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2회
*
열흘 뒤, 11월 2일.
계절은 어느덧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늦가을의 기운이 남아 있는 파란 하늘은 깊고 짙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선선해진 새벽 북한산에 올라 마나회로 수련을 끝낸 강수는 돈암동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작업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간 강수는 어느 정도 정리된 작업실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강수는 칸막이 공사를 하지 않고 책장 10개를 이용해 사무실을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었다. 작업실 중앙에 가로, 세로, 깊이가 80cm*2m*25cm짜리인 책장 2개를 맞붙여서 1조로 만들어 5조를 늘어놓은 것이다. 그 때문에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두 공간이 개방되어 한 눈에 다 보였다.
탕비실이 있는 왼쪽 공간은 창가에 책상과 컴퓨터를 놓았고, 손님 접대용 긴 탁자와 의자 6개, 소파 등을 배치했다. 그리고 왼쪽 벽에는 네 개의 칸막이를 설치해서 다섯 개의 미니 부스를 만들었다. 미니 부스 하나는 창고로 쓰고, 나머지는 완성한 그림을 걸어놓기 위함이다. 캔버스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니 부스 한 곳에 대략 20점의 작품을 걸어 놓을 수 있었다.
작업실의 절반을 차지하는 오른쪽은 작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200호나 300호 같이 대형 작품을 작업할 때 사용하기 위해 오른쪽 벽은 그대로 두었다.
이렇게 꾸몄어도 작업실이 워낙 넓어서 썰렁했다.
강수는 책장에 놓아둔 카메라를 챙겨서 이젤 앞으로 걸어갔다. 어젯밤에 완성한 핑크티티 인물화의 사진을 찍어서 매니저 오태근에게 보내줄 참이었다.
어젯밤에 사진을 찍어서 보내지 않은 이유는 늦은 밤 조명 아래서 사진을 찍으면 원화의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를 올려 광량을 충분히 확보하고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컴퓨터를 켜고 찍은 사진을 전부 컴퓨터로 전송했다. 수십 장의 사진을 검토한 강수는 원화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린 4장의 사진을 골라서 핑크티티의 매니저 오태근의 이메일로 사진 파일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오태근에게 사진 파일을 보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오태근의 답장이 왔다. 행사 끝나면 사무실 가서 확인하겠다는 문자였다.
“아, 드디어 끝났다!”
3주라는 꽤 긴 시간을 투자해서 핑크티티의 20호 인물화 4점을 완성했다.
가슴이 뿌듯한 한편 핑크티티 인물화가 홍보 효과를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설레기도 했다.
핑크티티의 웃어봐는 그사이 음원 차트에서 70위권으로 상승했다.
한 번 이슈가 되자 많은 사람이 웃어봐와 세나의 인물화가 팍팍한 세상살이에 웃음과 위로를 준다는 소감 글을 카페나 블로그, 포털 사이트에 올렸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핑크티티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강수가 그린 세나의 인물화가 주목받으면서 덩달아 강수의 이름도 심심찮게 포털 사이트에 노출되었다.
또한 주간 ‘나우 서울’에 실린 ‘아트페어 상하이 관람기’라는 기사에서 미술계에 박해나 급 블루칩 기대주가 등장했다며 강수를 다루었고, 미술계에 강수의 존재감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비록 강수는 대중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미술계와 핑크티티 팬카페에서 꽤 알려진 신인화가가 되어 있었다.
강수는 핑크티티 인물화를 미니 부스처럼 만들어 놓은 칸막이벽에 하나씩 걸어 놓았다. 이 미니 부스에는 포트폴리오에 있었던 15개의 작품 가운데 10점과 눈물, 핑크티티 멤버 5명의 인물화까지 총 16점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강수는 포트폴리오의 나머지 10개 작품 가운데 개인전에 쓸 6점을 정해 놓았다. 이 6점 외에 그동안 개인전을 위해 스케치해 놓은 그림이 스케치북에 12개가 있었다.
‘총 18개. 5개 정도만 더 스케치하면 개인전을 열 수 있겠다. 요즘 그림 그리는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23점 정도는 6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빨리 그리면 내년 4월이나 5월에 개인전을 개최할 수 있겠구나. 일단 장 선배하고 통화를 해봐야겠구나.’
국내 최고의 유명 갤러리 같은 경우 연간 전시 계획이 다 짜여 있는 경우도 많고, 인지도 있는 갤러리도 몇 개월씩 전시 계획이 잡혀 있다. 첫 개인전을 빨리 개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강수는 속도를 내기 위해서라도 날짜를 정해 놓기로 마음먹었다.
강수는 장영봉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끊기고 스마트폰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작가,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예, 선배님. 잘 지냈습니다. 진작에 연락드려야 했는데 제가 정신이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전화한다면서 깜박했어. 늦었지만 아트페어 상하이에서 작품 완판된 것 축하하네. 그리고 개인전 작품은 준비하고 있는 건가?]
“예, 선배님. 그렇지 않아도 개인전 개최 날짜 문의하러 전화했습니다. 저는 내년 사오 월쯤 작품을 완성할 것 같은데 그때 갤러리가 비어있을까요?”
[잠깐만, 내년 사오 월이면··· 삼월 넷째 주하고 사월이 비어있어. 그때로 예약해 놓을까?]
“네. 사월 첫째 주로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알았네. 드디어 우리 이 작가가 내년 봄에 첫 개인전을 열게 됐군. 그리고 보면 이 작가의 작품을 첫눈에 알아본 최이석 평론가의 안목이 정확한 거 같네.]
“그분이 좋게 평해 주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참, 2주 뒤에 내 동기인 윤창수 개인전이 열리는데 시간 나면 한번 들리게. 소개해 줄 테니까. 오프닝에 오면 더 좋고.]
“아, 윤창수 선배님 개인전이 열리는군요. 친구들이랑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전시장에서 보세.]
“예, 선배님. 들어가십시오.”
‘창수 선배가 또 개인전을 여는구나. 작품 활동 열심히 하시네.’
윤창수는 홍우대 95학번으로 학부 시절 각종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유망주였다. 강수가 홍우대에 입학했을 때 윤창수는 이미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선배였다.
2년 전부터 해외에 나가 작품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데 국내 전시를 기획한 모양이었다.
‘친구들이랑 꼭 가봐야겠구나. 일단 김대풍 어르신 초상화부터 끝내자.’
강수는 벽에 세워 놓은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 3점을 캔버스를 걸었다.
핑크티티 인물화와 동시에 작업을 해서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 3점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열흘 정도면 완성할 수 있겠군.’
각각의 캔버스에는 열정이 끓어오르고, 패기 넘치는 청년의 얼굴, 자신감과 확신에 찬 중후한 중년의 얼굴, 여유 있는 미소와 너그러운 표정의 노년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이제 마무리 채색을 해보자.’
강수는 붓을 들고 청년 초상화부터 채색을 시작했다. 채색에 열중하던 강수는 스마트폰의 진동을 듣고 붓질을 멈췄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채색한 지 4시간이나 흘렀다.
‘시간 빠르군.’
스마트폰을 살펴보니 여러 통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오태근: 행사 끝나고 사무실 들어와서 보내준 그림 확인했습니다. 애들이 그림 보고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뜁니다. 조만간 시간 내서 연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영: 그림이 너무너무 이뻐요. 고마워용!
-소냐: 예쁘게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린: 캭! 환상적이다. 그림이 튀어나올 것 같아. 개쩔어.
-진하: 와, 이 그림 나 맞아요? 원화 보고 싶어요. 보여주면 안 돼요?
-세나: 전 세나예요. 절 제일 먼저 그려주셨는데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강수오빠 덕분에 우리 노래가 음원 차트에도 진입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에요. 지금 태근오빠가 팬카페에 사진 올리고 있어요. 그림이 전부 색다르고 개성이 뚜렷해서 팬 반응이 엄청날 것 같아요. 너무 고맙습니다. 나중에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강수가 보낸 사진을 보고 오태근과 핑크티티 멤버가 일제히 문자를 날린 것이다. 강수는 오태근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핑크티티 멤버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 없어서 일괄적으로 보냈다.
-노래 실력 뛰어나고, 가창력도 짱 핑크티티!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걸그룹이 되세요. 파이팅!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
-지영: ㅋㅋㅋㅋ. 오빠, 멋쟁이!
-소냐: ··· 네.
-서린: 악! 오빠, 너무했다! 힝, 그림 때문에 봐줘야지.
-진하: 원화 안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세나: ㅎㅎ. 강수오빠도 파이팅!
강수는 다시 일괄적으로 답장을 보냈다.
-개인이 아니라 핑크티티한테 보냈어요. 이해해 주리라 믿어요. 난 그림 그릴 게 있어서 바쁘답니다. 핑크티티도 열일 하길 바래요.
-지영: 넹, 멋쟁이 오빠, 수거여.
-소냐: 네.
-서린: 캬아, 쿨하다. 태근오빠가 강수오빠 엄청 상남자라고 했거든요. 얼굴 보고 싶어지네?
-진하: 원화 보러 찾아가도 되는 거죠? 어디로 가면 되는지 제발 알려주세요.
-세나: 네, 오빠도 수고하세요.
‘진하는 원화를 보고 싶은 모양인데···.’
강수는 원화를 보고 싶다는 진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긴 돈암동인데 나중에 초대할 테니까 그때 볼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빨리 초대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문자를 끝낸 강수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찍힌 핑크티티 멤버들의 전화번호를 보며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본의 아니게 걸그룹 개개인의 전화번호를 보유한 것이다.
‘그래 봐야 별 의미는 없다만···.’
강수는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다시 채색 작업을 시작했다.
*
핑크티티 멤버 지영과 친구인 대학 3학년 권수민은 핑크티티 팬카페의 회원이다. 지영과는 중학교 때 단짝이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지영이 걸그룹 연습생이 되어 진로를 바꾸면서 각자의 길을 갔다.
하지만 서로 바빠 만나지 못할 뿐 지금도 카톡으로 연락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집에 들어온 권수민은 습관처럼 핑크티티 팬카페에 접속했다.
요즘 팬카페에 접속하는 재미가 남달랐다.
고작 한 달 사이에 회원 수가 두 배가 넘게 늘었고, 독특하고 매력적인 세나의 인물화가 이슈 되면서 카페가 활성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게시글에 링크한 웃어봐가 놀랍게도 음원 차트에 진입해서 성적을 내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세나 외에 다른 멤버들의 인물화도 팬카페에 올려 주면 좋겠다고 몇 번 댓글을 달았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권수민은 팬카페를 클릭했다.
“캬아, 떴다!”
메인 화면에 뜬 핑크티티 다섯 멤버들의 인물화를 본 수민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네 명의 멤버 인물화가 화면 상단에 기존의 사진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와, 엄청 섹시하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배경으로 지영이 육감적인 미소와 매혹적인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권수민의 동생 권예인이 들어왔다.
“언니, 무슨 일 있어? 웬 비명?”
“응, 드디어 지영이 인물화도 팬카페에 올라왔거든.”
“뭐어, 고작 그런 걸로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피운 거였어? 정말 어이없다.”
“잔소리 말고 그림이나 봐. 안 볼 거면 문 닫고 나가고.”
“참나, 지영 언니 그림이 어떤데?”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던 권예인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 32인치 모니터에 가득 찬 그림에 시선을 주었다.
“이게 지영 언니?”
“어때? 그림이 엄청 신박하지?”
“와우, 그러네. 사진으로 보는 거 하고 느낌이 완전히 달라. 신기한데?”
“세나가 초상화 때문에 갑자기 떴는데 지영이도 뜰 수 있게 SNS에도 올리고 친구들한테 전부 보내려고. 아, 너도 네 친구들한테 좀 지영이 그림 파일 보내서 여기저기 퍼트리라고 해봐.”
“됐네요. 난 내년이면 고3이라고. 언니나 열심히 하셔.”
권예인이 재빨리 밖으로 걸어갔다. 권수민이 동생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야,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지영이가 뜨면 좋잖아.”
“오 년씩이나 무명인데 그깟 그림 하나로 행여나 뜨겠다. 꿈 깨셔.”
“세나가 뜨고 있거든. 지영이도 뜰 수 있어. 치, 기집애 하곤.”
권수민은 속으로 투덜대며 친구와 학교 동기, 선후배에게 지영의 그림 파일을 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