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4화 (124/197)

# 12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4회

가장 친한 대학 친구 배근우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는 무슨! 요즘 어떻게 지내냐?]

“맨날 그렇지. 알바하면서 틈틈이 작품 사진 찍고 있다.”

[개인전 계획은 세웠고?]

“개인전? 글쎄.... 개인전 할 돈은 간신히 마련했는데 비전이 보여야 개인전을 열지. 개인전 열어도 올 사람도 별로 없고, 돈만 날리는 개인전 해야 하는 건지 목하 고민이다.”

[인마, 그래도 개인전해야 대중과 소통하고, 갤러리스트에게 네 작품세계를 보여줘야 할 것 아니냐. 개인전은 그렇다 치고 그룹전 계획도 없냐?]

“그렇지 않아도 그룹전이라도 해볼까 알아보고 있다.”

[잘 됐다. 개인전 열기 전에 그룹전에 참가해 봐라.]

“무슨 그룹전?”

[너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이 열리는 건 아냐?]

“희망을 던져라? 그게 무슨 전시회인데?”

[활동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 예술가를 대상으로 하는 단체전 전시회야. 강하아트라는 곳에서 주최하는데 한가람미술관 일, 이, 삼 층을 다 쓸 정도로 규모가 큰 전시회더라. 참가비, 부스비 그런 거 전혀 없고, 작품만 10점 이상 출품하면 돼.]

“뭐? 한가람미술관 일, 이, 삼 층을 다 써? 무슨 단체전인데 규모가 그렇게 크냐? 근데 강하아트면 갤러리냐?”

[나도 몰라. 인터넷 검색해도 강하아트라는 갤러리는 없어. 강하아트가 뭘 하는 곳인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냐. 선정 작가 리스트를 보면 백 명이 넘는데 미술가 박보람, 김종대, 설치미술가 허인규, 사진가 김도일 등등 쟁쟁한 신인 예술가들이 많아.]

“참가자가 백 명이 넘어?”

[그래. 엄청나지? 이 주 뒤면 신청 마감이니까 늦기 전에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주최 측이 개설한 카페 찾아서 참가 신청해 봐. 신청한다고 다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너 정도 실력이면 되지 않겠냐?]

“알았다. 지금 사진 찍으러 가봐야 하니까 다음에 얘기하자.”

[그래. 수고해라.]

스튜디오로 올라간 박두준은 다행히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진 서은미와 나머지 옷을 찍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작업을 끝낸 박두준은 사진 파일을 열어 여성 옷 판매하는 소규모 쇼핑몰 업체인 ‘마얀’ 담당자와 검토한 후 재촬영 없이 일을 마쳤다.

박두준은 원본을 통째로 ‘마얀’ 담당자에게 건네주었다.

색 보정이나 편집은 쇼핑몰 담당자가 한다.

사장에게 퇴근한다며 인사하고 스튜디오에서 나온 박두준은 숙소인 고시원으로 향했다.

스튜디오에서 부천 고시원까지 1시간 넘게 걸렸다.

부천의 마리텔 고시원은 월세가 35만 원으로 비싸지는 않았지만, 개인 화장실, 에어컨, TV, 침대와 책상, 옷걸이 등 있을 건 다 있다. 단지 움직일 공간이 협소할 뿐이다. 좁은 실내에는 책상이나 벽, 냉장고 문짝 등 곳곳에 크고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풍경 사진, 도시 사진, 인물 사진 등 여기저기 붙어 있는 사진은 흑백사진도 있었고, 칼러사진도 있었다.

‘휴, 언제 이 고시원을 벗어나냐?’

지방 사립대 사진영상학과 졸업하고 수도권 도시인 부천으로 올라온 지 3년. 회사에 취직하지 않고 알바하며 개인전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작품 사진을 찍어왔다. 사진작가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은 직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몇 년이나 더 해야 할지 답답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개인전은 열어야지. 그전에 근우 말 대로 단체전에 먼저 참가해보자. 우선 샤워하고.’

박두준은 카메라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검정 면바지와 반팔 남방을 훌훌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에 흐른 땀부터 씻어냈다.

화장실에서 나온 박두준은 반팔 티와 반바지를 입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을 실행하고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를 검색했다.

카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박두준은 포털사이트 카페에 접속해 대문에 걸려있는 게시물을 살펴보았다.

회원 가입하지 않아도 게시 글을 읽을 수 있었고, 글은 단체전 참가 작가만 올릴 수 있었다. 게시판은 회화, 조각, 사진, 설치미술 등 각 예술 장르로 분류되어 있었고, 참여 작가는 프로필과 작품을 게시해 놓았다.

참가자의 면면을 살펴본 박두준은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는 의욕을 느꼈다. 단체전 참여 작가 리스트는 배근우 말대로 100명이 넘었고, 튀는 청년 예술가를 비롯해 재능 있다고 생각해 온 신인 예술가들이 대부분 참가하고 있었다.

‘이런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걸 나는 왜 모르고 있었지?’

변화도 없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진작가의 길에 회의를 품었고, 의욕마저 떨어져 한동안 작업 사진도 찍지 않고 나태하게 보냈다. 졸업하고 지금까지 알바하며 개인전에 필요한 자금은 겨우 마련했지만, 의욕이 떨어진 상태에서 불투명한 개인전을 선뜻 열 수 없었다.

강하아트가 주최하는 단체전에 참가한들 자기의 앞날이 획기적인 변화가 생길 리는 없다. 다만 단체전 전시회를 통해 작업하는 데 있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박두준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그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수많은 청년 예술가가 참여하는 전시회!

자기도 참여해서 기량을 겨루고 존재감을 뽐내고 싶었다.

‘참가하자.’

단체전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참가 여부는 불투명했다.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과해야 단체전 참가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박두준은 주제별, 소재별로 정리된 수백 점의 작품 사진이 담겨 있는 사진 폴더를 클릭했다. 그는 폴더 안에 있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포트폴리오로 쓸 작품을 골랐다. 150여 점의 사진 가운데 30점을 골라 USB로 옮겼다.

단체전 참가 신청 마감은 7월 31일이었다. 박두준은 골라놓은 30점을 인쇄해서 돈암동에 있다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몇 컷이라도 새로 찍어 갈까?’

마감까지 보름이 남았지만 새 작품을 찍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작품사진은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데가 가서 찍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어떤 사진을 찍을지 소재와 주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작품 사진이 나온다.

‘좋아. 몇 컷이라도 새로 찍어보자.’

박두준은 주말을 이용해 새로운 작품사진을 찍기로 했다. 무엇을 찍을지 아이디어를 잡기 위해 작업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

랜드로버 한 대가 강남대로에서 옆으로 뻗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랜드로버 안에는 강수와 주하가 타고 있었다. 둘은 주하의 아버지, 김용극의 사무실에 가고 있었다.

“저 빌딩이에요.”

주하가 외벽이 푸른색 유리로 마감된 25층 정도 높이의 빌딩을 가리켰다. 김용극의 회사는 강남대로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오피스 빌딩에 있었다.

“꽤 높다. 27층쯤 되는 것 같다?”

“헤헤. 세어보지도 않고 정확하게 맞추네. 역시 오빠는 보는 눈이 남다른가 봐요.”

“27층! 강남에서 27층 빌딩이면 대체 얼마나 하는 거야?”

“층수도 중요하지만 대지랑 연건평도 중요해요. 아빠 빌딩은 몇천억은 하죠?”

“이야, 김대풍 어르신도 갑부인데 아버지도 엄청난 갑부시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본래 빌딩에 융자가 좀 있었고, 상속받으면서 상속세 수백억 원도 융자 받아서 냈거든요.”

“아, 그렇구나.”

랜드로버는 퍼스트타워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임해영은 차에 남았고, 차에서 내린 강수와 주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으로 올라갔다. 27층에 도착한 주하는 복도 끝으로 갔다. 그곳에는 글로벌 YKC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저게 아빠 회사예요.”

“글로벌 YKC? 어떤 회사야?”

“부동산자산관리회사요. 주익오빠도 아빠 회사에서 일해요.”

“주익 씨가 어르신 밑에서 경영 수업받는구나.”

“헤헤. 그런 셈이죠.”

둘은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주하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어서 오세요.”

“주하 씨, 안녕하세요?”

“아가씨, 얼굴 보기 힘들어요? 자주 좀 오세요.”

실내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이 주하를 잘 아는지 주하에게 저마다 한 마디씩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주하와 함께 들어온 강수를 발견하고 의문의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은 주하는 그럴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계시죠?”

단정한 투피스 차림의 여직원이 놀란 표정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아, 예. 사장실에 계세요.”

실내를 둘러본 주하가 물었다.

“주익이 오빠는 외근 나갔나 봐요?”

“예, 허 부장님하고 나가셨어요.”

“그래요? 수고해요. 오빠, 가요.”

“어, 그래.”

주하와 강수가 다정한 모습으로 사장실에 들어가자 주하의 오빠라는 말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라서 눈을 부릅뜨며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오빠라는데? 아가씨한테 김주익 과장 말고 오빠가 또 있었나?”

“뻔히 알면서 왜 그러세요, 부장님. 주하 아가씨 애인이잖아요.”

“그렇지? 드디어 아가씨한테 애인이 생긴 거야? 박 차장이 보기엔 뭐 하는 친구 같아?”

“생긴 걸 보면 연예인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주하를 맞이했던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연예인은 아닐 거예요.”

“왜?”

“드라마나 예능 프로에서 저 남자를 본 적이 없거든요.”

“민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연예인은 아니지. 그러면 몸이 좋아 보이던데 운동선수인가?”

이번에는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축구나 야구, 농구는 아닌데요. 제가 본 적 없거든요.”

“스포츠 전문가인 최 주임이 아니라면 운동선수도 아니고. 그럼 뭐야? 그냥 직장 다니나?”

“글쎄요? 뭐 하는 친구인지 전혀 감이 안 오는데요.”

“그나저나 주하 씨가 오빠라고 부르다니! 저 친구 완전 행운아구나. 아, 너무 부럽네요.”

최 주임의 한탄 어린 말에 여직원이 코웃음 쳤다.

“흥, 부러워할 걸 부러워해요. 주하 아가씨가 보통 남자랑 사귈 것 같아요? 같이 온 남자 보세요.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딱 봐도 귀공자처럼 생긴 게 보통 남자와는 클래스가 다른 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 그런가?”

“저 정도 비주얼은 돼야 아가씨 배필감이지 평범한 남자는 아가씨 옆에 서 있을 수도 없죠.”

“에휴, 그러게 말이야. 주하 씨 눈에 들 정도면 일반인은 아니겠지.”

보통 체격에 깔끔한 인상의 최 주임이 시무룩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일하는 척했지만, 그의 마음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다.

‘아, 더러운 세상. 누군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평생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흙수저 물고 태어난 것들은 죽어라 일해도 일억 모으기 힘드니. 아, 씨발. 옛날에는 양반 새끼들이 다 해 처먹고, 지금은 금수저가 다 해 처먹으니 조또 변한 게 없어. 엿같은 세상. 확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욕만 나왔다. 어떻게 된 세상이 해가 가고 또 가도 삶은 별반 나아지는 게 없다.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장사할 수 있고, 회사를 만들어 사업할 수 있다. 경쟁해야 한다는 함정이 있지만, 돈 벌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성공? 웃기는 일이지. 최고 대학인 스카이 나와도 취직 못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성공은 아무나 하냐고. 그저 금수저 물고 태어나야 해. 김 과장 봐. 듣보잡 대학 나와도 사장 아들이라고 입사 3년 만에 과장 타이틀 달고 있잖아.’

세상을 불평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고 기분만 더러워진다. 불공평한 세상은 잊고 직장이라도 다니며 건사하는 수밖에 없다.

‘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가질 수 없다면 잊어라. 내 것이 아니면 버려라.’

최 주임은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는 불만을 어느 블러거의 글에서 읽은 세 문장을 떠올리며 속으로 삭였다.

*

주하가 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벽이 강화유리여서 책상에 앉아 있는 김용극의 뒤로 멀리까지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빠, 저희 왔어요.”

“아버님, 안녕하세요?”

사장실로 들어간 강수는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하하. 둘이서 같이 왔구나. 어서 오너라.”

의자에서 일어난 김용극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아빠, 무슨 일로 강수오빠 불렀어요?”

“인석아, 음료수 한잔하고 얘기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바빠. 뭐 마실래?”

“음, 나는 오렌지 주스요. 오빠는 뭐 마실래요?”

“나도 오렌지 주스 마실게.”

김용극이 인터폰을 들었다.

“미스 고. 오렌지 주스 두 잔 하고 냉수 한 잔 가져와. 그리고 박 전무에게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인터폰을 끊은 김용극이 소파로 와 앉았다.

“주하한테 두 번째 개인전 준비한다는 얘기는 들었네. 작업은 잘 되고 있나?”

“예. 계획대로 9월 초에 오픈하는 데 지장 없도록 순조롭게 작품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여직원 미스 고와 날렵한 인상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중년 남성이 김용극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박 전무, 이리와 앉아.”

“예, 사장님.”

강수는 박 전무를 보며 그의 미소가 왠지 가면의 미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직원이 음료수 네 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물러가자 김용극이 말했다.

“박 전무. 주하와 결혼할 친구야. 화가인데 첫 개인전 작품이 완판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친구지. 이 군, 인사하게. 우리 회사 박삼호 전무야.”

“처음 뵙습니다. 화가 이강수입니다.”

“하하. 자네가 주하의 배필감인가? 미남에다 체격도 아주 듬직해 보이는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박삼호 전무는 눈빛이 맑지 못하고 웃음도 뭔가 가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강수는 ‘이센셜아이’를 캐스팅해서 박삼호 전무의 성격을 살펴보려다 그만두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대부분 얼굴에 가면 하나 쓰고 있다고 봐도 된다. 가식적인 웃음, 또는 흔히 범죄형 인상이라고 얘기하는, 인상 안 좋은 사람을 볼 때마다 이센셜아이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속 좁은 행위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사기꾼이 있는가 하면 범죄자로 보이는 형사도 있다. 첫인상이야말로 부정확한 판단이다.

김용극이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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