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2회
계약 서류와 대표 직인을 가져온 장영봉은 강수와 전속작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 한 부를 강수에게 건네준 장영봉이 말했다.
“이 작가.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도 될까? 급한 건 아니니까 바쁘면 내일 얘기해도 되네.”
“괜찮습니다. 얘기하세요.”
“작품이 75점이나 되면 전시장 1, 2층을 다 써야 해서 미리 날짜를 정해 놓는 것이 좋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오 개월 뒤, 9월이면 언제라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고원철과 서혁중 두 후배가 작업지시서대로 물감칠을 충실하게 해준 덕에 넉 달이면 75점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에 쫓기듯이 하는 작업이 자기는 물론이고 두 후배도 즐거울 리 없었다. 회화 작업은 집중력이 필요할 뿐이다. 돈에 쪼들리지 않는 이상 일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기며 해야 한다.
이번 개인전으로 2억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일러스트 하던 작년만 해도 그림을 그려서 2억의 수익을 내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항상 아등바등 일러스트에 매달려야 손에 쥐어졌던 돈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통장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게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는 마법사 투팍탈을 만났기 때문이지. 고맙긴 한데 챠미카야 마법사들이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
너무 갑작스러운 성공 때문일까? 가끔 투팍탈의 경고와 자랄인의 지구 침입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면 9월 첫 번째 주와 두 번째 주를 비워놓겠네. 괜찮겠지?”
“첫 번째 주와 두 번째 주면 두 주요?”
“대관도 아닌데 한 주 전시는 좀 짧다는 생각이네. 다음 전시는 많은 관람객이 자네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 기간을 두 주로 하세.”
장영봉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이강수의 파괴력이 유명작가 못지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반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관람객이 많을수록 이강수의 명성과 위상은 높아진다. 지금 같은 인기와 작품 판매라면 이강수의 전시에 2주를 할애해도 전시장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일정을 잡겠네. 내가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군.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테니 어서 내려가 보게.”
“예.”
강수는 회의실을 나와 전시장으로 내려갔다.
*
밤색의 반코트가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사내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선암갤러리 입구로 걸어왔다. 185센티 정도의 신장에 입은 반코트만큼이나 빛나는 외모의 남자는 리포터 정진규였다.
정진규는 촬영현장 사전답사한다는 이유를 대고 일찍 퇴근해서 여섯 시쯤 선암갤러리에 도착했다.
휘이잉~
구름이 끼고 해가 떨어진 탓인지 따뜻했던 낮과는 달리 저녁 공기가 서늘했고 찬 바람이 불었다.
‘그제는 푸근했는데 날씨가 참 변덕이야.’
전시장 입구에는 화환 두 개가 양쪽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지개출판사, 홍우대 미대 동문. 첫 개인전에 축하 화환이 고작 두 개? 요즘 화환을 잘 보내진 않지만 초라하군.’
화환이 없으니 인맥이 부실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진규가 출입문을 열고 찬바람을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훅-하고 더운 공기가 달려들었다. 실내는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북적였다.
‘사람은 많네?’
출입문 옆 책상 위에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왔다 갔다는 흔적은 남겨야지?’
정진규는 펜을 잡고 방명록을 넘겨 하얀 백지를 펼쳤다.
‘뭐라고 쓸까?’
잠시 문구를 떠올린 정진규가 펜을 놀렸다.
-개인전을 축하합니다. 비상의 날개를 달고 드높은 창공에 날아오르기를. 정진규
낯뜨거운 문구지만 누구나 성공을 갈구한다.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문구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시장으로 걸어간 정진규는 주위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영화배우 같은 정진규의 훤칠한 외모를 본 여성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본 것이다. 여성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정진규와 눈이 마주치면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라도 쓰고 싶지만 그래서는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여성들의 시선이야 익숙한 정진규였다. 리포터였기에 망정이지 배우였으면 여성들이 사인해 달라며 몰렸을 것이다.
그림 앞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사진 찍는 광경을 보고 실소를 지었다.
‘웬 꼬마 숙녀들이 이런 델 다 왔지?’
고등학생이 개인전 전시장에 오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비교적 보기 드문 일이다.
‘아, 핑크티티 팬인가?’
핑크티티는 차트 역주행을 일궈내며 가요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삶이 고달프고, 성공에 목마른 대중은 밑바닥에서 시작한 성공신화에 감동하고 열광한다. 핑크티티의 성공은 그들의 오랜 무명기간만큼이나 극적이다. 그 극적인 성공의 근간에는 세나 초상화가 있고, 세나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바로 이강수다. 핑크티티 팬에게 이강수는 각별한 존재이다.
정진규는 주변에 신경 끄고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확실히 좋군. 근데 무슨 그림값이 천육백만 원이야? 신인화가 그림값 맞아? 어라? 전부 빨간 딱지가 붙어 있어?’
의아함을 느끼며 정진규는 옆 전시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림을 감상하고 제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핑크티티 초상화만큼이나 그림은 괜찮네. 음, 여기도 다 팔렸어? 이강수 화가. 생각보다 인기가 많구나. 하긴 채색이나 인물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특이하긴 해. 임괘스토 기법을 써서 그런지 입체감이 인물의 생동감을 살려주기도 하고.’
지금까지 본 10여 점이 전부 팔린 것이 의외였지만, 정진규는 여유를 가지고 그림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감상했다. 그림에서 풍기는 색감과 다양한 인물의 감각적인 표현에 빠져 작품이 디스플레이된 동선을 따라 마지막 그림까지 감상하고 나서야 더 감상할 그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작품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있구나. 뭘 사지? 지는 해와 한강 철교 사이는 풍경이 환상적이라 좋고, 거미와의 식사는 특이한 소재의 작품이고.... 갈림길은 마치 인생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 같아.’
욕심나는 그림이 너무 많았다.
‘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 정진규는 전시장을 돌며 명판을 확인했다.
‘이럴 수가!’
다시 살펴보니 전시 작품 전부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비싼 그림이 다 팔렸어!’
그림값이 예상보다 비싸도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 구매하려고 했지만 살 수 있는 그림이 없었다.
자기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두 남자의 경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햐, 어떻게 된 게 벌써 완판이다. 이거 실화냐?”
“글쎄 말이다. 그림이 좋긴 한데 이건 충격이다. 그림값이 대체 얼마야?”
“완판됐으니 수억은 되겠는데?”
“헉! 개인전 한 번으로 수억을 벌 수도 있구나. 직장인은 일 년 내내 회사에 얽매여 일해도 수천이 고작인데 단번에 수억이라니! 힘 빠지네.”
“종호야, 네가 그림을 모르나 본데 어디 가서 그런 무식한 말 하지 마라. 이 그림 봐라. 이렇게 물감을 두텁게 칠하고 살아 있는 것 같이 섬세하게 인물을 표현하려면 못해도 한 달은 더 걸리겠다. 전시된 작품을 다 그리려면 얼마나 걸리겠냐?”
“아, 25점이니 거의 2년은 그림 그리는데 투자했겠구나.”
“하여튼 정확한 건 몰라도 화가의 열정과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들인 시간과 작품에 구현된 예술성을 따지면 허황한 가격은 아닌 거지.”
“듣고 보니 그렇구나.”
정인규는 귓전에 들려오는 젊은 두 사내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음....”
정진규는 그림을 보며 뭔가 사유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정서적인 감흥을 느꼈다.
그림값은 비싸지만 흔쾌하게 돈을 지급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니!’
전시장에서 볼일을 마친 정진규는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밖으로 걸어가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전시장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수준 높고 작품성 있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이런 전시회면 금요일 밤에 방영하는 ‘한 주간 문화계 소식’의 미리 보는 공연, 전시 코너에서 가볼 만 한 전시회로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도 이미 완판되었으니 대가성이나 홍보성이라는 논란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물론 잠깐이라도 방송을 타면 전시회는 상당한 홍보효과를 누릴 것이고, 화가의 인지도에 도움이 된다. 어쨌든 시청자를 위해 ‘서울의 삶, 그 인상’이라는 의미 있는 전시회를 소개할 수 있는 점이 중요하다.
‘내일모레 방영이라 시간이 촉박해서 채택될 것 같진 않지만 팜플렛하고, 참고하라고 동영상 소스나 전해주지 뭐.’
정진규는 스마트폰으로 전시장과 몇 점의 작품을 촬영하고, 팜플렛 한 부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전시장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간 정진규는 ‘한 주간 문화계 소식’의 담당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날 밤.
회 원수 5만 명이 넘은 핑크티티 팬카페에 이강수의 전시회에 관한 게시글이 몇 건 올라왔다.
‘이강수 아저씨 전시회 방문기’
<이강수 아저씨 모르는 애 있니? 있으면 손. 없지? 당연히 없을 거야. 세나 언니 초상화 그린 이강수 아저씨 모르면 아마 초짜 팬이겠지? 초짜라면 이번 기회에 알아 둬. 각설하고!
내가 강수 아저씨 개인전 연다는 소식 접하고 전시회 오픈을 손꼽아 기다렸거든. 왜냐고?
‘빈이네 이야기’에서 우리 언냐들 초상화 원화 보고 완존히 감동 먹었거든. 멤버 개개인 개성 넘치는 얼굴을 120% 표현해 주는 아름답고 황홀한 색감. 말로는 설명이 안 돼. 아직도 우리 언냐들 초상화 원화 못 봤으면 이 글 읽어봐야 공감 못 할 수도 있을 거야. 나중에 빈이네 이야기 가서 직접 보도록 해. 각설하고!
드디어 오늘 전시회 오픈했다.
전시회는 인사동 선암갤러리에서 하거든. 갈 거면 머리에 입력해 둬.
어쨌든 설레는 가슴 안고 인사동으로 갔어.
사진은 개인전이 열리는 선암갤러리야. 안에 들어갔더니 전시 공간이 생각보다 넓더라.
사설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넘어가자.
짜잔! 보시라.
이강수 아저씨의 그림. 전부 25점. 굉장하지 않아?
다른 그림도 다 좋지만, 특히 이 그림.
200호의 엄청난 대작, 무언의 약속이야.
200호라면 얼마나 큰지 모르는 애들도 있겠지? 검색의 수고를 덜어주지. 대충 무언의 약속은 변형 200호인데 가로 265센티, 세로 170센티의 크기야.
어때? 상상해봐도 크기가 장난 아니지?
난 무언의 약속을 감상하다 엄청난 경험을 했어. 밝힐까 말까 고민하다 내가 겪은 거니까 그냥 쓰기로 했어.
안 믿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그림 속 설원에 서 있는 거야. 설원에서 남자와 마주 서 있는 여인이 된 것 같았어. 그때의 느낌은 뭐랄까... 그래, 바로 카타르시스였어. 그 황홀한 느낌이란! 못 믿겠지? 뭐, 믿으란 얘긴 아냐.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황당해. 사진으론 원화가 주는 감동을 느낄 수는 없을 거야. 직접 가서 보고 느끼란 말밖에는 못 하겠다. 마지막으로 내 주제에 그림에 대해 모라고 평할 순 없고, 최이석 평론가가 팜플렛에 쓴 글에서 인용한 문장으로 대신할게.
‘이강수의 그림에는 따뜻한 이야기와 일상 속에 담긴 비범한 인생이 그림 한 점 한 점에 담겨있다.’>
-지영홀릭: 엄청 장문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방문기네요. 님의 글 읽으니까 전시회에 안 갈 수가 없겠는걸. 좋은 글 감사해요.
-Su지1004: 수거여. 잘 봤어요.
-지앨: 오, 글 쌈박하네? 전시장 안 가도 다 보고 느낀 것 같다.
┗빠직빠직: 원작의 감동을 느끼려면 직접 가서 보란 글은 안 읽은 거임?
-소행성1004: 그림은 가벼운 일상의 모습인데 원화는 많이 다른가요?
┗유다정: 당근이죠. 모니터상 그림과 원화는 비교 불가.
-미니미: 나도 전시장 갔는데 무언의 약속은 오픈하자마자 빨간 딱지 붙었어요. 그림값도 6천만 원이나 해요. 사람들이 놀라더라고요.
┗고석준: 6천만 원? 크아, 졸라 비싸. 신인화가 아닌가 봐?
┗허니바다: 첫 개인전인데 신인 맞지 않겠어요?
┗세나jang: 그것만 팔린 것 아니거든요. 나머지 그림도 죄다 팔려나갔어요. 그림값만 4억 4천이 넘어요. 앞으로 눈여겨 봐야 할 화가니까 기억해 두세요. 뭐, 카페 회원은 대부분 알겠지만.
┗티티돌이: 헉! 그림값이 왜 그리 비싸?
-쌈디: 그냥 그럭저럭 평이한 그림이구만 존나 빨아주네. 너 혹시 알바냐?
┗마튜: 크, 이 인간 어지간히 삐딱하네. 좋으면 좋다고 말도 못 하냐?
┗귀염녀: 관종인가요? 관심 끊자. 내 밑으로 댓글 금지.
┗루미양: 관종 인정. 나까지만 단다. 끝.
┗줌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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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수 개인전을 두고 선망 어린 댓글과 비아냥대는 댓글이 난무했다. 이강수 개인전 오픈 소식과 그림 완판 소식은 핑크티티 팬카페 회원을 중심으로 다른 대형 포털사이트와 SNS에도 서서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