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01화 (101/197)

# 10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1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서준홍 회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박 실장.]

“예. 회장님.”

[완판 되었다니 무슨 말이야?]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박연경이 방금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길지 않았지만 무겁게 박연경의 마음을 짓눌렀다.

[오늘 오픈한 것 맞나?]

“오늘 네 시에 오픈했습니다.”

[지금 몇 시야? 가만, 다섯 시 사십오 분이군. 한데 두 시간도 안 돼서 완판됐고?]

“예, 회장님. 장영봉 디렉터에게 확인한 사실입니다.”

[허, 이렇게 오픈하자마자 순식간에 완판된 전시회는 내 기억에 없어. 이 친구 그림은 왜 이렇게 사기 어려운가?]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일찍 나왔으면 구입할 수 있었는데 두 시간도 안 돼 완판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할 건 없어. 일이 먼저지. 그림이야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여튼 다음엔 내가 직접 가보든지 해야겠군. 아, 장 부장에게 작품 사진 파일을 자네에게 주라고 부탁할 테니까 그걸 출력해서 내일 출근할 때 가져 와. 어떤 그림인지 사진으로 봐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예, 회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연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강수가 언제 또 개인전 할지 모르겠지만 다음엔 회장님이 직접 갈 수도 있겠구나.’

서준홍 회장이 신인화가 개인전에 직접 관람하러 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다.

‘이강수 이 사람 정말 대단한데? 그림값은 중견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고 또 그게 전부 팔리다니. 유라 말대로 더 오르기 전에 한 작품이라도 사 놔야 하나?’

여윳돈은 있지만 그림에 투자해서 재미를 못 본 박연경은 그림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전시된 그림 가운데 제일 싼 작품이 50호이고 1300만 원이나 한다. 호당 27만 원꼴이다. 작년 12인전 때만 해도 호당 20만 원이었다. 캔버스 크기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호당 가격이 더 올랐으니 그림값이 너무 비싸다.

캔버스 크기가 커지면 보통 호당 가격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6천만 원이나 하는 무언의 약속은 중견작가의 그림값과 별반 차이나지 않는다.

작년 12인전부터 이번 개인전까지 이강수 화가의 작품 활동을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연경은 자신의 예술적 안목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유망주라고 하는 신인화가들의 작품을 5점 구입했지만 지금 팔 경우 수수료 제하면 수익은커녕 본전도 건지지 못한다. 이강수의 그림도 자신이 봤을 때는 다른 화가와 차별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모자랄 때는 유능한 사람의 판단을 따르면 리스크가 크게 준다.

‘이강수 그림이 훌륭하니까 완판된 것이고, 회장님도 사려는 거겠지. 좋아. 이강수가 두 번째 개인전 하면 나도 한 점 사봐야겠어.’

박연경은 그림 파일을 받기 위해 다시 3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

선암갤러리 관장실.

장영봉은 관장 조창석에게 이강수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이강수 작가의 전시 작품 25점이 완판되었습니다.”

“뭐?”

조창석 관장이 놀라서 장영봉을 쳐다보았다. 전시장에서 올라온 지 1시간 정도 지났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판매 현황을 확인했을 때 6점이 팔렸다.

‘그 정도는 첫 개인전이니만큼 친인척이나 지인이 사주기도 하지. 그런 줄 알았는데 완판이라고? 대체 누가 산 거야?’

“놀랍군. 그림 그리 구매는 주로 누가 했나? 친인척이 구매한 건 아니고?”

대부분의 신인화가가 첫 개인전에서 기대는 곳이 친인척이나 인맥에 의한 지인의 구매다. 지인이나 친인척이 아니면 경력도 명성도 전무한 신인화가의 개인전 전시장에 방문해서 작품을 구매할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강수는 이런 일반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강수는 부담 주기 싫다며 친인척에게 아예 초청장조차 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파악한 지인이라고 해봐야 이강수의 여자친구 김주하뿐이다. 오픈하자마자 김주하가 무언의 약속을 구매했을 때는 이강수의 여자친구인지도 몰랐다. 한 시간 전, 이강수의 부모님과 인사하며 알았다.

김주하가 구매한 그림은 4점이다.

“아닙니다. 대부분 컬렉터가 구매했고, 지인 구매는 몇 점 안 됩니다. 더구나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이 비서를 보냈지만, 완판되는 바람에 한 점도 구매하지 못했습니다.”

“서준홍 회장이!”

“예. 조금 전에 전화 왔습니다. 대체 그림이 어떻기에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완판됐는지 궁금하다며 작품의 사진 파일을 요청해서 비서에게 사진 파일을 복사해 주었거든요. 서준홍 회장은 이강수의 그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25점이 다 팔렸다고 했는데 매출이 얼마인 거야?

“사억 사천 칠백만 원입니다.”

조창석은 25점이나 되는 그림이 완판된다는 기대는 아예 재껴 놓았기 때문에 매출액 계산은 해보지 않았다.

4억 5천에 가까운 매출액에 조창석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허, 오픈하자마자 사억 사천 칠백만 원의 매출이라. 놀랄 일이군. 우리나라 화단에서 첫 개인전에서 매출액 사억 넘는 경우는 이강수가 처음이지?”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호당 가격이 워낙 높았고, 작품 크기도 전부 50호 이상이어서 사억 원이 넘을 수 있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의 조창석이 질문을 던졌다.

“장 부장, 이강수 화가가 주목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단순히 그림이 뛰어나서인가?”

“관장님도 인정하셨듯이 일단 이강수의 그림은 천재성이 엿보일 만큼 굉장히 뛰어납니다. 더구나 그림 외적인 요소가 이강수에게는 있습니다.”

“그림 외적인 요소?”

“예.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려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이강수가 원작자인 벙어리 황구 죽돌이라는 그림동화책은 영화로 제작되어 3월에 개봉해 흥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중 친화적인 작업이 이슈를 일으켜서 일반 대중에게 상당히 알려졌습니다. 오늘 오프닝에도 핑크티티 팬으로 보이는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층이 꽤 찾아와서 열심히 사진 찍었으니까요.”

“핑크티티면 차트 역주행했다는 그 걸그룹인가?”

“그렇습니다. 관장님, 다른 갤러리에서 스카우트하기 전에 이강수를 전속화가로 영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속화가 영입은 투자가 선행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특히 신인화가를 발굴, 육성해서 이익을 내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조차 없다. 그 때문에 대부분 갤러리는 신인화가는 외면하고 어느 정도 명성과 인지도가 있어서 그림 판매가 이루어지는 중견작가를 영입하려고 노력한다.

이강수는 신인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전업화가로 모셔와야 할 처지지 영입을 놓고 고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친구 재능뿐만 아니라 대중성, 스타성까지 겸비했구먼. 이건 복덩이가 넝쿨째 들어온 것이 아닌가? 장 부장. 오늘 당장 전속화가로 계약하게.”

“예. 알겠습니다.”

관장실을 나온 장영봉은 전시장으로 내려가 관람객 사이를 걸어가며 강수를 찾았다. 강수는 자기가 모르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작가!”

이강수와 만면에 미소 지으며 대화 나누던 방문객 4명이 고개를 돌려 장영봉을 쳐다보았다.

“선배님, 어서 오세요.”

“이 작가, 잠깐 면담할 수 있을까요?”

장영봉은 안면 없는 사람 앞이라 강수에게 존대했다.

“예, 선배님. 먼저 잠깐 서로 인사 나누시죠?”

“아, 그럴까요?”

강수가 장영봉을 주위에 있는 방문객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대학교 동문 선배님이고, 선암갤러리 디렉터이신 장영봉 부장님이세요. 이분들은 제가 그림책 작업하는 데 큰 힘을 보태고, 그림책을 출판해주신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 직원이세요.”

장영봉이 네 명에게 명함을 일일이 나눠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장영봉입니다. 저희 갤러리, 이 작가 전시회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승호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장 부장님이셨군요. 기획편집팀장 강승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수민입니다.”

“유가은입니다.”

“허상배라고 합니다.”

아까부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승호가 난감하다는 듯이 장영봉을 쳐다보았다.

“장 부장님, 오픈 첫날인데 그림에 빨간 딱지가 전부 붙어 있더군요. 제가 곤란해 죽겠습니다.”

“예? 곤란하시다고요? 무슨 말씀인지요?”

“사장님이 그림 한 점 구매하라고 특명을 내리셨거든요. 전시장에 와 보니 이 작가 인기가 하늘을 찔러서 기쁘긴 한데 구매할 그림이 남아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장님에게 면목이 없어 곤란하게 됐지 뭡니까?”

“하하. 저희도 이렇게 빨리 완판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작가 두 번째 개인전에서 기회를 잡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작가에게 두 번째 개인전 좀 빨리하라고 간청하는 중입니다. 그때는 오픈에 맞춰 칼같이 와서 구입하려고 합니다.”

강승호가 이강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작가님. 두 번째 개인전은 얘기한 대로 후딱 준비하셔야 합니다.”

“예. 강 팀장님. 8, 9월쯤에 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장영봉이 움찔했다.

‘두 번째 개인전을 8, 9월에 연다고?’

이강수가 두 번째 개인전을 벌써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장영봉이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혹시 다른 갤러리와 전시 계획을 잡았나 싶은 우려가 든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장영봉이 말했다.

“저, 제가 이 작가와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양해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시죠. 우린 작품 구경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가, 잠시 면담 좀 할까요?”

“예, 선배님.”

두 사람은 전시장을 나와 3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장영봉이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강승호가 언급한 두 번째 개인전에 관해 물었다.

“이 작가. 8, 9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는 게 사실인가?”

장영봉의 목소리에는 우려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예, 선배님. 전시회 끝나면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해 선배님과 상의하려고 했죠.”

잠깐이지만 내심 고민하고 있었던 장영봉이 자신과 다음 개인전을 상의하려고 했다는 말에 마음속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고 얼굴을 활짝 폈다.

“8, 9월이면 무척 빠른데 미리 작업해 놓은 작품이 있는 건가?”

“그건 아니고요. 두 주일 전부터 작업하고 있습니다.”

장영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60호, 80호 크기의 작품을 지금 같은 퀄리티로 그리려면 아무리 손이 빨라도 절대적인 작업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전시회를 9월로 잡아도 25점의 작품을 준비하려면 한 달에 최소 5점씩 그려야 한다.

간 무리가 따르는 일정 같았다.

“두 주일 전부터?”

강수는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두 번째 개인전의 컨셉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호오, 실크스크린 인쇄로 원본 하나당 열다섯 장을 인쇄해서 팝아트 양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앤디 워홀의 마돈나 같은 형식의 작품인가?”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팝아트 양식을 채용한 복제화라고 보시면 됩니다.”

“으음, 대충 감이 잡히는군. 75점이나 되는 작품을 전시하려면 전시장 1, 2층을 다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야.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 같은데? 두 주일 전부터 작업했으면 완성된 작품도 있나?”

“예. 100호 정도 되는 사이즈의 작품 ‘군마’ 4점 완성해 놓았습니다. 사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드리죠.”

“그래. 빨리 보내주게. 어떤 느낌의 작품인지 정말 궁금하군.”

문득 장영봉이 신색을 바로 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이 작가. 내가 따로 보고자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전속 문제 때문이야. 사실 늦은 감은 있지만, 자네를 우리 갤러리 전속화가로 영입하고 싶네. 혹시 다른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나?”

화가로 첫걸음을 시작했을 때 미흡한 포트폴리오를 보고도 자신에게 기회를 준 선배였다. 그때의 고마움을 보답하려고 갤러리윤의 전속화가 제안도 거절한 강수가 아닌가?

강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선암갤러리 전속화가라면 저야 물론 감사하죠.”

전시회가 끝난 후 두 번째 개인전을 자신과 상담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긍정적인 답변을 예상하였던 장영봉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 고맙네.”

“고맙긴요. 제가 장 선배님께 신세 많이 졌는걸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아닐세. 내가 해준 게 뭐 있다고. 사실 작년에 갤러리윤 소속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조금 걱정했다네. 갤러리윤에서 아트페어 상하이에 자낼 참가시킨 이유가 있을 테고, 또 출품작도 전부 팔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갤러리윤과 계약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 그러니 내가 고마울 수밖에.”

강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군요.”

“윤 관장이 비범한 사람이라 내심 불안했어. 아트페어 출품작이 5점이라 윤 관장이 좀 지켜보는 모양일세. 자, 계약서를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리게.”

“예.”

얼굴에 기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장영봉이 회의실을 나갔다.

장영봉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기운을 느낀 강수는 갤러리윤의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한 자신의 판단에 만족했다. 자신을 도와준 장영봉 선배에게 나름 보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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