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69화 (69/197)

# 6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8회

“뉴욕에 있는 마니시안 갤러리네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잖아요? 해나 씨는 마니시안 갤러리에 가봤나요?”

“네, 뉴욕에 갔을 때 마니시안 갤러리에서 전시한 제프 쿤스 작품전 구경 갔었죠.”

“제프 쿤스면 작품 하나가 수십억, 수백억씩 하는 작가네요. 국내 전시 때 나도 한 번 가봤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거나 살 수 있는 일상적인 물건이나 만화 캐릭터, 장난감 같은 단순한 이미지를 소재로 작품화하는 키치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죠? 전시 작품은 어땠나요?”

“제프 쿤스는 비평가로부터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예요. 에이미 덤프시나 제리 설츠는 호평을 했지만, 마크 스티븐스는 상상력 없는 타락한 예술가라고 혹평했으니까요. 전시 작품은 키치(Kitsch) 아트 작품이 아니라 회화였어요. 가로 3m, 세로 2.5m 정도 되는 꽤 커다란 크기의 작품이 쭉 걸려 있었죠,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화풍은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렸는데 유니크하고, 재밌는 작품들이었어요.”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키치라는 극단으로 치우친 점이 약점이긴 하죠. 예술이 시대와 현실을 반영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를 초월해야 진정한 가치를 획득하기도 하니까요. 대중적인 인기는 얻었을지 몰라도 예술적 가치는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해요. 한데 제프 쿤스는 키치 아트 작품이나 회화 작품이나 사이즈가 큰 건 마찬가지군요?”

“그의 작품 경향이 대형화를 지향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거대한 크기에서 압도당하고 재미난 형태와 반짝거리는 표면에 감탄하는 것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둘은 마니시안 갤러리 부스에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벽에서 튀어나온 10여 개의 팔이 뒤엉켜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작품을 비롯해 팝아트 풍의 두상 조각품, 형형색색의 반지 같은 플라스틱 링과 작은 튜브를 이용한 반추상 작품. 약 20cm 길이의 수많은 대리석을 붙여서 만든 실제 말 크기의 유니콘 조각 등 약 2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와, 독창적인 작품이 많네요.”

“전 세계의 작가 몰려 있잖아요. 다양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죠.”

“하하, 그렇네요.”

우우웅!

이때, 강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이었다.

“해나 씨, 전화 좀 받을게요.”

“예, 그러세요.”

강수는 뒤돌아 통화를 연결했다.

“강 팀장님, 이강숩니다. 잘 지내셨나요?”

[이 작가님?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젠 전화가 안 되더니 지금은 해외인가 보네요?]

“예. 아트페어 관람하러 상하이에 왔습니다. 참, 어제 인세가 입금됐는데 입금액이 틀리던데요. 왜 더 많이 입금됐죠?”

[하하. 그러셨군요. 어제 3쇄 인쇄 들어갔습니다. 3쇄 인세가 틀린 것은 발행 부수를 4천 부로 늘려서 그렇습니다. 인세가 아마 사백육십만 원 정도 될 겁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인세가 월급처럼 매달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은데요.”

[하하. 판매 추이를 보면 당분간 꾸준히 팔릴 것 같습니다. 그럼 상하이에서 즐겁게 지내시고 오십시오.]

“예. 고맙습니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강수가 씨익 웃었다. 드디어 인세가 매절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후, 죽돌이가 의외로 많이 팔리네? 이거 정말로 10쇄 찍는 거 아냐?’

통화를 끝낸 강수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입가에 미소를 달고 박해나에게 걸어갔다.

*

해왕식품 회장 서준홍은 인파를 해치며 갤러리윤 부스를 찾아갔다.

푸둥국제공항에 오전 11시경 도착한 서준홍은 입국 수속 후, 호텔에 투숙했다. 잠시 여독을 풀고 점심을 먹은 후, 바로 아트페어가 열리는 컨벤션센터로 온 것이다. 그는 이오갤러리와 아리랑갤러리에 먼저 들러 작품을 구매하고 갤러리윤을 찾아왔다.

“회장님, 저쪽에 갤러리윤 부스가 있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갤러리윤 부스를 발견한 박연경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부스를 지키고 있던 김이라가 서준홍 일행을 발견하고 앞으로 달려가 맞이했다.

“서 회장님, 어서 오세요. 박 실장님도 반갑네요.”

“예, 반가워요. 김 실장님.”

“김이라 씨, 오랜만이죠? 잘 지냈나요?”

“예, 회장님, 이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먼 길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 최고의 갤러리가 전부 참가했으니 안 올 수가 있나요? 어디 작품 좀 봅시다.”

“예. 이쪽으로.”

갤러리윤 부스로 들어간 서준홍은 작품을 둘러보았다.

갤러리윤 부스에는 4명의 작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견작가 우민욱과 최동식, 신진작가 박해나와 이강수였다. 나머지 세 명의 작가는 설치미술과 조각, 디지털아트 분야의 섹터에 전시되었다.

우민욱은 한국의 자연과 풍경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화폭에 담아내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최동식은 청색, 황색, 적색, 백색을 사용해 즉흥적이고 비정형적인 구성과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의 추상화를 선보이는 작가다. 그의 그림에 표현된 선과 모형 그리고 색상과 작가의 감정 같은 요소들이 서양의 추상이 아니라 동양의 정서가 녹아있는 추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이라의 작품 설명을 들으며 우민욱과 최동식의 작품을 감상한 서준홍은 박해나 작품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해나는 100호 내외의 혈맥 시리즈, 네 작품을 출품했다.

흑과 적- 실핏줄 같은 선이 중첩해 형상화된 붉은 산맥과 그 뒤의 검은 산맥이 웅장하게 드리운 작품.

적막- 붉은 산맥과 푸른 산맥 위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리는 작품.

월하- 붉은 산맥, 그 위 어두운 하늘과 노란 달을 그린 작품.

폭풍우- 붉은 산맥과 폭풍우가 광란하며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회색의 하늘.

그림을 감상하던 서준홍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박해나 작가의 혈맥 연작은 언제 봐도 원시적이고 거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야. 이렇게 박력 넘치는 작품을 젊은 여성 작가가 그렸으니 참 놀라워.”

“예. 박해나 작가는 태초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지요. 이 혈맥 시리즈는 평단의 평가도 좋아서 소장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그렇군. 이 그림들은 화폭에서 원시적인 생명력이 폭발하듯 분출하는 것만 같단 말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한 점 구매해야겠는데··· 좋아, 화폭이 요동치는 것 같은 폭풍우를 구입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이쪽은 이강수의 작품이군.”

서준홍은 박해나 작품 옆에 디스플레이 된 다섯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 이강수는 올해 7월에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한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참여 작가입니다. 회화 경력은 짧지만 최이석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 신진작가입니다. 저희 박윤재 관장님께서도 이강수 작가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이번 아트페어에 참가시킨 것이죠.”

“나도 최이석 평론가가 쓴 글을 읽어보았네. 그 글을 읽고 대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궁금해서 작품을 구입하려고 했네만 이미 두 점 다 팔렸더군. 근데 이 작가의 작품은 벌써 한 점이 팔렸군.”

“예, 프리뷰 행사 때 팔렸습니다.”

“허허. 늦었으면 헛걸음질할 뻔했군. 어디 볼까?”

이강수의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한 서준홍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흠···. 좋군.’

작품의 크기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비교해 작았지만 그림에서 따뜻한 정감과 인간의 냄새가 났다.

‘이 작품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구나. 어떤 걸 산다?’

어떤 작품을 살지 속으로 결정을 내린 서준홍이 김이라에게 말했다.

“김 실장, 해외 아트페어 출품작들이라 그런지 국내 전시 작품보다 훌륭한 것 같네. 마음 같아서는 다 구매하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고 이강수 작가는 강가를 구매하지.”

“회장님, 폭풍우와 강가의 가격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저쪽으로 앉으시죠.”

“그러지.”

서준홍은 김이라와 함께 탁자로 갔다.

김이라가 작품의 가격을 몰라서 확인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부스에 전시된 회화는 대부분 작품 한 점당 이천만 원이 넘는 고가의 상품이어서 순간적인 착각으로 틀리게 얘기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가격을 협의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박연경이 이강수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신유라에게 다가갔다.

“이강수 작가네. 그림이 어때? 마음에 들어?”

신유라가 기억의 끝을 가리켰다.

“네. 다 좋은데 특히 기억의 끝이 맘에 들어요. 이거 얼마나 할까요? 저번엔 크기가 이것보다 작아도 사백이나 했거든요.”

“그럼 조금 더 비싸겠지? 그래서 또 구입하게?”

“사고 싶긴 한데 그림 한 점에 수백만 원이나 하니까 고민돼요. 가격을 물어보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맞아. 그림값이 장난 아니지. 그런데 유라 씨는 유독 이강수 작가 작품에 관심이 많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신유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다른 작품에 비교하면 그림값이 싸잖아요. 그리고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행복해지거든요. 저런 추상화는 잘 몰라서 관심 없고, 사진 같은 풍경화는 아름답긴 한데 그렇게 와 닿진 않네요.”

“박해나 씨 작품은?”

“아휴, 여성 작가인 모양인데 그림이 너무 격렬하고 섬뜩 해서 부담돼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이강수 작가 작품이 저하고 맞는 것 같아요.”

“흐음, 그렇구나.”

이때, 175cm쯤 되는 신장에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박연경과 신유라의 앞을 지나갔다. 두 여성이 무심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남색 슈트를 입은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신유라 앞을 지나가며 신유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순간이었지만 사내의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사라졌다.

사내는 탁자로 다가가 김이라에게 이강수의 작품을 가리키며 가격을 물었다.

의외로 사내는 한국인이었다.

“잠깐 실례하죠. 저 작품, 기억의 끝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얼마입니까?”

서준홍과 상담하고 있었던 김이라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 지금 손님이 계셔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끝나는 대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지요.”

탁자에서 물러난 사내가 이강수의 작품 ‘기억의 끝’ 앞으로 가서 작품을 이리저리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박연경과 신유라는 슈트를 입은 사내가 자신들의 앞을 지나갈 때부터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연경이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저 사람이 기억의 끝을 구매하겠다고 한 거 아냐?”

신유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맞아요. 저 작품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이강수 작가 인기 많네?”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워요. 얘기라도 해봐야지.”

“무슨 얘길 해?”

“그림을 저한테 양보해 달라고요.”

신유라가 찌푸린 인상을 펴고 손바닥으로 볼을 톡톡 건드린 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 좀 해요.”

신유라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신유라를 바라보았다.

“예? 무슨 일이죠?”

“저, 이 그림. 혹시 구입할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실은 이 작품은 내가 아까부터 사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한데 갑자기 그쪽이 구입을 한다고 하는 것 같아서요. 미안한데 나한테 양보하면 안 되나요?”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사려고 마음먹었으면 빨리 구매 의사를 밝혀야지 왜 가만 계셨나요?”

“그게··· 저분의 상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나처럼 먼저 구매 의사를 밝히던지 아니면 예약이라도 했어야죠.”

서준홍이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박연경이 부스 앞으로 나가며 신유라에게 말했다.

“유라 씨, 회장님께서 일어났어. 그만 가지.”

“아, 예.”

신유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매섭게 쏘아보고 몸을 돌렸다.

상황을 파악한 사내가 신유라를 불렀다.

“잠깐만요.”

신유라가 돌아보자 사내가 서둘러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혹시 저 그림에 관심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 주세요. 양도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시온㈜ 영업이사 양이명?’

신유라가 힐끗 명함의 이름을 살피고 양이명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어요.”

양이명은 자신과 눈을 맞추고 뒤돌아 부스를 나가는 신유라의 늘씬한 뒷모습을 지켜보곤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한 번 얘기해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촉박한 게 아쉽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