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16화 (116/197)

# 11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6회

문득, 강수의 뇌리에 배우 샐리 호킨스가 바다가 보이는 창가 탁자에서 극 중 인물 산드라와 마주 앉아 대화한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샐리 호킨스의 영상이 흐려지고, 실제 모디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산드라가 말했다.

“모드, 그림 그리는 거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부끄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은 모드.

“그건 아무도 못 가르쳐요. 그리고 싶으면 그리는 거죠. 외출을 안 해서 기억에 있는 장면을 그려요. 만들어내는 거죠.”

산드라는 모드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눈빛으로 모드를 지켜보다 말했다.

“우리 알고 지낸 지 오래됐잖아요.”

“예.”

“오래됐죠?”

“그러게요.”

“아직도 그 창작의 원천이 뭔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전 바라는 게 없어요.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바랄 게 없어요.”

왜소하고 메마른 모습의 모드는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난 창문을 좋아해요. 지나가는 새. 벌꿀. 매번 달라요. 내 인생 전부가....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바로 저기.”

왜소하고 온몸이 장애로 뒤틀린 모드는 드넓은 창밖 세상을 바라본다.

강수는 의자를 뒤로하고 모니터 앞에서 물러났다.

꽃과 허공에 뜬 새와 초원 위의 집.

산과 하얀 나무, 빨간 나무, 갈매기, 바다와 집이 있는 풍경.

지붕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부부.

꽃밭에 앉아 있는 흰 고양이.

모드는 자신이 보고, 기억하고 있는 일상의 한 장면을 그렸다. 그래서 사계절이 그림에 담겨 있기도 하다, 원근감은 맞지 않고, 단순하고 직관적인 구도와 색깔이지만 평화롭고 따스하며 아늑한 정취가 풍긴다.

강수는 모드를 통해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깨달았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술가가 깊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심오한 주제를 표현한 그림만이 가치 있는 그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은 깊은 의미를 담아내야만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무엇을 그리든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표현하고 싶으면 표현하면 돼. 역사적,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그림이든 철학적 주제를 내포한 그림이든 전깃줄에 앉아 있는 새를 그렸든 하나의 그림일 뿐이야. 어떤 그림이든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해주거나 하나의 의미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의자에서 일어난 강수는 거실 등을 켜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뇌리에서 무수히 많은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샤워하고 보았던 조금 전 창밖의 풍경.

어둠의 장막이 내리고, 저 멀리 붉은 기운이 애잔하게 남아 있는 회색 구름 아래 웅크린 북한산. 그 위 밤하늘에서 하나씩 희미하게 흔들거리며 나타났던 별들.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아래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차도의 건너편을 노려보며 도약을 위해 움츠린 삼색 고양이.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햇볕에 반짝이는 모래사장을 걸어오던 발랄하고 건강한 자태의 주하와 임해영.

선암갤러리에 찾아와 자기의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의 설희.

유년의 어느 날, 줄기가 부러진 갈대 위에 앉은 잠자리 앞에서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원을 그리던 동네 아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허공에서 떼를 지어 공중부양하듯 떠 있는 잠자리들.

소나기를 만나 머리에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던 아이.

일상에서 마주쳤던 삶의 한순간들이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한 장면이지만 강수에게는 아련한 추억이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었다.

연필을 쥔 강수의 손이 하얀 도화지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강수의 뇌리에 떠오른 장면이 스케치북의 도화지에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며 나타났다.

강수의 뇌리에 떠오른 장면들이 한 장씩 스케치북을 채워갔다.

강수는 의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손을 놀렸다. 스케치를 끝내면 도화지를 넘겼고, 미친 듯이 다음 장면을 스케치했다.

스케치북에 남은 도화지가 한 장도 없을 때야 강수의 손이 멈췄다.

‘마지막 장이었구나.’

집에 있는 두 권의 스케치북을 전부 썼다.

어느새 창밖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날밤을 새웠군.’

오늘은 한남동 김대풍 어르신 집에 방문해 주하 가족에게 인사하기로 했다. 슈트는 사놓았다. 시간 맞춰 한남동으로 가면 된다.

‘날이 밝았지만 일단 마나회로 수련하고 오자.’

3서클 마나하트는 거의 완성 단계지만 보름 정도는 수련해야 할 것 같았다. 3서클을 완성하면 마나회로 수련 시간을 절반쯤 줄일 계획이었다.

4서클은 몇 년이나 수련해야 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련이 필요하다. 3서클 마법만 해도 초인이라 불러도 될 만큼 가공스럽고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상위 마법 가운데 텔레포트나 인챈트, 아공간 같은 환상적인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그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다.

어쨌든 자랄 행성에서 지구에 침입하지만 않는다면 더 마나수련할 필요는 없었다.

강수는 피로를 풀기 위해 회복마법을 캐스팅했다.

“회복.”

청량한 마나의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한차례 훑으며 체내에 생성된 피로물질과 노폐물을 소멸시켰다.

순식간에 몸에서 활력이 돌아오자 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편하기는 한데 남발해선 안 된다니까.’

육체적인 피로는 사라질지 몰라도 날밤 새웠다는 심리적, 정신적인 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강수는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멨다.

밖으로 나온 강수는 수련 장소를 향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한남동 김대풍 집에 도착한 강수는 육중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잔디와 그 사이로 뻗은 청석,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는 갖가지 화초, 온갖 조경수가 자라고 있는 너른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화려하며, 그 화려함을 잘 가꾸어 놓아 정갈한 분위기가 났고, 정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강수오빠, 어서 와요.”

옅은 하늘색의 캐주얼한 느낌이 나는 투피스 정장을 입은 주하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강수를 맞이했다. 심플한 디자인의 투피스 정장은 단정하고 수수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초화장만 했는지 얼굴은 화장한 티가 나지 않았다. 기초화장만 했음에도 뽀얀 피부는 아름답게 빛났다.

강수가 상큼하고 예쁜 주하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응, 가족은 다 왔어?”

“오빠하고, 고모, 사촌 동생이요. 아빠 식구하고 작은아버지는 곧 도착할 거예요. 들어가요.”

상류층이라고 해도 좋을 주하 친척과 상견례 한다. 강수는 약간의 긴장을 느끼며 주하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거실의 소파에는 남자가 셋, 여자가 둘, 다섯 명이 앉아있었다.

중년 여인은 주하의 고모 김연숙이다. 십 대 여자아이는 김연숙의 딸 방지영이고, 얼굴에 여드름이 난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청소년은 아들 방완수, 방완철이다. 이십 대 중후반의 사내는 주하의 친오빠 김주익으로 강수보다 두 살 어린 27살이다.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선 강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훤칠한 외모의 김주익이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온 강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주하 남자친구 이강수 씨?”

“예. 이강숩니다.”

“주하가 남자친구를 식구에게 소개한 적이 처음인데 강수 씨는 생각보다 미남이네요. 전 김주익입니다. 주하 오빠죠.”

“반갑습니다.”

김주익이 고모 김연숙과 세 사촌 동생을 소개시켜주었다.

“고모님 가족이세요.”

“안녕하세요. 화가 이강수입니다.”

강수가 김연숙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화가라고?”

상류층의 마나님답게 명품으로 도배한 화려한 옷차림의 김연숙은 강수의 위아래를 훑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2학년 방완수와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방완철은 무덤덤한 얼굴로 강수에게 인사했다.

“헤헤. 만나서 반가워요. 근데 아저씨 되게 잘생겼다. 배우 해도 되겠어요.”

“하하. 고맙다.”

김연숙을 닮아 깜찍하게 생긴 중학생 방지영은 헤헤 웃으며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강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강수를 빛나는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딸을 힐끔 쳐다본 김연숙이 같잖다는 눈빛을 하고 물었다.

“화가면 다른 일은 안 하고 그림만 그리니?”

“그렇습니다.”

“그림 팔아서 먹고살 수는 있어? 하긴 주하한테 건물이 있으니 그림은 안 팔려도 별 상관없겠네.”

모욕감을 느낄만한 비아냥대는 언사였지만 강수는 빙긋 웃고 말았다. 화가라고 하면 의레 반은 백수로 여기는 경향을 잘 알고 있었고, 작금의 현실도 경력과 명성 없는 화가가 돈 벌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강수를 우습게 여기는 김연숙의 발언에 강수보다 주하가 발끈해서 김연숙을 불렀다.

“고모.”

“왜?”

김연숙이 겉만 번드르르한 남자를 사귄다는 듯한 눈초리로 주하를 보았다.

“강수오빠가 얼마 전에 인사동에서 개인전 열었거든요. 그 개인전에서 얼마 벌었는지 아세요?”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전시장에 전시한 스물다섯 작품, 오프닝 당일 다 팔려서 2억 넘게 벌었거든요. 9월에 또 개인전 할 거구요. 우리 강수오빠, 먹고 살만한 게 아니라 떵떵거리면서 살 만큼 벌어요. 그뿐이 아니라 작년에 그림동화책 두 권 낸 거 다 베스트셀러예요. 지금까지요. 서점가서 확인해보세요.”

김연숙이 흠칫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러니? 화가 치고 생각보다 꽤 버는구나. 그만큼 벌면 그럭저럭 살긴 하겠네.”

“그뿐만이 아니에요. 요즘 엄청나게 뜨고 있는 걸그룹 핑크티티 초상화를 강수오빠가 그렸는데 그게 이슈가 돼서 이색지대 탐방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취재해 방송에 나왔어요. 강수오빠는 TV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고요.”

강수는 발끈해서 자기를 추켜세우는 데 열 올리는 주하를 보며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핑크티티 얘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운 방완수가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나 강수 옆으로 왔다. 신장이 강수보다 약간 작은 방완수가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강수에게 말을 건넸다.

“저, 강수 아저씨, 핑크티티 잘 아세요?”

“알지. 왜?”

방완수가 엄마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말했다.

“핑크티티 잘 알면 누나들 사인 좀 받을 수 있나 해서요.”

강수가 빙긋 웃었다.

핑크티티 사인받는 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장담은 못하지만 사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핑크티티 사인받아줄까?”

방완수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누나들 사인받아주면 정말 감사하죠.”

“알았어. 사인받으면 주하에게 맡길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고맙습니다.”

방완수가 환하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김주익이 미소 띤 얼굴로 강수에게 자리를 권했다.

“강수 씨, 앉으세요.”

“예.”

강수와 주하가 자리에 앉았고, 잠시 후에 현관문이 열렸다.

김대풍의 장남 김용극이 30대 중반의 화려한 미모를 발산하는 젊은 아내, 강소선과 6, 7세로 보이는 인형처럼 예쁜 두 아이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김용극은 50대 중반으로 선이 굵은 중후한 인상의 사내로 180cm의 신장에 풍채가 당당했다. 김연숙 못지않게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강소선은 전신에서 부티가 좔좔 흘렀다.

주하가 현관으로 나가 김용극 부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빠, 새엄마. 안녕하세요. 소하야, 주한아, 어서 와. 오랜만에 보네?”

“언니, 안녕하세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분위기가 낯선지 아이들이 주하한테만 인사하고 쭈뼛대며 엄마 옆에 붙어 있었다.

강수는 주하를 따라 나가 옆에 서 있다 머리를 숙여 김용극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하 남자친구 이강수입니다.”

주하 옆에 서 있는 강수를 눈 여겨 보고 있던 김용극이 매서운 눈초리로 강수의 위아래를 살폈다.

인상을 편 김용극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강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가 이강수인가? 주하한테 얘기 들었네. 체격이 듬직하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몽둥이 들고 내쫓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어.”

김용극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강수에게 건넸다.

“회사 근처에 올 일 있으면 전화해. 앞으로 자주 보세.”

강수는 명함을 받아 챙기며 김용극이 전 아내와 자식에게 소홀했을지 몰라도 생각보다 호방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예. 아버님.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하하. 좋아.”

“큰아버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빠 왔네요.”

김연숙의 두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용극에게 예의 있게 인사하는 것과는 달리 김대풍의 재산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김연숙은 김용극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건성으로 인사했다. 강소선에게 눈길을 돌린 김연숙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찡그리더니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것이 어떻게 오빠를 꾀었는지 모르겠네? 하고많은 여자 중에 창녀한테 넘어간 오빠가 바보지. 불여시 같은 년.’

김연숙은 강소선만 보면 과거 잠깐 룸살롱에서 일했다는 전력을 떠올리며 속으로 창녀라고 욕했다.

“용호는 아직 안 왔냐?”

“예. 곧 도착한다고 했어요.”

“이 자식이 언제 시간 지킨 적 있더냐? 와야 오는 거지. 주익아, 할아버지 서재에 계시니?”

“예.”

“우린 식당에 가 있을 테니 할아버지 모시고 오너라.”

“그러죠.”

김용극을 필두로 모두 식당으로 갔다.

식당 탁자에는 푸짐한 만찬이 준비되고 있었다. 만찬을 위해 일당을 고용했는지 아주머니 한 명이 가정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날 강수는 김연숙을 뺀 대부분 사람에게 호감을 받으면서 주하 친척과 성공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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