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17화 (117/197)

# 11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7회

일성빌딩 5층 강수 작업실.

한남동에서 주하의 가족과 일가친척에게 적잖은 환대를 받으며 뜻깊은 시간을 보낸 강수는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실에 올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다. 바로 그림 한 점을 1억에 팔라는 김대풍 어르신의 제안이다.

‘그림 한 점에 1억이라······.’

김대풍 어르신이 그림 한 점을 1억에 팔라고 한 데는 의도하는 바가 있겠지만 굳이 1억짜리 그림을 그리겠다고 일부러 200호, 300호 크기의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김대풍 어르신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겠다는 생각도 유치했다. 또한 무조건 캔버스가 크다고 대작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대작을 그려야 하는 필연적인 토대, 소재와 창작욕, 그림에 스며든 의미가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

영화 ‘내 사랑’을 본 후에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후후, 꼭 김대풍 어르신을 이겨야 할 건 없지. 1억에 못 팔면 어때?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자.’

강수는 밤새워 스케치한 그림을 한 장씩 살펴보았다.

스케치북에 그려놓은 60여 장의 그림은 10호나 20호, 30호 캔버스에 그리면 적절한 그림이었다.

집에서 작업한 두 권의 스케치북을 책장에 보관한 강수는 새 스케치북을 꺼내 이젤에 화판과 스케치북을 걸고 작은 나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스케치해야 할 그림이 아직도 많았다. 이번에 그린 그림들은 염진구가 기획하고 있는 단체전에 출품하면 된다.

‘200점정도 출품하려면 하루에 한 작품은 그려야겠구나. 하여튼 몇 작품이 되든 단체전 개막하기 전까지 그린 그림 전부 출품해야지.’

200점의 작품을 출품한다는 목표를 세우자 아랫배에서 의욕의 불씨가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그 불꽃은 거대한 욕망이 되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강수는 살 떨리는 흥분을 느끼며 스케치북을 펼쳤다.

직사각형의 도화지.

뇌리에 떠오른 형상을 도화지 위에 어떤 구도로 배치할지 직사각형의 도화지를 지긋이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형상화되었고, 연필을 쥔 강수의 손이 움직였다. 강수는 머릿속에서 형상화된 그림을 도화지 위에 하나씩 소환하기 시작했다.

*

삑삑삑삑!

고원철은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냄새지?’

잡다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의 진원지는 실내 왼편 소파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신문지 뭉치와 검은 비닐봉지 같았다.

실내를 둘러본 고원철은 오른편 작업실 안에서 이젤 앞에 앉아 있는 강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헉! 강수 선배님?”

자신보다 먼저 작업실에 와서 작업하고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데 이강수는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이젤 앞에서 물감을, 아니 도화지에 스케치하고 있었다.

‘뭘 스케치하는 거지?’

고원철은 강수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서 스케치북을 살펴보았다.

도화지의 중앙에는 수많은 작은 물고기 떼가 왼쪽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저렇게 생긴 물고기가 있었나?’

물고기치고는 조금 이상한 생김새였다.

고원철은 어떤 물고기인지 한 걸음 앞으로 가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어, 고래잖아?’

향유고래 떼였다. 언뜻 봐도 백 마리가 넘은 향유고래 떼가 무슨 행렬처럼 좌측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고원철은 자기도 모르게 강수 뒤로 다가가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아!”

고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래 한 마리 한 마리 꽤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수많은 향유고래 떼의 행렬은 힘찬 기운을 풍겼고, 향유고래 떼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원철이구나. 언제 왔냐?”

“방금이요.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나요?”

“아냐, 스케치는 끝났어.”

“다행이네요. 선배님, 그림 좋은데요? 이건 몇 호 캔버스에 그릴 생각이세요?”

“몇 호?”

강수가 씨익 웃었다. 이 작품은 왠지 크게 그리고 싶었다. 또한 같은 그림 2점을 연결해서 전시할 계획이었다.

제목은 ‘향유고래의 꿈’

“250호나 300호쯤.”

“와, 300호로 그리면 대작이네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데요. 놀라운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선배님, 일찍 나온 겁니까?”

“응? 하하. 아니. 오랜만에 날밤 새워서 작업했더니 좀 피곤하다.”

“역시 그랬군요. 전 실내 환기하고 청소 좀 하겠습니다.”

“아, 그래.”

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두두둑!

같은 자세로 오래 있어서 그런지 뼈마디에서 소리가 났다. 전신을 이리저리 비틀며 굳은 몸을 푼 강수는 회복마법을 캐스팅했다.

회복!

쏴아아-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지친 육신에 활력이 생겼다.

3일 동안 회복마법을 쓰면서 날밤을 새웠다. 뇌리에 떠오른 수많은 이미지를 그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그렸고, 거의 180여 장을 스케치할 수 있었다. 회복마법으로 지친 몸은 회복되었지만, 정신적 피로는 여전했다. 지금 상태에서 그림을 계속 그릴 수는 없었다.

‘한 시.’

지금 집에 가서 잠을 자면 자정쯤에 깰 것이다.

‘자정에 일어나면 바이오리듬이 깨지지. 어젠 마나회로 수련도 못 했으니까 북한산 가서 마나회로 수련하고 제때 자자.’

강수는 주하에게 산에서 운동하고 집으로 간다는 톡을 보내고 음식물 봉지를 정리하는 고원철에게 말했다.

“원철아, 난 피곤해서 쉬러 가야겠다. 수고해라.”

“아, 가시게요?”

“그래. 내일 보자.”

“예, 선배님.”

스케치북을 책장에 보관한 강수는 옷장에서 슈트를 꺼내 들고 작업복을 입은 채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집에 들러 등산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차의 뒷문을 열어 슈트를 뒷자리 손잡이에 걸어놓고 운전석에 앉은 강수는 시동을 켰다.

부릉!

시동이 걸리고 경쾌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음악을 듣자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

“참, 핑크티티 사인!”

스케치에 몰입하는 바람에 방완수와 약속한 것을 잊고 있었다.

‘수련보다 일단 전화부터 해보자.’

강수는 연락처에서 자기에게 가장 친근하게 굴었던 진하 전화번호를 찾아 발신 아이콘을 눌렀다.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가보다.’

통화종료 아이콘을 누른 강수는 문자 보면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인을 받더라도 시디에 받아서 주는 게 낫겠지?’

강수는 돈암동 근처 레코드숍을 검색했다. 마침 성신여대 근처에 레코드숍이 있다고 나왔다.

차를 몰아 레코드숍으로 간 강수는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샵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중앙에는 매대가 놓여 있었고, 사방 벽면에 시디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매장에서 후덕하게 생긴 40대의 남성이 저음의 굵직한 목소리로 강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핑크티티 시디 있습니까?”

음악은 가끔 듣는 편인 강수는 음원을 다운받아 들었지 시디를 산 적은 드물었다.

“핑크티티? 요즘 웃어봐 때문인지 핑크티티 옛날 시디 찾는 분이 꽤 있군요. 어렵게 구해 놓길 잘했네요. 1집 ‘문 러버’, 2집 ‘너의 기억으로부터’ 어떤 걸 원하는지요?”

한 앨범만 사인받는 것보다 1집과 2집, 둘 다 사인받아 선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집, 2집 한 장씩이요.”

레코드숍 사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앨범 백 장씩 주문했었는데 다 팔리고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죠. 이 앨범들이 재발매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왜 히트하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노래는 괜찮습니다. 가창력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음악성이 꽤 있는 걸그룹이라 롱런할 겁니다.”

“그렇군요.”

우연히 세나 초상화를 그린 덕에 핑크티티와 인연이 닿았다. 레코드숍 사장 말대로 무명 시절이 길었던 만큼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남기를 바랐다.

주인이 시디를 종이백에 넣어 강수에게 주었다.

“사만 오천 원입니다.”

카드로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 강수는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챙길 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진하였다.

[강수오빠! 전화했었네요.]

“응, 진하구나. 요즘 바쁘지?”

[헤헤. 조금이요. 지금 방송국이에요. 촬영하다 잠깐 쉬는 시간에 오빠 문자 봤어요. 강수오빠가 전화를 다 하고. 너무 기쁜 거 있죠?]

“내가 전화했다고 기쁠 게 뭐 있어? 진하야, 실은 부탁 하나 있어 연락했어.”

[뭔데요? 말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줄게요.]

“하하. 말만 들어도 고마운데? 실은 내가 아는 남학생이 있는데 너희 사인을 갖고 싶다고 하네. 너희 다섯 멤버 사인 좀 받을 수 있을까?”

[핏, 부탁이 고작 그거예요? 그건 바로 해 줄 수 있어요. 얼마 전에 강수오빠가 그린 초상화를 넣어서 행사용으로 맞춘 라운드 티가 있는데 그 라운드 티에 멤버 사인 전부 받아서 줄 테니까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줘요.]

“응? 나한테 부탁할 게 있어?”

[“있어요.]

“뭔데?”

[저한테 저녁 사줘요. 맛있고 싱싱한 회요.]

강수가 피식 웃었다.

“훗, 고작 회? 회야 얼마든지 사주지. 근데 너만 저녁 따로 먹어도 되는 거야? 아예 멤버랑 같이 먹는 건 어때?”

[치, 그건 싫어요.]

“싫어?”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진하가 말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멤버 전부 몰려다니면 사람이 금방 알아봐서 곤란해요. 스케줄 비는 날 잠깐 시간 내는 건 괜찮으니까 저녁은 나한테만 사면 돼요.]

“하긴 너희처럼 예쁜 얘들이 몰려다니면 눈에 띄긴 하겠다. 하여튼 날만 잡아. 사 줄 테니까.”

[헤헤. 그럼 나중에 시간 내서 문자 보낼게요.]

“그래. 최고급 회로 사줄게. 사인은 언제 받으러 갈까?”

[오늘 밤이요. 방송 녹화 끝나고 행사 뛰고 숙소 가면 밤 아홉 시 반쯤 될걸요? 오늘은 좀 일찍 끝나요.]

“알았어. 어디로 가면 되지?”

[우리 숙소가 약수역 근처에 있거든요. 주소 문자로 보낼 테니까 숙소 와서 문자 보내면 나갈게요.]

“알았다. 문자 줘. 가서 문자하마.”

[네. 이따 봐요.]

통화를 끝낸 강수는 북한산을 갈까 말까 고민했다.

저녁 먹고 아홉 시 반까지 약수역에 가려면 수련할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수련 시간은 짧지만 운동 삼아 갔다 올까? 그래야겠다.’

운동 삼아 북한산에 오르기로 한 강수는 챙겨놓은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갔다.

*

숙소에 도착해 멤버들이 얼굴에 클렌징 로션을 바르고, 옷도 갈아입는 등 부산을 떠는 동안 진하는 후드티를 입고,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며 강수의 문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세나 초상화가 팬 카페에서 이슈가 되고, 매니저 오빠가 나머지 멤버의 초상화를 의뢰한다고 이강수를 만나고 온 후, 이강수에 대해 미남에 상남자라는 평가를 했을 때부터 왠지 관심이 갔다. 더구나 이강수 화가가 아무런 보상 없이 흔쾌하게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선 호감이 생겼다.

호기심이 생긴 진하는 이강수가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보았다. 검색으로 찾은 사진은 작았지만 사진 속 이강수는 상당한 미남이어서 그런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데 ‘웃어봐’가 본격적으로 차트역주행을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바빠지는 바람에 이강수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기회가 되면 꼭 만나보겠다는 생각만 담아놓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강수의 문자가 왔다. 오늘 이강수를 만나라는 하늘의 계시인지 지방 스케줄마저 없어서 당장 만나자고 약속 잡은 것이다.

띠링-

‘왔다!’

빌라 앞에 도착했다는 강수의 문자를 확인한 진하는 마음이 설레었다.

‘얼굴 한 번 보는데 몇 달이 흘렀네.’

진하는 강수에게 내려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다섯 장의 라운드 티에 동료의 사인을 받아 챙겨놓은 쇼핑백을 들었다.

진하는 앞자리에 앉아서 카톡 하는 세나에게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세나야, 난 사인한 거 주고 올게.”

“응? 그래, 어디로 빠지지 말고 바로 와.”

“빠지긴 어딜 빠져? 걱정 마.”

숙소는 3층.

진하는 천천히 빌라 현관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갔다.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남자일지 아니면 태근오빠 말대로 정말 상남자일지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1층이 보이는 계단참에 도착했다.

LED 등 불빛이 밝혀진 현관에 캐주얼한 옷을 입은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진하를 쳐다보았다.

진하와 강수의 눈이 마주쳤다.

‘응? 멋있잖아!’

강수의 얼굴을 확인한 진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비록 환한 대낮이 아니고, 빌라 LED 센서등 불빛 아래지만 매력적인 미남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요 몇 달 사이 방송국에서 남자 연예인이나 아이돌 그룹 멤버를 제법 만났다.

그들이 잘생긴 건 맞지만 한창 뜨고 있는 시기라 연애는 금지이기도 했고, 대부분 메이크업으로 분장한 외모라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한데 눈앞의 이강수는 그동안 봐 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달랐다. 배우 뺨치게 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털털하게 입은 옷맵시 위에 드러난 체형만 봐도 탄탄하게 균형 잡힌 건강한 몸이란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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