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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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토요일.
“우와, 무슨 작업실이 이렇게 넓어?”
큼지막한 화장지를 들고 강수의 작업실에 찾아온 이동석이 입을 쩍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음료수 박스를 들고 온 종대와 화분을 가져온 장범일도 눈을 부릅뜨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동석은 강수와 비슷한 키에 긴 머리카락을 묶어서 뒤로 넘겼고, 검정 바지, 체크 셔츠에 콤비 상의를 걸쳤다.
장범일은 직장인답게 정장을 입었고, 종대는 밤색 면바지, 상의는 니트에 셔츠를 받쳐입었다.
“작업실 얻었다기에 칠팔 평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냐? 강수야, 형님이 심히 당황스럽다.”
이동석이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아, 로또 맞았구나! 그렇지? 설마 1등 맞은 거냐?”
종대와 장범일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강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로또는 무슨. 로또 좀 당첨돼 봤으면 원이 없겠다.”
“로또 아녔어?”
“이 정도 넓이면 월세가 최소 백오십은 되겠는데? 너 월세를 어떻게 부담하려고 이런 작업실을 얻었냐?”
장범일의 말에 종대가 동조했다.
“그래. 아무리 못해도 월세가 백오십은 할 거 같다. 그렇지 강수야?”
종대의 질문에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했다.
“이 작업실, 월세 오십만 원짜리야.”
“오, 오십만 원?
“잠깐, 그럼 보증금이 일억이 넘는다는 얘기인데?”
강수가 속으로 혀를 찼다.
‘허, 월세가 싸면 보증금이 일억이 넘는구나?’
“야, 일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나한테 그런 거금이 어디 있냐? 보증금은 오백만 원이다.”
이동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뭐야! 강수야,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이 사무실 어떻게 얻게 된 건지 확실하게 말해 봐라.”
어차피 친구들이 알아야 할 일이었다. 일단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별거 아냐. 그냥 여기 건물주하고 좀 친해. 그래서 작업 열심히 하라고 헐값에 임대해준 거야.”
“아는 사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런 인맥이 생겼냐?”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보고하고 다니랴?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음료수 마실래? 차 마실래?”
“시원한 음료수나 가져와라.”
“그래.”
강수는 탕비실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소파에 앉았다.
이동석이 캔 음료를 받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건물주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냐? 나한테도 소개 좀 해줄래. 건물주한테 잘 보여서 나도 헐값에 임차 좀 해보게.”
강수가 피식 웃었다.
“소개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아니, 조만간 만날 기회가 생길 거다.”
“오, 그래? 건물주하고 만날 때 꼭 좀 불러줘라. 반지하에서 탈출하고 싶다.”
장범일이 이동석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하는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어. 인마, 건물주가 널 언제 봤다고 헐값에 사무실을 내주겠냐? 말이 되는 얘길 해라.”
“자식아, 그러니까 안면 트려는 거 아니냐. 누군지 알아 둬야 빌붙어보기라도 하지.”
캔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종대가 미니 부스를 가리켰다.
“야, 작품을 저렇게 걸어 놓을 수 있고. 이거 호화판 작업실이네. 작품 좀 보자.”
종대와 동석, 범일이 작품이 걸려 있는 미니 부스로 갔다.
“어, 이건 핑크티티 팬카페에 있는 세나네. 여기 인물화 전부 핑크티티 멤버들이냐?”
“맞아. 핑크티티 매니저가 부탁해서 그려줬어. 너희들이 보기에 어때? 핑크티티 인물화 괜찮냐?”
“인물들의 표정도 좋고, 색감 죽여준다. 완전히 끝내주네. 내가 볼 때 앤디 워홀의 200억 원짜리 자화상보다 나은 거 같다.”
강수가 장범일의 실없는 농담에 가볍게 웃었다.
“뭐? 하하. 농담이 지나치다. 아무렴 그 비싼 자화상에 내 그림을 어떻게 비교하냐?”
“아니지. 냉철하게 회화적 요소와 작품성으로 평가하면 네 그림을 떠나서 회화로 그린 초상화가 더 낫다고 봐.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한 자화상은 팝아트라는 시대적, 역사적, 장르적 가치가 매겨진 작품이지 회화적 완성도는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
김종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실크스크린 인쇄로 공장에서 물건 생산하듯 찍어낼 수 있는 그림에 무슨 대단한 예술적 가치가 있겠어. 대중적, 상업적 가치만 극대화된 팝아트 작품은 거품이 심한 것 같긴 해.”
팝아트는 관심 밖인 듯 이동식은 핑크티티 인물화와 포트폴리오에 있는 과거의 그림을 번갈아 살펴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햐, 이거 봐라. 학부 시절에 그렸던 그림하고 구도나 발색이 완전히 다르잖아. 색 표현력이 어떻게 갑자기 일취월장할 수가 있지? 놀랍다, 놀라워.”
장범일도 그림을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그러네. 같이 놓고 보니까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정말 색깔에 대한 해석이나 표현이 엄청나게 발전했어.”
강수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작품과 비교하면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비범한 능력을 바탕으로 그린 핑크티티의 인물화다. 회화를 공부한 친구들이 그 차이를 모를 수가 없다.
‘자식들, 역시 보는 눈은 있군.’
강수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볼 것도 없는 작업실이지만 구경 다 했으면 나가서 저녁 먹으러 가자. 여기 먹을 데 많더라.”
“그럴까?”
“먹는 것이야말로 요즘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강수야, 맛있는 것 좀 사라.”
“뭐 먹고 싶은지 말해. 얼마든지 사 줄 테니까.”
이동석이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강수를 금붕어처럼 눈을 끔벅이며 바라보았다.
“으음, 너무 변했다. 옛날의 이강수가 아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말이 있는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김종대가 이동석을 타박했다.
“인마,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는데 헛소리 좀 그만해라. 넌 밥 사 주면 맛있게 먹기나 해.”
“알았어. 강수야, 먹고 싶은 거 사준다고 했지? 노르웨이산 연어회나 킹크랩이 당기는데 갈만한 곳 있냐?
“노르웨이산 연어회 하는 음식점은 모르겠고, 킹크랩 파는 집은 한 군데 있다. 거기로 갈까?”
종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올 초 아파트를 얻으며 은행에서 받은 융자금이 많고, 일러스트를 그만두고 전업화가로 진로를 바꾸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강수의 사정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종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명이 킹크랩 요리 집 가면 가격이 꽤 나올 텐데 괜찮겠어? 족발이나 보쌈도 괜찮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라.”
종대의 속마음을 모르는 이동석이 종대에게 핀잔을 주었다.
“넌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한 작품이 완판되었으면 돈 좀 벌었을 텐데 킹크랩 한번 못 사겠어? 그렇지 않냐, 강수야?”
“하하. 동석이 말이 맞아. 돈 좀 벌었지. 킹크랩은 너희들이 먹고 싶은 만큼 사줄 수 있으니까 킹크랩 집으로 가자.”
“으하하, 잘나가는 친구 둔 덕에 킹크랩 배터지게 먹는 날도 오는구나. 가자, 가.”
친구들과 작업실 밖으로 나온 강수는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대게 집으로 갔다.
종대는 강수를 따라가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강수는 계획적으로 돈을 관리해 왔고, 절대 사치하거나 기분을 내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게 집으로 들어간 강수는 4kg짜리 킹크랩 2마리와 7만 원대 화이트 와인을 시켰다.
이동석의 입이 찢어지면서 괴소를 흘렸다.
“으히히히. 4kg짜리 킹크랩 두 마리에 화이트 와인이라니! 강수가 오늘 화끈하게 쏘는구나!”
김종대도 강수가 한턱 내려 한다는 걸 알았는지 음식 값에 대한 걱정을 접고 입을 열었다.
“강수야, 윤창수 선배 개인전 열리는 소식 들었냐?”
“어, 알아. 며칠 전에 내 개인전 일정 때문에 장 선배하고 통화했는데 그때 들었어. 18일 오프닝 때 오라고 하더라. 갈 거면 다같이 가자.”
“그래. 가야지. 이번에 어떤 작품을 가지고 왔는지 궁금하다. 아, 근데 넌 개인전 일정 잡은 거냐?”
“어. 내년 4월 첫째 주에 예약했다. 너는 일정 잡았어?”
“응, 난 3월이다.”
문득 이동석의 입가에서 미소가 희미해졌다.
개인전을 내년 봄에 차례로 개최한다는 강수와 종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동석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너희들은 잘나가는구나. 부럽다. 내 그림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지. 개인전 열 돈도 없고, 이젠 슬슬 지치는 거 같다.”
강수가 옆에 앉은, 얼굴에 그늘이 진 이동석을 바라보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도 항상 낙천적이고 쾌활한 친구였다. 자신처럼 생활고에 찌들려도 꿋꿋하게 알바하면서 학교를 졸업했다. 그림에 재능도 있어서 한때는 이동석의 작품을 보며 감각적인 색 표현에 감탄하곤 했었다.
이동석은 분명히 예술적인 감각과 재능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워도 참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으면 훌륭한 화가가 될 재목이었다.
장범일이 한 마디 던졌다.
“인마, 너답지 않게 갑자기 풀이 죽어서 그래? 졸업한 지 삼 년도 안 된 주제에 말이야. 너보다 더 비참하게 사는 선배들 봐라. 그래도 인내하면서 작품 하잖아. 전업 작가 길을 가려면 적어도 십 년은 구른 다음에 그런 얘기해라.”
이동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말이 맞긴 한데 팔리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 예술을 한다는 게 쉽지 않구나.”
강수가 이동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기죽을 거 없어. 동석아, 난 네 그림 좋더라.”
“어? 정말이냐?”
“정말이고 말고. 학부 시절에 난 네 예술적 감수성을 부러워했었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난 기교는 인정받았지만, 예술성은 꽝이었잖냐. 오죽했으면 3학년에 복학하고 나서 일찌감치 일러스트로 방향을 틀었을까.”
이동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학부 시절엔 자신만만했었지. 졸업하고 나니 이건 뭐, 앞이 안 보이네.”
장범일이 질책하듯 말했다.
“괜히 배고픈 예술가라는 말이 나왔겠냐? 성공의 열매를 따기 전까진 삶이 비루하고 비참해도 참고 인내하는 수밖에 없어. 물론 그러다 끝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게 두려우면 당장 미술 때려치워라. 전업 작가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우니까 말이야.”
“동석아, 난 네가 그림을 계속하기를 바래. 지금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 몰라도 네 작품 세계를 꾸준하게 구축해 나가면 김동유 선생님처럼 언젠가 인정받을 날이 오지 않겠냐?”
강수의 말에 이동석이 한숨을 내쉬더니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김동유 화백님···. 2006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현존하는 한국 화가로는 최고의 금액에 작품이 낙찰돼 하루 아침에 스타 작가가 되었지. 후후. 정말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가난한 무명작가로 삶을 견딘 김동유 화백님이야말로 스타 탄생의 주인공이었지. 무명 화가에겐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기도 하고···.”
종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강수 말에 동감이다. 넌 그림에 재능이 있어. 네가 그리는 한국적 이미지의 추상표현 미술은 너만의 색깔과 스타일이 보이고 있어. 네 그림을 포기하지 않으면 김동유 화백님이나 강형구 화백님처럼 빛을 볼 수 있을 거야.”
강수와 종대의 칭찬과 격려, 긍정적인 말에 시무룩해서 있던 이동석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급기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 너희들 말을 들으니 나가야 할 길이 보인다. 킹크랩 먹고 힘내서 그려야지.”
“하하. 자식이 이제 원래대로 돌아왔네.”
이때, 홀서빙이 껍데기가 분홍색으로 변한 킹크랩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네 명 앞에 큼지막한 킹크랩 두 마리가 놓였다.
“캬, 겁나 맛있겠다.”
강수가 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었다.
“입가심으로 와인 한 잔씩 들자.”
이동석이 와인 잔을 들며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건배하지. 종대와 강수의 개인전 성공과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산뜻한 화이트 와인으로 입안을 축인 강수 일행이 본격적으로 킹크랩을 시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