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7회
집에 도착해서 몸을 씻은 강수는 작업실로 갔다.
잠을 못 자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 자면 밤에 못 잘 수도 있었다.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법이 있다. 2서클 마법인 회복마법인데 아직 익히지 못했다.
회복마법을 익혀도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자 피로를 풀어서 바이오리듬을 유지한다. 회복마법으로 몸의 피로는 풀 수 있어도 바이오리듬이 망가지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강수는 회복마법보다 3서클 치유마법에 관심이 더 많았다. 2서클 마나하트가 완성되면 치유마법을 캐스팅해보려고 틈틈이 치유마법 수식을 해석하고 있었다.
마법수식은 수학과도 같다.
미적분 기호의 개념과 다항함수, 로그함수 등 각각 함수의 풀이 방식을 모르면 백날 가도 미적분 문제를 풀이할 수 없듯이 룬어로 된 마법수식을 기억하고 해석해야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다. 강수에게 있어 마법수식의 기억과 해석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투팍탈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룬어와 마법수식을 뇌리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채색 좀 하고 치유마법 수식을 마저 해석해야지.’
강수는 세나의 초상화를 이젤에 걸었다.
강수는 세나와 주하의 초상화를 동시에 그렸다. 물론 진척이 한 템포 빠른 것은 세나의 초상화다.
세나의 초상화는 걸그룹의 상큼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캬드늄 오렌지, 샙 그린, 시룰리언 블루처럼 명도와 채도가 높은 밝은색 위주로 초벌 칠을 해 놓았다.
초벌 칠이 말랐으므로 얼굴과 머리, 어깨 등 인물에게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세나의 인물 채색이 어느 정도 끝난 후에는 주하 초상화를 이젤에 걸고 바탕색을 칠했다. 주하의 초상화에는 검푸른 색으로 균일하게 바탕을 초벌 칠했다. 주하의 초상화 바탕색은 차분한 분위기를 주는 단색조 화풍으로 채색할 계획이었다.
‘물감이 어느 정도 마르면 단색조 화풍으로 칠하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해 줄 거야.’
시간을 보니 7시 30분. 슬슬 배도 고파오고 저녁 먹을 때가 됐다.
문득 강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작업실을 마련해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거지. 직장인처럼. 같이 저녁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도 듣고, 영화관에도 가고. 아이도 낳고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강수는 각종 화구와 이젤이 놓인 작업실을 둘러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주하 말대로 우선 작업실부터 얻어야겠다. 집안 꼴이 이래서야 되겠냐고?”
강수는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순대국밥이나 먹고 오자.”
*
다음날, 나무로 우거진 북한산 강수의 수련 장소.
태양은 중천에 떠올라 따가운 초가을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아, 뭐야. 안 되잖아?”
알몸으로 마나회로 수련을 끝낸 강수는 허탈해지고 말았다..
어젯밤 10시에 수마가 몰려와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던 강수는 새벽 5시에 깼다. 그리고 설레는 맘으로 곧장 북한산에 달려와 알몸으로 수련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다.
결국, 마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이상 현상의 원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원인은 모르지만, 결코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2서클을 이룬 것만 해도 눈부신 성장이었으니까.
‘2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야. 계속 수련하다 보면 또 언젠가 그런 이상 현상이 생길 수 있겠지.’
사실 강수가 겪은 각성은 의지나 의식과는 상관없이 자연과 육체의 순간적인 동화를 통해 일어난 우연의 산물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처럼 어느 순간 찾아왔을 뿐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찰나의 순간을 붙잡은 것이야말로 강수에겐 더없이 소중한 행운이었다.
‘치유마법 수식이나 마저 해석해서 한번 써봐야지.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정말 궁금하다.’
강수는 투팍탈이 자신의 머리를 치유마법으로 치료했다는 사실을 안다. 손상된 뇌수가 원상으로 복구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전보다 더 뛰어난 상태로 회복되었다.
치유마법은 현대 의학과는 다른 마법 같은 효능과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대 의학은 손상된 뇌수와 깨진 머리를 그 자리에서 절대 원상회복 시킬 수 없으니까.
8서클 마법사였던 투팍탈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치유마법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할지 사뭇 기대되었다.
치유마법을 캐스팅한다는 상상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치유마법이 3서클 마법인 이유는 그만큼 마나 소모가 많다는 거지. 처음 이센셜아이를 캐스팅했을 때처럼 쇼크가 생길지도 몰라. 하지만 쇼크로 죽지는 않으니까 조심히 사용하면 되겠지.’
자랄 행성 마법사는 상위 마법을 캐스팅하지 않는다.
마나 고갈을 당하면 마나를 완충하는 시간도 오래 거릴 뿐만 아니라 마나를 회복하기 전에 적이나 괴수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강수는 그런 외부로부터의 위험이 없다. 쇼크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이상 현상의 이유는 밝히지 못했지만, 치유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강수는 배낭을 메고 집으로 향했다.
*
“끝났다!”
지난 열흘간 초상화 작업 외에는 치유마법의 수식 해석에 매달린 강수는 해답이라고 할 수 있는 캐스팅어를 도출해 냈다.
이제 영창과 함께 캐스팅어 ‘₢ξ₫ΘϊЋЃ₪’를 외우면 치유마법이 구현된다.
“으하하!”
너무나 기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수가 치유마법을 해석한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다. 부모님이 큰 병은 없지만, 평생 농사일을 해 온 관계로 허리나 무릎이 안 좋고 노인성 질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어머니는 2년 전 오십견으로 고생하셨다.
마법사가 됐지만, 아직 부모님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다.
‘농사일도 힘든데 몸까지 아프면 안 되지. 이번에 집에 내려가면 용돈도 넉넉하게 드려야지.’
부모님이 농사일을 안 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안 되니 몸이라도 건강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주하가 올 때가 됐구나.’
어제 한두 시간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느낌상 작업 끝나면 드라이브 가려고 일부러 늦게 오는 것 같았지만 때맞춰 치유마법을 해석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딩동, 딩동!
‘왔구나.’
강수가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임해영과 주하가 들어왔다.
“강수오빠, 안녕?”
“어서 와. 음료수 마실래?”
“생수면 돼요.”
“해영 씨는?”
“저도요.”
강수는 유리잔에 생수를 두 잔 따라서 두 사람에게 주었다.
작업실에 시선을 주고 있던 임해영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작업실로 다가갔다.
‘이건 세나의 초상화잖아?’
임해영은 세나의 초상화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맑고 깨끗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탕색에 아이돌처럼 깜찍하고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개성적인 얼굴은 아무리 봐도 세나의 초상이었다.
“강수 씨, 혹시 이 초상화는 핑크티티의 세나 아닌가요?”
임해영이 작업실 한쪽에 세워진 완성된 세나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강수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해영 씨는 핑크티티 세나를 아네요? 인기 있는 걸그룹인가봐요?”
“아뇨. 데뷔한지 5년이나 된 중고신인이죠. 실력은 있는데 노래가 어중간해서 아직 뜨지 못했죠.”
세나의 초상화를 훑어본 주하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수를 노려보며 톡 쏘는듯한 말투로 물었다.
“저번에 보았던 그림이네. 그런데 세나를 왜 그렸어요? 이 애가 맘에 들었나 보죠?”
주하의 뜬금없는 말에 강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팬은 무슨 팬. 학교 졸업하고 주로 아크릴물감으로 그렸거든. 유화는 안 쓴 지 꽤 돼서 기억도 되살릴 겸 연습 삼아 그려본 것뿐이야.”
“아, 그랬구나.”
주하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임해영이 주하의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말했다.
“혹시 세나 초상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물론 얼마든지 찍으세요.”
임해영이 스마트폰을 꺼내 찍으려 하자 강수가 팔을 저었다.
“아, 잠깐만요. 그건, 사진 품질이 안 좋을 건데요. 내가 찍어 줄게요.”
강수가 DSLR을 가져와 원본의 색감과 채색을 고스란히 살려서 찍었다. 컴퓨터를 켜고 사진 파일을 컴퓨터로 보내 모니터에 띄웠다. 다섯 장의 사진을 살핀 강수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찍힌 사진을 골랐다.
“이 사진이 제일 좋은 것 같네요. 해영 씨 보기에는 어때요?”
“전 다 좋은데요? 그래도 강수 씨는 보는 눈이 틀리니까 그걸로 주세요.”
“이메일로 보내줄 테니까 주소 불러주세요.”
“네. bruyoung 골뱅이 담닷컴이요.”
강수는 해영의 메일로 사진을 보내며 물었다.
“핑크티티를 잘 아는 것 보면 해영 씨는 세나 팬인가 봐요?”
임해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나이에 무슨 걸그룹 팬이겠어요. 실은 세나가 사촌 동생이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거죠.”
“아, 그랬군요.”
주하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해영 언니가 세나랑 사촌이구나.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무명이잖아요. 말해도 모르는 얘들일 텐데요.”
“그러네. 세나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봐요.”
“그거 봐요. 강수 씨, 사진 고마워요. 이 초상화는 팬카페에 올리려고요. 세나가 좋아 할거예요.”
“팬카페가 있네요?”
“친구들이 만들어 준거죠. 회원도 몇천 명 밖에는 안 돼요.”
웬만한 취미 카페도 기본적으로 몇천 명은 된다. 아무리 무명이라고 해도 여성 걸그룹 카페 회원 수가 몇천 명은 너무 적었다.
“회원 수가 좀 적네요? 나라도 가입해야겠다.”
“호호. 그럼 감사하죠. 인기하고 거리가 먼 무명 걸그룹이 다 그래요. 행사 뛰면서 버티다 지쳐서 해체하고 사라지는 걸그룹이 태반이죠.”
“그건 미술계도 마찬가지 같아요. 아무리 그림을 사랑해도 작품이 안 팔리면 답이 없어요. 알바 하면서 버틸 수는 있지만, 생활고에 찌들다 보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죠.”
강수는 컴퓨터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카페에 사진 올리려면 컴퓨터 쓰세요.”
“고마워요. 그럼 컴퓨터 좀 쓸게요.”
임해영이 식탁 의자를 가져와 컴퓨터 앞에 앉아 카페에 사진을 올렸다.
주하가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강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서로의 얼굴과 눈빛을 마주 본 지도 벌써 네 번째다. 처음엔 모델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조금 서운했다.
‘강수오빠 얼굴은 의외로 매력 있어.’
잘생긴 남자 배우처럼 화려하거나 조각 같은 마스크는 아니었지만 두 시간씩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질리지 않았다.
‘눈빛이 깊고 정말 깨끗해.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곧고 반듯한 코도 참 보기 좋아. 입술도 붉고 촉촉하게 윤기가 반짝거려. 저 입술은···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괜히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강수는 캔버스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주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슬쩍 말을 걸었다.
“저기, 강수오빠.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더 안 그려요?”
“응. 걱정하지 마. 오늘 끝낼 거야.”
“그렇구나. 그럼 작업 끝나고 초상화 가져갈 수 있어요?”
“그건 곤란한데. 물감이 좀 마른 후에 가져가는 게 낫지 않을까? 물감이 마르지 않아서 캔버스에 이물질이 닿으면 색이 망가지거든. 어차피 바니쉬도 칠해야 하고.”
“며칠이나 있어야 하는데요?”
유화물감이 빨리 마르게 해 주는 건조제 시카티브를 첨가했다. 혹시 모를 변형을 염려해 시카티브를 소량 첨가해서 마르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웜마법을 쓰면 빨리 말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물감의 변형이 생기는지 테스트를 먼저 해봐야 할 것이다.
“삼사일 정도. 물감을 두껍게 칠한 곳은 더 걸리고.”
“할아버지가 빨리 보고 싶어 하는데 할 수 없죠. 알았어요.”
“삼사일 뒤에 어느 정도 마르면 내가 갖다 줄게. 집이 어디야?”
“그럼 좋죠. 집은 한남동이에요. 문자로 주소 보낼 테니 네비 찍고 오세요.”
“알았어. 이제 거의 끝나 간다. 조금만 참아.”
주하가 두 시간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작업을 끝냈을 때는 오후 6시가 넘었다. 캔버스에서 붓을 뗀 강수가 뒤로 물러나 초상화를 살펴보고 난 후, 주하에게 말했다.
“이제 됐어. 끝났다.”
“와, 신난다.”
의자에서 일어난 주하가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흥, 세나보다 못 그렸기만 해봐. 가만 안 둘 줄 알아.”
주하가 혼잣말로 쫑알거리며 이젤 앞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