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6화 (126/197)

# 12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6회

“소정 씨, 바빠?”

자료를 정리하던 나소정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늘씬한 신장에 몸매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오피스룩을 입은 미모의 직장 선배 박하빈이었다.

“네. 새 제품 홍보 관련 온라인 콘텐츠 기획하고 있는데요? 무슨 일이죠?”

“미안한데 회사 페북, 블로그에 오늘까지 이 자료 좀 올려주면 안 될까? 거래처에 급하게 가봐야 하는데 내가 자료 올릴 시간이 없어서 그래. 나중에 맛있는 저녁 살게.”

박하빈이 서류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소정의 손을 잡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소정이 눈을 끔뻑거리며 박하빈을 올려다보았다.

“오늘까지요?”

“응. 오늘까지 부탁해. 프리젠테이션 작업하느라 자료 올리는 걸 깜박했지 뭐야.”

나소정이 시간을 보았다.

‘네 시 반. 정말 날 뭐로 보는 거야....’

박하빈이 부탁한 일을 하려면 서너 시간은 잡아먹는다. 저녁도 못 먹고 야근해야 한다. 나소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거절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소영 씨이~ 한 번만, 딱 한 번만 부탁해. 응, 제발 나 좀 살려 줘.”

예쁜 얼굴로 울상 지으며 부탁하는 박하빈의 공세에 결국 나소정이 인상 쓰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요.”

“어머, 고마워. 소정 씨만 믿어. 오늘 수고 좀 해 줘.”

사무실을 나가는 선배 박하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소정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휴- 너도 저렇게 볼륨 있는 몸매에 여성스럽게 생겼으면....’

나소정의 신장은 165센티로 적당했다. 다만 얼굴은 평범해서 화장으로 꾸며야 면피할 정도고, 몸매는 흔히 얘기하는 일자형이었다. 박하빈이 사내 톱을 다투는 미모인데 반해 자기는 내세울 데라곤 없어서 존재감이 미미했다.

나소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고 하던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나소정이 컴퓨터를 끈 시각은 저녁 8시 반.

박하빈이 부탁한 업무를 끝내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으로 걸어가던 나소정은 로비에서 불이 밝혀져 있는 작업등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홀 옆에 조명이 밝혀져 있었고, 세 사람이 무슨 작업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을 벌여 놓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소정은 안내데스크 보안요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예요?”

“그림 그린다고 합니다.”

“아, 벽화인가요?”

“벽화는 아닌데 작업하는 걸 보니까 캔버스가 무지하게 크더군요.”

“네,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나소정은 보안요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초상권에 걸리지 않게 줌인해서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캔버스를 찍었다.

나소정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취미 삼아 SNS에 올리는 네티즌이다. 얼굴, 몸매에 자신이 없는 나소정은 자기 모습이 나올 땐 멀리서 찍힌 사진만 올렸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 동안 꾸준하게 글과 사진을 게재해도 팔로워가 1,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나소정은 즉시 SNS에 짤막한 글과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렸다.

-근무하는 빌딩 로비 벽에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대형 캔버스가 걸려있네요. 젊은 화가 세 명이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 그릴 준비하고 있어요. 화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하네요. 내일 아침엔 그림이 조금 진척되어 있겠죠?

잠시 후 나소정이 올린 글에 네티즌의 반응이 달렸다.

-pop_sienna 소정아, 퇴근이 늦다? 업무가 많았나 봐? 그러다 몸 축난다. 몸 챙겨.

-jangyeongju90 사람 키 두 배면 엄청 대작인 듯.

-sillok 지금 퇴근이면 저녁 아직 못 먹었겠다. 배고프다고 과식하지 마라.

-jim__2023 젊은 화가가 누구일까요? 빌딩 로비에 전시할 그림을 그리는 화가면 무명화가는 아닐 텐데요.

-vivj.8292 날씨가 더워요. 건강 챙기세요.

-jinnalee 어떤 그림 그릴까? 내일도 올려라 ㅎㅎ

-xdys_red 아, 좋다~~

-starvape_lala ㅋ~ 빈 캔버스가 뭔가 좋다는 거야?

나소정은 다음날 아침 출근해서 엘리베이터 홀 옆 벽에 걸린 캔버스부터 확인했다. 캔버스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빈 캔버스를 찍어 짤막한 글과 함께 SNS에 올렸다.

-어제는 밑바탕 칠만 했나 봐요. 캔버스가 하예요.

다음 날 아침.

나소정은 드디어 뭔가가 그려진 캔버스를 여러 장 찍어 SNS에 올릴 수 있었다.

-어제는 스케치했어요. 보세요. 수십 마리의 향유고래예요! 동물도감을 보는 것처럼 스

케치가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그리고 다음 날.

나소정은 스케치가 완전히 끝난 백여 마리의 향유고래 떼가 그려진 캔버스를 찍어 소감과 함께 올렸다.

-향유고래 떼예요. 스마트폰으로 보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장관이네요. 원본 다운받아서 확대해 보세요. 그러면 향유고래 떼가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지 얼마나 장관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pop_sienna 우와, 향유고래가 백여 마리나! 끝내주네.

-jim__2023 화가가 누군가요? 스케치가 굉장히 좋은데요. 알려주심 고맙겠네요.

-jinnalee 우와, 그림 좋다. 내일도 부탁해 ㅎㅎ

-cosplayerjap WOW!

-hajeongmi2 잘 보고 갑니다. 제 피드에도 구경 오세요.

-Jaeun070516 자주 소통해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chefrace 우리 소통해요! 오늘 맛있는 하루 보내세여^^

-honest_sonbaek 계속 소통해요, 우리! 오늘도 찰진 하루 보내세요.

-vivj.8292 뭐 하냐 니들? 더위 먹었나?

-starvape_lala 크크~ 날이 워낙 덥다 보니 다들 제정신 아냐.

-jaebinne 병맛 댓글은 뭐징?

나소정은 글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댓글이 늘어나면서 이상한 댓글도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은 네티즌이 방문하고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을 달며 관심을 보이는 것이 즐거웠다. 방문자 피드에도 구경 가서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거대한 향유고래 떼는 조금씩 색깔과 형상을 갖춰갔다.

캔버스에 물감이 채워지고 향유고래 형상이 한 마리 한 마리 완성되기 시작했다.

나소정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변화된 캔버스를 찍어서 SNS에 올렸다.

-그림이 굉장히 세밀해서 향유고래가 꼭 살아서 헤엄치는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그림부터 감상하는 사람이 많네요. 나도 그중 한 명~*.*

-완성된 향유고래 세어봤어요. 77마리가 완성됐네요. jim__2023님이 궁금해 한 점도 알아봤어요. 이강수라는 화가예요. 검색해보니까 작년에 차트역주행의 주인공인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아주 젊은 화가예요. 어시스턴트 두 명은 이강수 화가 후배라고 합니다.

완성된 향유고래 수가 늘어나면서 댓글 수도 많아졌다.

-ildaro9808 와우! 멋있어요.

-sosohanday 굿굿.

-jim__2023 그림이 범상치 않다 했는데 역시 이강수 화가군요. 이강수 화가는 미술계에 떠오르는 신성이죠. 완성되면 꼭 보러 가야겠어요.

-suminee 공유할게요 ☺️☺♡

-jungsungdae 앞으로 자주 들릴게요~^^즐거운 하루 되셔요!

-km2004kim 잘보고 갑니다~! :)

-youngdesign 넘나 멋지네요. 그림이 완성되면 볼만하겠어요.

-sada9:)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구나. 이 향유고래 사진 핑크티티 팬카페에 올릴게욤.

나소정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제 본 그림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경과를 보건대 아마도 오늘이면 완성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로비의 그림이 완성되고, 그림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네티즌의 관심과 댓글이 줄어들어 시원섭섭할 것 같았다.

평상시 사진과 글을 올리면 보통 5개 내외의 댓글이 달리거나 없는 사진도 있다.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서 그런지 팔로워는 항상 비슷하고 댓글도 친한 친구들 위주로 달릴 뿐 늘지 않았다.

이번에 아무 생각 없이 빌딩 로비에서 그림 그리는 경과를 찍어서 올렸을 뿐인데 그림이 완성 단계에 접어든 3일 전부터 좋아요와 댓글이 폭증했다. 평상시보다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1,000여 명에 불과한 팔로워도 며칠 사이 2,000명으로 대폭 늘었다.

갑작스러운 팔로워의 증가와 댓글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건 이강수 화가의 향유고래 사진 때문일 텐데... 그림 그리는 과정을 올렸다고 이렇게 네티즌 관심을 받다니 참 대단하다. 하긴 나도 이 사람 그림이 너무 좋으니까.’

비록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지만 나소정은 어느새 이강수 화가의 팬이 되어버렸다. 이번 주말에는 카페 ‘빈이네 이야기’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물론 핑크티티 초상화를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장소를 ‘빈이네 이야기’로 잡았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강남 지하철역에 도착한 나소정은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하며 직장으로 향했다. 휴가 시즌이기도 하고, 조금 일찍 출근한 탓인지 직장인으로 분주했던 보도는 쾌적했다.

대로에서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외관의 퍼스트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빨리 가자.’

빠른 걸음으로 빌딩에 도착한 나소정은 서둘러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아-”

예상대로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나소정은 지금까지 고래에 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나 향유고래 그림을 SNS에 올리면서 며칠 전 향유고래에 관해 검색해보았다.

향유고래는 수컷 15~18m, 암컷 10~12m까지 자라는 몸집이 거대한 포유동물이다. 머리가 몸길이의 3분의 1이나 되는 거두의 향유고래는 그래서 생김새가 특이하고 묘하다.

먹이는 큰 오징어, 문어, 상어 등이다. 일부다처제로 무리를 지어 살며, 100마리 이상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기도 하나 30마리 정도의 무리가 일반적이다. 임신 기간은 14~15개월이고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약 2년간 어미의 젖을 먹는다.

수심 3,000m 이상 잠수할 수 있고, 수면으로 올라오면 20~70번 정도 호흡한 후 잠수한다. 주로 먹이인 오징어가 많은 수심 1,000m 아래 깊은 바다에 분포한다.

인간이 향유고래 머리에 있는 3~4톤의 향유를 얻기 위해 남획해서 멸종 위기에 처했으나 국제적인 보호 아래 서서히 개체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나소정은 그림을 보며 수심 1,000m 아래 바다 속을 상상했다.

그 깊은 심해를 유유히 유영하는 향유고래 떼 그림은 한없이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그림 좋은데. 장관이야.”

“누가 그린 거야? 자넨 화가가 누군지 아냐?”

“퇴근 시간 지나서 그렸나 봐. 난 화가도 못 봤어.”

“이거 보면 볼수록 보통 그림이 아닌데? 화가가 누군지 알아봐야겠는걸.”

“알아볼 거 없어. 이제 완성했으니까 명판을 붙이겠지.”

“아, 그런가.”

넋 놓고 그림을 쳐다보던 나소정은 주변에 사람이 모여 나누는 대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찰칵! 찰칵!

몇몇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나소정은 정성 들여 사진 몇 컷을 찍고 사람을 피해 엘리베이터 홀로 갔다.

나소정은 간단한 감상 글과 사진을 올리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드디어 그림이 완성됐어요. 나도 모르게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네요.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신비로워요. 근처에 있는 분들은 와서 감상해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fatsatakul 너무 멋있는데요!? 선팔하고 갈게요.

-ju_do_heon 완젼 멋지네요~ 감동~

-saraholic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느낌 죽인다. 공유할게요.

-louis2.happybirus 놀라운 작품이에요~^^

-hajeongmi2 특이한 그림. 완존 좋아요~~

-hyunim0406 예술은 이런 거군요ᆢ. 향유고래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살아 있어요. 마침 가까운 곳이라 가서 봐야겠어요.

-aklove3513 작품 예술이네용~^^

-joeseonyi1695 우앙.../^^./

-chaebinlee 어머, 몇 시간 전에 카페에 있었는데 그림을 못 봤네요. 아쉬워라. 담에 갈 땐 꼭 봐야지.

퍼스트타워 로비에 걸린 강수의 ‘향유고래의 꿈’은 SNS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어나갔다. 특히 핑크티티 팬카페 자유게시판에 ‘향유고래의 꿈’ 사진이 게시되면서 다수의 댓글이 달렸다.

그리고 다음 날.

핑크티티 팬카페 자유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은 ‘이강수 아저씨 신작 <향유고래의 꿈>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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