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00화 (100/197)

# 10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0회

전시장을 찾아온 관람객은 강수와 주하가 나올 때보다 더 많아졌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던 김종대와 이동석은 강수와 함께 들어오는 강수 부모님을 보고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전 강수 친구 김종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전 이동석입니다.”

“강수 친구들이구나. 수고한다.”

이동석이 즉각 탄성을 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어머님, 아버님 패션이 젊은 사람 안 부러울 정도로 멋지십니다. 강수가 왜 그림을 잘 그리는지 두 분 패션을 보니 알 것 같습니다.”

이전일이 기분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래? 허허.”

“참, 어머님, 아버님. 강수 개인전 아주 대박입니다. 오픈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엄청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이러다 강수 갑부될 지도 모르겠는데요.”

“허허. 자네는 허풍이 세 구만. 그림 팔아서 무슨 갑부가 돼?”

“왜요? 아버님, 요즘은 그림 팔아서 얼마든지 갑부될 수 있습니다. 해외화가 중에 잘나가는 화가는 그림 한 점에 수십억 하거든요. 그리고 게르하르트 리히터, 로이 리히텐슈타인같이 유명한 화가는 수백억 원에 팔리기도 합니다.”

“뭐여? 수백억 원?”

이전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동석을 바라보다 강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냐, 강수야? 그림 하나에 수백억 원씩 하는 게 있어?”

“예, 아버지. 우리나라 김환기 화백 작품도 비싼 건 한 점에 수십억씩 하잖아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르하르트 리히터,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그림 한 점에 수백억 원씩 해요.”

“허허. 그림 한 점이 빌딩 한 채 가격이구나. 세상이 요지경이라더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김순옥 여사 옆에 서 있던 김주하가 이동석에게 살짝 물었다.

“동석오빠, 그림 몇 점 팔렸어요?”

“조금 전까지 열 석 점이요. 절반은 팔렸죠.”

“와, 그래요?”

강수 부모님 마중 갔다 온 사이 7점이나 더 팔렸다.

주하는 5시 30분까지 기다린 후에 안 팔린 작품은 자기가 전부 구입할 계획이었다.

‘호호. 이렇게 팔리면 내가 안 사도 완판될 수도 있잖아? 완판될지 안 될지 궁금해지네? 조금만 기다려보면 알겠지.’

기분이 좋아진 주하는 김순옥 여사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이랑 그림 감상하셔야죠?”

“그래. 우리 아들이 얼마나 멋지게 그렸는지 보고 싶구나. 여보, 여기 있을 게 아니라 강수 그림 구경하러 가요.”

“험, 그럽시다.”

주하가 김순옥 여사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수오빠, 제가 부모님 모시고 갔다 올게요.”

“그래. 수고 좀 해줘.”

“어머님.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김주하가 김순옥 여사와 전시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이전일이 따라갔다.

김종대가 강수의 어깨를 툭 쳤다.

“주하 씨와 어머님이 무척 다정해 보인다? 사이좋은 시부모와 며느리가 될 조짐이 보이는데?”

“여자 친구는 처음 소개했거든. 어머니는 며느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좋아하시겠지.”

“그러게. 어머님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이시네.”

이동석이 짓궂은 얼굴을 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흐흐. 강수하고 제수씨가 애 만들면 어떤 아이가 나올지 기대 만땅이다. 빨리 결혼해서 2세 작업해봐라, 강수야.”

“애도 좋지만 신혼 생활도 누리고, 사랑도 나눠야지 애부터 놓으라고? 그건 생각해볼 문제인데?”

송지연과 동거하고 있는 김종대가 동조했다.

“애 낳으면 신혼은 물 건너가는 거야. 동석아, 결혼하면 와이프랑 신혼 생활도 필요한 거다.”

이동석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야, 애는 빨리 낳아서 키우는 게 고생 덜 하는 거라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셨거든. 나이 먹어 애 키우겠다고 뼈 빠지게 고생하느니 일찌감치 키워놓고 여유 있는 장년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냐?”

김종대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세상은 애 낳으면 고생문 열리는 건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길 하고 있어. 안 말릴 테니까 너나 결혼하자마자 애 낳고 살아라.”

이동석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후후, 해영 씨와 결혼할 수만 있으면 애부터 낳고 만다.’

*

<2018년 홍우대를 졸업한 이강수는 작년 선암갤러리에서 기획한 단체전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신인화가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그 전시회에서 이강수의 작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강수가 출품한 작품은 눈물, 초대, 도시의 일몰 단 세 점에 불과했지만, 각각의 그림이 주는 정서적인 울림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림 석 점을 감상한 나는 단번에 대형 신인화가가 우리 화단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강수 화가의 첫 개인전 작품 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강수 화가의 개인전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강수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이강수 화가의 그림이 주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인물의 풍부한 감정의 표현,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평이한 구도와 구성, 색채의 깊은 밀도 등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천의무봉 같은 자유로운 선의 흐름과 색의 본질을 통달한 듯이 캔버스 위에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색감이다.

이강수는 강원도 양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우대에서 수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서울에서 보냈던 몇 년의 삶을 25점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천루가 즐비한 서울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시간과 공간, 그 보편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화가의 깊은 감성과 놀라운 색채 감각으로 화폭 위에 옮겨놓았다.

갈림길, 무언의 약속, 신촌역사, 벤치와 여인, 목련 피고 까치 울던 날 공터에서, 지는 해와 한강 철교 사이 등 그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림 속 시간과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지고, 화폭 안에 들어가 화가가 보여주는 일상의 단면을 경험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사람마다 인생은 종국에 이르면 하나의 현란한 지도가 된다. 단 한 사람의 지도를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온갖 색깔을 섞고 갖가지 모양으로 빚어도 그림 몇 점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하지만 이강수의 그림에는 따뜻한 이야기와 일상 속에 담긴 비범한 인생이 그림 한 점 한 점에 담겨있다. 이강수는 그림을 통해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나의 친숙하고 익숙한 일상을 되돌아보라고 한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간과 공간이지만 그런 과거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힘을 얻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덜컹! 덜컹!

“이번에 내리실 역은 종로 3가입니다.......”

지하철 전동차 스피커에서 안내 멘트가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서울의 삶, 그 인상’ 팜플렛에 실린 최이석 비평가의 작품 평을 읽고 있던 박연경이 고개를 들었다.

‘작년 한국청년화가 12인전도 그렇고, 최이석 평론가는 이강수 화가한테 무척 호의적이구나. 이강수 화가의 작품이 그만큼 괜찮다는 건가? 그나저나 유라 요것이 오늘 월차를 내? 설마 이강수 전시 오프닝에 가려고 월차 낸 건 아니겠지?’

소중한 월차를 이강수 개인전 오프닝에 투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좀 웃겼다. 전시장은 주말에 시간 내서 관람할 수 있다. 소중한 월차를 써서 오프닝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연경이 팜플렛을 핸드백에 넣고 전동차에서 나와 지상으로 올라갔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택시 승차장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인사동 거리는 차 없는 거리였기 때문에 택시를 타도 선암갤러리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조금 서두르면 십오 분이면 가지 않을까?’

박연경이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투피스 정장에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서는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선암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는 마음과는 다르게 거의 20분이 흐른 뒤였다.

몸에서 나는 열기를 느끼며 전시장에 들어선 박연경은 꽤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이는 전시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이 뒷골을 스쳤다.

“어서 오세요. 이강수 화가에게 격려의 방명록 부탁합니다.”

앞에서 팜플렛을 건네주는 전시도우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먼저 전시장 둘러보고 올게요.”

황급히 그림 앞으로 걸어간 박연경은 그림은 안중에 없고 명판부터 확인했다. 디스플레이 된 다섯 작품에 전부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어머, 다 팔렸어!’

다급하게 전시장을 한 바퀴 돈 박연경은 약간 안도하며 아직 팔리지 않은 세 점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가격과 캔버스 사이즈를 적어 서준홍 회장에게 보냈다. 오직 세 작품만 남았다는 문구도 잊지 않았다.

‘어휴, 석 점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근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시간을 보니 오픈한 지 고작 1시간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완판에 가까운 성적을 낸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많은 화가가 개인전을 열지만 대부분 전시기간이 끝나도록 몇 작품 팔지 못하고 짐을 싼다. 개인전할 때마다 이렇게 완판된다면 배고픈 예술가란 말이 회자될 일 없을 것이다.

‘왜 연락이 안 오지?’

박연경은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2분이 흘렀을 뿐인데 남은 세 작품마저 팔려나갈까 봐 괜히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오픈한지 1시간 30분 만에 22점이 팔렸다. 남은 3점도 당장 누군가 선점할 수 있었다.

띠링!

마침내 서준홍 회장의 문자가 왔다.

-‘목련 피고 까치 울던 날 공터에서’라는 작품을 구매하게나.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낸 박연경은 사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또각! 또각! 또각!

복도에서 울리는 구두 소리가 박연경의 조급한 마음을 알려주었다. 박연경이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고 안에서 오피스룩 스타일의 옷차림을 한 여성이 나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 예?”

사무적인 인사를 한 여성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선암갤러리 여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의 뒷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박연경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입구에서 가까운 책상에 있는 화장을 짙게 한 여직원에게 물었다.

“실례해요. 장영봉 부장님이 어떤 분이죠?”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이강수 화가 그림 구매하려고요.”

여직원이 대각선에 위치한 창가의 소파를 가리켰다.

“저쪽 소파에 앉아계신 남자분이세요.”

여직원이 가리킨 남자를 쳐다본 박연경이 미간을 좁혔다. 장영봉은 맞은편에 앉은 여성과 면담 중이었다.

‘그림 구매하는 걸까?

만약 그림 구매하는 손님이라면 ‘목련 피고 까치 울던 날 공터에서’ 만큼은 구매하지 않기를 바랐다.

박연경이 소파로 다가갔다.

마침, 장영봉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맞은편의 여성도 일어나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박연경이 재빨리 여성의 외모와 옷차림을 스캔했다.

여성은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샤넬 핸드백을 들었고 심플한 투피스 정장을 입었다.

신유라보다 키가 조금 작긴 했지만, 미모나 몸매는 신유라에 뒤지지 않았다. 키가 큰 신유라가 모델이라면 눈앞의 여성은 연예인 분위기가 났다.

외모나 입은 옷, 손에 든 샤넬 핸드백으로 미루어보면 돈을 우습게 아는 부류가 틀림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영봉이 박연경을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이강수 화가의 ‘목련 피고 까치 울던 날 공터에서’라는 작품을 구매하고 싶은데요.”

“아!”

장영봉이 탄식과 함께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강수 화가의 작품은 완판되었습니다.”

박연경이 눈살을 와락 구겼다.

“무슨 소리죠? 그 작품이 팔리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왔는데요?”

“죄송합니다. 스티커를 붙이러 조금 전에 직원이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스티커가 붙어 있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 세 작품이 팔리지 않았는데 몇 분 사이에 전부 팔렸다는 말인가요?”

“예. 손님이 오시기 전에 남아있던 세 그림이 마저 팔렸습니다.”

“혹시 방금 나간 여성이 샀나요?”

“죄송합니다. 구매자의 신상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아마도 방금 나간 여성이 구입했을 것이다. 황당하고 짜증 났지만 완판되었다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았어요.”

미간을 찡그린 채 밖으로 나온 박연경이 답답한 심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서준홍 회장에게 완판되어 그림을 구매하지 못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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