고래의 꿈’을 작업하게 된 상황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서혁중이 입을 쩍,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우와, 빌딩 로비에 800호짜리 그림을 그린단 말입니까? 굉장한데요. 설마 선배님 혼자 작업할 건 아니죠?”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이 도와주면 고맙겠다. 혹시 단체전 작품 때문에 바쁘면 각자 할일 해도 돼.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혼자서 못 하는 건 아니니까.”
고원철이 재빨리 말했다.
“시간 됩니다. 전 선배님과 꼭 같이 작업하고 싶습니다.”
“그런 대작에 참여할 기회를 차버리면 바보천치죠.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같이 해보자. 작업 시간은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고 작업 기간은 열흘 정도 잡고 있다. 토요일도 작업할 거야. 그리고 자정에 끝나니까 집에 갈 택시비는 주마. 이 정도면 괜찮냐?”
고원철과 서혁중이 다투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당근이죠.”
“그럼 내일부터 작업하기로 하고. 보수는.... 얼마면 되겠냐?”
고원철이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선배님과 작업하면서 배우는 게 많습니다. 얼마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선배님이 주는 대로 받겠습니다.”
고원철의 대답에 서혁중이 능글맞게 덧붙여 말했다.
“오너가 선배님인데 당연히 원철이 말처럼 선배님이 주는 대로 받아야죠. 다만 저희야 많이 주면 감사하죠.”
“많이 주면 좋겠다? 하하. 정답이네. 좋아. 그림값의 15%인 천팔백만 원씩 주마. 그 정도면 많이 주는 거냐?”
“처, 천팔백이요! 감사합니다, 형님! 돼지꿈도 안 꿨는데 돈벼락을 맞기도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놀란 서혁중이 조폭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숙이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열흘 단기 알바에 천팔백이라니! 역대급 보수가 아닌가.
놀라기는 고원철도 마찬가지였다.
“강수 선배님, 고맙습니다.”
고원철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순간 무엇을 그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활고도 발목을 잡았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그림과는 연관 없는 알바 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하다는 말이 절로 가슴에 와닿았다. 다 때려치우고 직장 잡고 생활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작품 할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던 차에 이강수의 연락을 받았다.
운이 좋았는지 선배 이강수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일이 술술 풀렸다. 알바 전전하며 생활비 벌어야 하는 부담이 사라졌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이제 열흘만 선배의 작업을 도우면 천팔백만 원이 생긴다. 이 돈이면 개인전을 열고도 돈이 남을 것이다.
“고마우면 열일 해야 한다. 그럼 내일부터 저녁 6시에 퍼스트타워로 출발한다.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빌딩 근처 식당에서 저녁 먹고 자정까지 작업하는 걸로 하자. 참, 토요일엔 일찍 작업할 수도 있어. 빌딩 관리소장과 얘기해서 시간 정할 테니까 토요일에는 시간 맞춰 빌딩으로 직접 와라.”
둘이 동시에 합창했다.
“옛! 알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