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71화 (71/197)

# 7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1회

*

돈암동 대로변에서 안으로 한 블록 들어간 골목길에 위치한 5층 건물 입구에 자주색의 랜드로버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섰다.

랜드로버에서 강수와 주하가 내렸고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강수와 주하는 피자를 먹고 곧장 바로 돈암동으로 달려온 것이다.

“지상 주차장도 있고 건물 좋다.”

“건평은 250평 정도라 지상 주차장이 10면 있어요. 나중에 구경하고 얼른 사무실로 올라가요.”

사무실을 빨리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주하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강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강수와 주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은 505호이고 복도 끝에 있었다.

주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 소파와 오른쪽 구석에 서 있는 에어컨 외에는 완전히 비어 있는, 확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소파 외에 사무용 가구나 파티션이 되어 있지 않아서 실내 공간이 더욱 넓어 보였다.

“와, 뭐 이렇게 넓어?”

“이 정도면 작업하는 데 문제 없죠?”

“그럼. 200호, 300호짜리 몇 개라도 작업할 수 있겠다. 마음에 든다. 좋아, 계약서 가져와. 당장 계약하자.”

“큭큭, 알았어요. 해영 언니가 가져올 거예요.”

이때, 문이 열리고, 임해영이 파일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언니, 마침 잘 왔어요. 계약서요.”

“여기요.”

임해영이 건네준 파일를 받은 주하가 소파로 걸어갔다.

“오빠, 여기 앉아요.”

파일에서 상가임대차계약서를 꺼낸 주하는 능숙하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강수오빠, 임대 기간은 5년이 보장되니까 5년으로 할 건데 상관없죠?”

“그래, 5년으로 하면 고맙지.”

“그럼 임대 기간 5년, 보증금은 오백, 임대료는 월말에 월 50만 원을 정해진 통장에 입금하기로 한다. 이천이십년 시월 십구일. 임대자 김주하. 임차인란에 오빠도 사인해요.”

계약서를 작성한 주하가 펜과 계약서를 강수에게 밀었다.

계약서를 대충 훑어본 강수가 이름을 적고, 사인을 했다. 기본적인 임대차계약 외에 부가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살펴볼 내용이 없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강수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보증금 부쳐줄게.”

강수는 폰뱅킹으로 오백만 원을 계약서상의 주하 계좌로 이체하고 계약서 한 부를 챙겼다.

강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하야, 고마워. 사무실 잘 쓸게.”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강수의 말이 무척 다정하게 들렸다. 강수의 다정한 말소리에 주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강수오빠가 여기서 훌륭한 작품 많이 그리면 좋겠어요.”

“물론이지. 아트페어 상하이에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서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거든. 이렇게 훌륭한 작업실이 생겼으니 원 없이 그려야지. 그나저나 이렇게 넓은 작업실을 꾸미는 것도 일이다. 책상, 컴퓨터도 들여야 하고, 친구들도 불러서 작업실 자랑도 해야 하고, 당분간 바쁘게 생겼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아파트에서 화구라도 옮겨와야겠다.”

“오빠, 제가 도와줄까요?”

“어, 그러면 좋지.”

“헤헤. 그럼 도와줄게요.”

임해영과 주하는 강수와 함께 아파트로 돌아가서 이젤과 캔버스, 물감, 붓, 물통 등 각종 화구를 챙겨서 작업실로 옮겨 주었다.

임해영이 이젤에 걸린 핑크티티의 미완성 인물화를 살펴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와, 아직 완성된 거 같지도 않은데 그림 좋은데요. 멤버마다 개성이 뚜렷하게 살아 있어요.”

주하도 인물화를 구경하면서 동감을 표시했다.

“진짜 예쁘다. 배경색이 전부 달라서 개성이 더 잘 드러난 거 같아요.”

“하하.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칭찬이 너무 과하군요. 이거 은근히 부담되네요?”

임해영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라 주하 아가씨도 좋다고 하잖아요. 빈말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주하 아가씨?”

“그럼요. 제가 그림 보는 조예는 깊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수집한 그림들처럼 오빠 그림은 뭔가 달라요. 뭐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 칭찬이 나한테는 잘 그리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구나. 알았다. 열심히 그릴게. 그리고 주하야, 화구 옮기느라 수고했어. 해영 씨도 고생했습니다. 주하야, 다음에 맛있는 것 살게.”

주하가 눈빛을 반짝이며 옆에 서 있는 강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주하와 눈이 마주친 강수는 주하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가슴이 한차례 두근두근 뛰었다. 아마도 임해영만 없었으면 촉촉한 입술을 훔쳤을지도 몰랐다. 임해영이란 존재가 강수와 주하의 진도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기왕이면 날짜도 정해요. 언제 사 줄래요?”

“으응? 그,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 주하가 정해.”

“그럼 날 잡아서 전화할게요.”

“그렇게 해. 난 이제 작업 좀 해야 하는데 주하는 뭐 할래?”

“저녁에 친구들 보기로 해서 만나러 가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그래.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 잘 가.”

주하가 돌아간 뒤 강수는 창가로 가서 팔짱을 끼고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문득, 강수가 실소를 짓고 중얼거렸다.

“후후, 아무리 비어있는 사무실이라고 해도 이렇게 헐값일 리가 없지.”

강수는 자신에게 향한 주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호의만으로 돈암동 번화가에 있는 번듯한 사무실을 헐값에 내줄 리 없지 않은가?

사실 주하와는 때때로 서로의 마음을 교감하고 있었다. 다만 임해영이 옆에 있어 스킨십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없을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안전장치처럼 임해영이 주하의 옆에 있어서 오히려 과속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애는 조금 천천히 해도 된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한 명의 작가로서 대중과 평단의 인정받고 명성을 얻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주하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정식으로 프러포즈 하고 사귀면 된다.

생각을 접은 강수는 창가에서 물러나와 캔버스를 훑었다.

어제 지영과 소냐의 인물화에 물감을 칠해 놓았다. 오늘은 서린과 진하의 인물화에 채색할 차례였다.

띠링!

이때, 알림음이 울려서 살펴보니 통장에 1,98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람이었다. 송금한 데는 갤러리윤이었다.

‘아, 완판됐구나!’

송금액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전부 팔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우웅!

스마트폰이 울려서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김이라였다.

‘김 실장님이네.’

“안녕하세요? 실장님. 이강수입니다. 잘 들어오셨나요?”

[네. 입국은 어제 잘했는데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전화가 늦었네요. 이 작가님 작품은 완판되었고요, 대금은 방금 입금했어요.]

“방금 입금액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외로 들고 나간 이 작가님 작품이 전부 팔려서 우리가 더 고맙죠. 그리고 기획 전시 계획이 잡히면 연락하겠어요. 그때도 이 작가님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예.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연락 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들어가세요.]

“네.”

전화를 끊은 강수는 괜히 허파가 간질거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강수는 마음껏 웃었다.

이번 달만 통장에 입금된 돈이 5천만 원이 넘었다. 부모님에게 쓴 돈이 1,000만 원 정도지만 그래도 통장에는 아직 5천만 원이 넘게 남았다.

앞으로 수입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인세밖에 없지만, 개인전을 열 때까지 쓰기에는 풍족한 자금이었다.

‘작업실 이전 비용이 좀 들겠지만 설마 천만 원은 넘지 않겠지?’

작업실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가구와 책상, 컴퓨터 등 필요한 물건을 산다고 해도 1,00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오다니···.’

문득, 감회가 무량했다.

아파트를 정리하고 서울 외곽 싸구려 반지하 방이라도 얻어서 창작 활동을 해보자고 마음 먹은 때가 고작 몇 달 전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건 순전히 투팍탈 어르신 때문이구나. 그분을 만나지 않았으면 분명히 아파트에서 나가 반지하 방에서 고생하고 있었겠지.’

자신의 머리를 치유해주고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어준 후 먼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투팍탈이 가끔 떠올랐다.

‘먼지처럼 소멸한 건 안 됐지만 누구나 한번 죽음은 피해 갈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아, 한데 자랄 행성에선 추격을 포기한 걸까?’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가끔 자랄인의 지구 진입이 궁금해졌다.

투팍탈은 캬미차야 제국에서 자신을 추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투팍탈이 지구에 진입한 지 6개월이나 지났으니 자랄인이 나타날 만도 하건만 아직 그런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조용한 것이다.

‘이것들이 몰래 숨어들어왔나? 아냐, 그럴 수는 없어.’

투팍탈처럼 거구의 자랄인이 나타나면 당장 뉴스로 떠들썩해질 것이 분명했다. 스파이처럼 어딘가 몰래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차원이동마법진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투팍탈을 추격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지.’

무슨 이유든지 간에 이대로 영원히 자랄인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후후, 이젠 그림 그릴 일만 남았구나. 참, 작업실이 생겼으니 김대풍 어르신 초상화도 같이 그려야겠다. 그럼 시간이 많이 절약되겠지. 음, 이젤은 더 살 필요 없고 캔버스랑 붓하고 오일을 좀 시키자.’

강수는 죽산화방에 전화 걸어 40호 인물 캔버스 3개와 붓, 테레핀유, 린시드 및 붓 세척액 등 필요한 물품을 사무실 주소로 주문했다.

“이제 작업을 해 볼까?”

서린의 캠퍼스 앞에 서서 머릿속에 형상화된 이미지를 떠올리며 붓을 부드럽게 놀리기 시작했다.

*

강수는 요 며칠 바쁘게 보냈다.

핑크티티 멤버의 인물화를 채색하는 한편 필요한 가구 및 컴퓨터를 주문했고, 물건이 도착하는 대로 제 위치에 배치하고 정리했다.

오늘도 강수는 북한산에서 수련을 끝내고 작업실에서 채색 작업을 하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울갤러리 큐레이터 설규진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한울갤러리에서 무슨 일로 저한테 전화를 하셨죠?”

[이 작가님, 전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갤러리에서 기획하고 있는 ‘마음愛’ 단체전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요?]

“단체전이요?”

[그렇습니다. 작품 활동이 활발한 청년작가 8인을 초청해서 ‘마음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단체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작가님은 한국청년화가 12인전과 아트페어 상하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경력과 상관없이 초청하고자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기획전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요?]

핑크티티 인물화와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 작업이 끝나면 개인전 작품을 해야 한다. 강수는 정중하게 고사했다.

“단체전 참여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한데 제가 요즘 그리고 있는 작품이 있고, 이것이 끝나면 개인전 준비해야 해서 전혀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개인전 준비하고 있군요. 혹시 개인전 개최할 갤러리는 선정했는지요? 만약 아직 갤러리를 정하지 않았으면 저희 갤러리에서 무료로 대관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개인전은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상대방이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단체전에 참여할 여력이 되면 이 전화번호로 연락 주십시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별생각 없이 작업을 계속하던 강수는 또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는 역시 큐레이터였고, 작품을 맡겨주면 판매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다른 한 통도 갤러리에서 왔고, 같이 전시회를 열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정중하게 상대방의 제안을 거절한 강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한울갤러리를 비롯해 큐레이터들이 왜 자신에게 연락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자신은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한, 알려지지 않은 신인작가에 불과하지 않은가? 큐레이터가 스마트폰 번호를 알아내 전화해서 전시를 제안할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다.

‘갤러리윤 소속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하고, 작품이 완판되어서 그런가?’

이리저리 생가해 봐도 이유는 그것 한 가지였다.

화랑은 기본적으로 예술가의 작품을 구매자에게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차적인 시장이다. 잘 팔리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해야 수익이 창출되고 화랑의 명성과 인기가 올라간다.

갤러리윤의 영향이 크겠지만 자신의 작품이 갤러리스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작품이 팔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후후, 내 그림이 미술 관계자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얘기네?’

강수는 흐뭇한 기분을 만끽하며 다시 붓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