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0회
이강수가 밝은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부스에 들어왔다.
“김 실장님, 수고가 많으시네요.”
김이라는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강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먼저 축하드릴게요. 오전에 동행이 팔려서 이 작가님 작품은 네 점이 판매되었네요. 벌써 이런 성적이면 완판된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제 작품이 네 점이나 판매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게 다 김 실장님이 애써 준 덕분이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작품이 좋아서 판매된 거죠. 전시된 작품은 많이 관람했나요?”
“네. 정말 다양한 회화 작품과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창작한 조각, 설치작품을 볼 수 있어서 뜻깊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작품을 보니까 저도 창작 의욕이 마구 솟구치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죠. 해나 씨가 안 보이네요? 같이 오지 않았나요?”
“헤나 씨는 미국에서 온 친구 만난다고 갔습니다. 저는 먼저 귀국하려고 작별 인사하러 들린 겁니다.”
“하루 먼저 출국한다고 했죠. 몇 시 비행기인가요?”
“6시 비행기라 슬슬 가봐야 합니다.”
“네. 작가님이 함께 해서 즐거웠고요, 다음에 단체전이나 기획 전시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야 단체전 같은 기획전에 불러주면 감사하죠.”
“아, 그럼 앞으로 단체전이나 기획 전시에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예, 여력이 닿는 한 참가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다음에 연락 드리죠.”
“그럼 수고하시고 저는 먼저 귀국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강수가 캐리어를 끌고 부스 밖으로 인파를 헤치며 나갔다. 김이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소속작가는 싫어도 단체전이나 이런 기획 전시는 좋다 이거네? 관장님이 소속 여부와 관계없이 단체전이나 기획전이라도 참여할 수 있게 협의해 보라고 해서 말은 해봤다만··· 왠지 얄밉네.’
“김 실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이라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가워했다. 눈앞에는 긴 팔 셔츠에 신사복 바지를 입은 30대 ch반의 사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샤프한 인상의 그는 스포츠, 연예 잡지인 주간 ‘나우 서울’의 기자 윤태진이었다.
“어머, 윤 기자님이네. 언제 왔어요?”
“오전에요. 호텔에 짐 풀고 나온 거예요. 갤러리를 전부 둘러봤는데 갤러리윤 판매 성적이 제일 좋은데요? “
“호호, 그래요?”
“근데 저기 내가 모르는 작가도 있네요? 내가 모르는 작가가 어떻게 아트페어에 참가할 수가 있죠? 이강수가 누구죠?”
“아직 신인작가라 윤 기자님이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랍니다.”
“신인작가요?”
“관장님이 추천해서 참가시켰어요. 보면 알겠지만,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요. 작품도 한 점 빼고 네 점이 다 팔려나갔어요.”
“아, 박 관장님이 밀어주는 작가로군요. 관장님과는 어떤 관계죠?”
김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우연히 관장님의 눈에 띄어서 참가하게 된 것뿐이니까 이상한 소설 쓰지 말아요. 여기 팜플렛에 소개된 것 이상도 이하도 없으니까 궁금하면 이걸 참조하세요.”
윤기자가 팜플렛을 받았다.
“하하. 누가 소설을 쓴다고 그럽니까? 전 그런 거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랍니다.”
“우리 갤러리 작가들 작품이 중국 컬렉터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윤 기자님이 보다시피 그건 판매 성적이 대변하고 있죠? 우리가 선전하고 있으니까 잘 좀 써주세요.”
“하하. 물론입니다. 근데 박해나와 이강수 작가 작품은 완판될 수도 있겠네요? 두 작가의 작품이 인기 있는 이유가 뭐죠?”
“그건 말이죠···.”
김이라의 작품 설명에 윤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간략하게 메모해나갔다.
*
푸둥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약 2시간이다.
강수가 입국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김주하였다.
통화를 연결했다.
[강수오빠? 입국했어요?]
“그래. 조금 전에 도착해서 공항버스 타러 나가는 길이야.”
[에이, 속상해. 나도 상하이에 가서 오빠랑 아트페어 구경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서 못 갔어요. 오빠 작품은 많이 팔렸어요?]
“다섯 작품 가운데 오늘까지 네 작품이 팔렸어. 아트페어는 내일까지니까 운이 좋으면 안 팔린 작품도 팔리지 않을까 싶은데.”
[와, 축하해요. 돈 많이 벌었겠다.]
“다섯 작품 다 팔려도 이천만 원이 안 되거든. 꽤 벌긴 했지만 네가 버는 것에 비교하면 세발의 피 아니냐?”
[호호. 그렇긴 해도 돈 많이 벌었으니까 맛있는 거 사 줘요.]
“맛있는 거 뭐? 피자?”
[킥킥. 피자도 좋아요. 언제 사 줄 거죠?]
“내일은 작업해야 하고 모레나 글피 괜찮은데 넌 언제가 좋아?”
[모레요.]
“난 초상화 그리느라 바쁘니까 네가 수유리까지 와라.”
[콜. 몇 시까지 가요?]
“한 시까지 사일 구 탑 앞으로 와. 거기 이태리 수제 화덕피자 맛있게 하는 집 있어.”
[알았어요. 모레 봐요.]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으면서 강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주하와 썸을 타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임해영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진도 나가는 것이 어려워서 제대로 썸을 탈 수 있을지 의문이 든 탓이다.
출국장 밖은 어둠이 깔렸으나 휘황한 조명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강수는 캐리어를 끌고 수유리행 공항버스가 서는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상하이에서 지내는 동안 오전에는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오후에는 전시장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숙소에 박혀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스케치했다. 또한 상하이에 도착한 14일 밤에는 아트페어 참가 작가들과 인사하고 회식하느라 쇼핑할 시간조차 낼 수 없었다.
강수는 끌고 갔던 캐리어 하나만 끌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거실의 조명을 밝히니 이젤에 걸린 핑크티티 멤버들이 강수를 반기는 듯했다.
“하하. 아직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너희들이 날 반겨주는구나. 귀여운 것들.”
강수는 바탕색을 배경으로 다양한 각도로 얼굴 형태를 갖춘 인물화를 살펴보았다. 물감은 잘 말라 있었다.
“괜찮군. 내일부터 다시 채색하면 되겠어.”
강수는 창문을 열어 텁텁한 공기를 환기를 시키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하고 나와 간편한 실내복을 입었다.
의자에 앉은 강수는 아트페어 상하이에서 보냈던 짧았던 삼박 사일의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졸업 후 일러스트에 전념하며 전업 작가의 길의 거의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 동기나 동문선배, 교수의 개인전 외에 대규모 전시 관람은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강수는 아트페어 상하이에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체험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작품들을 떠올렸다.
구름 위에서 지상으로 달려 내려오는 군마의 행렬, 알사탕만한 크리스털로 만든 2m 크기의 호리병 안에서 다양한 색으로 변주하는 색채의 향연을 보여주는 설치작품, 산(山)을 한 걸음으로 넘어가는 아이 조각상, 작은 얼굴에 다리와 팔은 비율에 맞지 않게 둥그렇고 거대하게 그린 과장된 인체 그림 등 수많은 회화와 조각, 설치작품이 떠올랐다.
‘예술의 표현 방식은 정말 무궁무진하구나. 앞으로 전시장에 자주 찾아다녀야겠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는 창작 의욕이 끓어올라 손이 근질거렸다.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면 스케치북을 꺼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닥치는 대로 스케치했다.
‘스케치한 그림을 살펴볼까?’
강수는 캐리어에서 스케치북을 가져와 한 장씩 넘기며 숙소에서 스케치했던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스케치가 다수였다. 전시장에서 감상한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포효하는 호랑이와 그 포효에 의해 일그러지고 흔들리는 나무와 바위들.
‘뭐야, 이건 꼭 만화의 한 장면 같잖아?’
강수는 스케치북을 넘겼다.
-DNA 같은 나선형의 구조가 무수히 엉켜서 형상화된 누드의 여인.
누드는 대학에서 소묘 수업할 때 한동안 열성적으로 그렸었다.
대학 시절 실기실에서 처음 누드 크로키를 할 때 적나라한 여성의 알몸을 보며 부끄럽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좀 지나고 군중 속에 섞여 있다는 점과 모델의 포즈가 여러 번 바뀌면서 곧 알몸에 익숙해졌다.
모델의 몸매는 굴곡이 완연했고, 인체의 곡선은 물 흐르듯 아름다웠다.
기교가 뛰어나고 손놀림이 빠른 강수는 짧은 시간에 형태를 포착해서 그리는 크로키를 잘했다. 특히 인체의 아름다운 곡선에 필이 꽂히면서 미친 듯이 누드 크로키에 파고들었다. 나중에는 따로 돈 내고 누드 크로키를 하면서 인체는 눈 감고 그릴 정도가 되었다.
‘DNA 나선으로 그리는 누드화라···. ’
작품으로 그리면 신선한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스케치북을 넘겼다.
하늘의 정원에서 꽃의 비가 내리는 초현실적인 스케치였다.
이십여 장의 스케치를 훑은 강수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전부 첫 개인전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스케치였다.
‘두 번째 개인전에 쓰면 될 것 같다. 그릴 게 쌓이는구나. 우선 인물화부터 끝내야겠지만 일단 잠 좀 자고 내일부터 열심히 그리자.’
강수는 침실로 들어갔다.
*
10월 19일, 월요일.
“아, 좋다.”
강수는 양팔을 하늘로 쭉 뻗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며칠 만에 찾아온 북한산에서 마나회로 수련을 한 강수는 심신이 날아갈 것처럼 개운해서 기분마저 좋아졌다.
‘역시 수련은 산에 올라와서 해야 제맛이라니까.’
산길을 뛰며 땀을 흠뻑 흘리는 것이 헬스장 러닝머신에서 흘린 땀보다 뭔가 운동다운 운동을 한 기분이 들었다.
강수는 배낭에서 바람막이 재킷을 꺼내 걸치고 주하와 만나기 위해 하산을 시작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수련을 끝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했다.
“옷이 별로지만 집에 갈 시간이 없으니 이해하라고 해야지.”
강수는 4.19탑 앞에 10분 일찍 도착했지만 진한 자주색 랜드로버가 먼저 와서 길가에 서있었다.
강수가 랜드러버에 다가가자 뒷문이 열리고 주하가 환한 얼굴로 소리치며 나왔다.
“강수오빠!”
“먼저 와 있었네.”
“헤헤, 조금 전에 왔어요. 오빠는 배낭에 등산복 차림이네. 산에 갔다 왔어요?
“응, 운동하러 북한산에 올라갔다 지금 내려오는 길이야.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으니까 이해해 줄래?”
“괜찮아요. 등산 갔다 곧장 왔으니까. 옷이야 아무렴 어때요?”
“고맙다. 차는 여기에 두면 되고, 피자집으로 갈까?”
“네.”
항상 입는 남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임해영이 운전석에서 내려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강수 씨.”
“예, 안녕하세요.”
“참, 강수 씨 그림 덕분에 핑크티티 노래 웃어봐가 음원 챠트에 올랐다는 거 알아요?”
“예? 그런 일이 있었나요?”
“팬카페 세나 그림에 링크한 웃어봐가 이슈 되면서 조회수가 만이 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림하고 노래를 여기저기 퍼 나르면서 웃어봐까지 덩달아 관심을 받고 있나 봐요. 핑크티티 얘들이 차트에 떴다고 너무 좋아하면서, 강수 씨에게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래요.”
“정말 잘 됐네요. 나머지 인물화도 빨리 완성해서 카페에 올려야겠군요?”
“빨리 그려주면 그럼 너무 감사하죠. 사실 댓글에 핑크티티 나머지 멤버 그림은 왜 안 올리냐고 항의하는 팬들이 적지 않아요.”
“하하. 알겠습니다. 피자 먹으러 가죠.”
강수가 앞장서서 걸었고 주하가 옆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강수오빠, 작업실은 구했어요?”
“아직. 이제 알아봐야지. 아파트에 이젤을 네 개나 펼쳐놓고 유화 작업을 하려니까 기름 냄새도 나고 집안 꼴이 엉망이야.”
주하가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실 아직 못 구했구나.”
강수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은 그제 입국한 사람한테 사무실 구했냐고 묻고 있어?’
“저기, 강수오빠. 내 건물 5층에 빈 사무실이 한 군데 있거든요. 공실로 놔두느니 그거 오빠가 쓸래요?”
“응? 건물에 빈 사무실이 있어? 그리고 보니 네 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구나?”
“제 건물은 돈암동에 있어요.”
“아, 돈암동이면 멀지 않고 괜찮은데. 사무실은 몇 평짜리냐?”
“사무실은 35평 정도 될 거예요.”
“35평! 엄청 넓잖아. 임대료 장난 아니겠는데?”
“임대료는 보증금 오백에 월 오십만 원정도면 될 것 같아요.”
강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하를 쳐다보았다.
“뭐! 돈암동에 있는 건물이라며 무슨 임대료가 그렇게 싸냐? 건물이 낡았어?”
“호호. 건물이 낡진 않았구요. 빈 사무실 놀리느니 싸게 임대하려는 거예요. 그리고 내 초상화도 그려주고 할아버지 초상화도 헐값에 그려주는데 오빠한테 어떻게 제값을 받아요. 그러니까 오십만 원만 받을게요.”
“음, 나야 좋긴 한데 넌 보증금 오백에 임대료 오십만 원만 받아도 되는 거니?”
“호호. 오빠 지금 내 걱정해요?”
“응?”
생각해보니 땅값 비싼 돈암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주이고, 랜드로버에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주하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머쓱한 강수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하. 건물주를 걱정하다니 말이 헛나왔네. 마침 잘 됐다. 그럼 그 빈 사무실 내가 좀 쓰자.”
“그래요. 피자 먹고 가 볼래요?”
“그래. 피자부터 먹고 사무실 어떻게 생겼는지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