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3회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왔기 때문에 강수는 개인전 뒤풀이를 하지 않았다. 전시도우미로 수고한 두 친구와 두 후배에겐 저녁을 먹고 들어가라고 회식비를 주었다. 그리고 주하와 부모님을 모시고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주하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조금 전 식당에서 나와 귀가했다.
수유동 중산 아파트 강수의 집.
거실 소파에 앉은 김순옥 여사가 기쁨으로 가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강수야, 난 주하가 마음에 꼭 든다. 당신은 어때요?”
강수의 여자친구를 만나서 흥이 나 있는 김순옥 여사에 비해 과묵한 성격인 이전일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소? 강수가 좋으면 됐지?”
김순옥 여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하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소?”
“그러니까 제대로 얘기하란 말이에요.”
“흠, 표정도 밝고 말하는 거나 행동이 싹싹해서 애는 괜찮아.”
“호호, 그렇다니까요. 애가 얼마나 곱살스럽게 구는지 늙은이 싫어하는 요즘 애들 같지 않다니까요.”
“그렇긴 하지. 헌데 강수야.”
“예, 아버지.”
“그 키 큰 처자는 누구냐? 주하하고 같이 가는 것 같다만?”
때가 되면 어차피 주하의 집안에 대해 부모님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주하의 집안 사정을 얘기해주기로 했다.
“키 큰 여성은 임해영이란 아가씨인데 주하의 경호원이에요.”
“주하 경호원? 경호원은 기업체 회장이나 신변 보호가 필요한 사람한테나 필요하지 주하에게 경호원이 왜 필요한 것이냐?”
“임해영 씨는 주하 할아버지인 김대풍 어르신이 고용한 거예요. 김대풍 어르신은 부동산에 투자해 성공하셨는데요....”
강수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선에서 주하의 집안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주었다.
이전일과 김순옥 여사가 평생 시골에서 살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지는 않았다. 드라마와 뉴스만 시청해도 변화, 발전한 사회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풍 어른이 경호원을 고용해서까지 주하를 바르게 키우려고 심혈을 기울였구나.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김순옥 여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하가 어려서부터 부모와 헤어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구나. 부모 없이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잘 컸네. 기특하고 대견하구나.”
“그러니 경호원까지 붙인 게 아니오.”
“경호원 있다고 나쁜 짓 못 하겠어요? 경호원 때문이 아니라 주하는 천성이 착한 거예요. 집안이 그렇게 부자면 거만할 만도 한데 겸손하고 예의 바르잖아요.”
“그려. 경위가 밝고 마음씨도 고운 아가씨지. 강수야, 너는 주하와 결혼할 생각은 있느냐?”
“예, 아버지.”
“잘 생각했다. 집안이 좀 복잡한 것 같다만 주하만 올바르면 된 거야. 결혼해서 너희가 행복하면 된다.”
“엄마도 네가 주하하고 결혼하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 시간 내서 주하 부모님하고 인사라도 하면 좋겠구나.”
“제가 먼저 주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기회가 되면 어머니, 아버지와 상견례 할 수 있도록 얘기해 볼게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래. 기다리마. 강수야, 너 혼자 객지에서 고생해서 그동안 에미 마음이 얼마나 짠했는지 아니? 한데 네가 주하와 사귀고, 그림도 전부 팔려서 돈도 잘 버니까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제 어미는 다른 거 없어. 그저 손주 좀 안아보면 원이 없겠다.”
강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형이 사고를 당한 이후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심했고, 그것이 한이 되어 아이를 갖지 못했다. 강수는 부모님에게 손주를 안겨드리는 것이야말로 효도임을 깨달았다.
‘주하와 결혼하면 내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어머니 한부터 풀어드려야겠다. 근데 결혼하자마자 애부터 낳자고 하면 주하가 그러자고 할까?’
주하가 자기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리는 없지만 결혼하고 곧바로 허니문 베이비를 갖는 것은 자신의 독단일 수 있다.
‘당장 결혼할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강수는 평소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년까지는 여건이 되지 않아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작품이 완판된다면 머지않아 같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될 수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나중에 제가 이것보다 큰 집을 마련하면 서울에서 같이 사는 거 어때요?”
“뭐? 서울에서? 아파트에서 말이냐?”
“그렇죠. 34평이면 꽤 넓어서 사시는데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일 없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복잡한 서울이 좋은지 몰라도 나는 싫다.”
이전일이 거실을 가리켰다.
“이렇게 갑갑한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 방문 열고 밖에 나가면 탁 트인 내 집이 최고여.”
“그럼 단독주택 사면되잖아요?”
“단독주택 사면 뭐해? 땅도 없고 대문 열고 나가면 콘크리트 건물뿐인데. 게다가 서울 집값이 일이 억도 아니고 어느 세월에 돈 벌어서 집을 사겠다는 거냐?”
“아파트를 누가 내 돈 주고 사요? 융자 보태서 사는 거죠. 아니면 서울 근교에 땅 사서 집을 지어도 되고요.”
이전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서울 근교에 땅을 사서 집을 지어? 인석아, 돈부터 벌고 나서 얘기하자.”
부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김순옥 여사가 기쁨으로 가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엄마는 찬성이다. 땅 사서 집 두 채 지어서 손주 보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니?”
“쯧쯧. 요즘 시부모하고 같이 살려는 여자가 어디 있어?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너희나 잘 살아라. 네 엄마하고 나야 아직 건강하니까 우리 걱정할 것 없다.”
강수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제가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돈 벌면 서울 인근에 땅부터 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강수의 단호한 어조에 이전일이 한번 해보라는 듯이 말했다.
“정 그러면 텃밭 농사지을 수 있게 500평 이상 되는 땅을 사거라. 그럼 한번 생각해보마.”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강수의 자신에 찬 대답에 이전일이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허허, 녀석도 참. 서울 근처 땅값이 얼만데 500평짜리 땅을 사? 거기에 집 두 채를 짓는다고?’
몇 년 사이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 서울 인근 땅값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자식이 땅을 사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일이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강수는 당장 땅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번 2억과 영화 벙어리 황구 죽돌이 수익금을 정산해 받으면 3억이 넘는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현금 3억에 모자란 돈은 은행에서 융자받으면 되고, 여의치 않으면 9월에 잡혀있는 두 번째 전시회에서 보충하면 된다.
‘어차피 대규모 작업을 하려면 창고형 작업실이 필요해. 땅을 먼저 사 놓고 돈 벌어서 작업실도 짓고 집도 지으면 되겠지. 주하가 부동산을 전공했으니까 잘됐다. 주하한테 땅을 알아보라고 하면 되겠어.’
강수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
다음날.
북한산 수련장소에서 마나회로 수련을 끝내고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으로 아파트까지 단숨에 달려온 강수는 외출복으로 차려입은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어디 가시게요?”
“양구에 가야지.”
“벌써요? 며칠 지내다 가셔도 되잖아요.”
“여기서 뭘 하라고?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있겠다.”
“저랑 밖으로 나가요. 백화점에 가서 옷하고 필요한 물건 사드릴게요. 같이 쇼핑하고 서울 구경도 해요.”
김순옥 여사가 백화점 가자는 말에 솔깃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백화점? 거긴 물건 비싸지 않니?”
“명품은 비싸겠지만 그렇지 않은 제품도 많아요. 제가 요즘 돈 잘 버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호호. 그럼 아들이랑 백화점에 가볼까?”
백화점 갈지도 모르는 분위기가 되자 이전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수야, 개인전 오픈해 놓고 전시장에 안가 봐도 되니? 무슨 시간이 있다고 쇼핑에 서울 구경을 하고 다녀?”
“어제 전시장에서 손님 접대했으면 됐죠. 전시 작품도 어제 다 팔려서 매일 전시장에 붙어 있을 필요 없이 가끔 가보기만 하면 돼요. 전시장은 갤러리에서 전시도우미 쓰기로 했거든요.”
강수는 자신이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절대 어머니와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어머니가 원하는 옷과 핸드백, 액세서리 등 마음껏 사주고 싶었다.
김순옥 여사는 강수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남편 이전일의 뜻에 따랐다.
“호호, 강수야 나는 네 마음만 받아도 기쁘고 고맙단다. 이번에는 너도 바쁘니까 가지 말고 다음에 시간 많을 때 가서 왕창 사주렴.”
아쉽긴 했지만 어머니도 다음에 가자는데 고집 피울 수는 없었다.
“알았어요. 다음에는 꼭 가요.”
“그럼. 우리 장한 아들이 사주는 옷도 입고 반지도 끼고 자랑해야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자랑을 한다는 거요? 나중이라도 행여 그런 건 하지 말아요. 이제 나갑시다. 그래야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갈 것 아니오?”
“어휴, 이 양반은. 뒤에서 뭐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서둘러요.”
이전일을 한차례 쏘아붙인 김순옥 여사가 강수에게 푸념 섞인 어조로 말했다.
“강수야, 네 아빠가 집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만 나가자.”
“예, 어머니.”
부모님과 함께 정문으로 내려간 강수는 택시를 잡아 부모님을 태워드렸다.
“어머니, 아버지.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려, 우린 걱정 말고 네 일 보거라.”
부모님을 보내고 아파트로 올라간 강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차를 몰아 작업실로 갔다. 돈암동에 도착해 작업실로 올라가니 고원철과 서혁중이 활짝 웃는 얼굴로 조폭 보스에게 인사하듯 허리를 깎뜻이 굽혀 강수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존경하는 선배님 오셨습니까? 밤새 별고 없으시고요?”
“뭐냐, 갑자기? 무슨 인사를 조폭처럼 해?”
서혁중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일 뿐입니다. 선배님은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작업만 하면 되십니다.”
“뭐어?”
서혁중의 생뚱맞은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두 후배가 왜 생글거리며 즐거워하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짜식들. 두 번째 개인전도 완판되면 판매금의 15%를 챙긴다 이거지? 나도 완판되면 좋겠다만 75점이나 되는 작품이 다 팔릴 수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알걸.’
강수는 장영봉에게 군마를 찍어 보내기 위해 디카를 챙겨 완성된 군마 네 점 앞으로 갔다.
사진을 찍는 강수 옆으로 서혁중이 다가와 물었다.
“선배님, 군마 사진 누구에게 보내려고 찍는 건가요?”
“그래. 장 선배한테 보낸다.”
“장 선배님이요?”
서혁중의 머리가 팽이처럼 회전했고, 장영봉이 군마를 보려는 이유를 유추해냈다.
“혹시 장 선배님과 두 번째 개인전에 관해 얘기한 겁니까?”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하하. 장 선배님이 군마를 보려는 이유야 뻔하죠. 그걸 모르면 바보게요? 두 번째 개인전 날짜는 잡았나요?”
“자식, 눈치는 빨라. 그래. 구월 초에 하기로 했다.”
“구월 초요!”
고원철과 서혁중이 동시에 외치듯 말했다.
9월 초면 앞으로 5개월 정도 남았다.
‘흐흐. 오 개월 뒤면 목돈이 생길 수도 있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어제 강수의 개인전 오프닝과 동시에 무섭도록 빠르게 그림이 팔려나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봤다. 그 때문에 이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일말의 우려는 폭우가 내리고 맑게 갠 하늘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그림이 아무리 완성도가 높고 작품성을 담아내도 판매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강수의 작품은 놀랍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서혁중이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에 14점은 끝내야 일정에 맞출 수 있겠다. 원철아, 우린 작업하자?”
고원철이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래. 작업해야지.”
의욕에 넘쳐서 캔버스 앞으로 걸어가는 두 후배를 보며 강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으면 일을 해도 힘이 난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100호 크기의 캔버스에 작업지시서대로 물감칠해 3일에 한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작업이 절대 간단하지는 않았다. 아무나 물감을 배합해 칠할 수는 없다. 미술과 색채에 대한 이해와 경험, 숙련된 스킬이 밑바탕이 되어야 할 수 있는 난도 높은 작업이었다.
사진을 찍은 강수는 장영봉에게 사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포털사이트를 연 강수는 뜻밖의 기사를 발견했다.
몬스터를 막아라가 연론 배급 시사회를 개최했다는 기사였다.
-‘몬스터를 막아라’, 한국형 액션 영화의 신기원을 열다. 언론 배급 시사회 성황리 개최.
‘아, 몬스터를 막아라가 기자들에게 공개됐구나. 기자들 평가는 어떨까?’
강수는 약간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기사를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