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56화 (56/197)

# 5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6회

강수는 눈을 뜨자마자 마나하트에 하나의 서클이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심상으로 마나하트를 본 것이다.

‘어, 어떻게 서클이 완성된 거야?’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기쁘기도 했지만, 의문이 더 컸다.

‘무슨 일이 생겼던 거지?’

강수는 자신이 각성의 경지에 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너무 시원해 고개를 숙여 몸을 살핀 강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앗! 뭐야. 옷도 안 입고 있었잖아?”

강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등산복을 입었다.

꼬르르륵!

배에서 양식을 달라고 요동쳤다.

“윽!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거야?”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시간을 확인한 강수는 눈을 부릅떴다.

오전 11시.

시간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날짜를 보고 놀랐다. 강수의 기억으로는 오늘은 분명히 20일, 일요일이어야 하는데 21일 월요일이었다.

‘설마 하루 반나절 동안 벌거벗고 서 있었던 거냐?’

스마트폰이 망가지지 않은 이상 자기 생각이 맞았다.

‘명상했다가 깬 것뿐인데 하루 반나절이 지났어? 가만, 오늘이 월요일이면··· 오후 2시에 주하와 만나기로 했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 현상을 깊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강수는 배낭을 챙기고 하산했다. 점심을 먹고, 방을 청소하고, 몸을 씻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

“거실이 작업실이네? 작업하기엔 좀 좁지 않아요?”

약속 시각에 맞춰 임해영과 아파트에 온 김주하가 작업실을 보고 말했다.

임해영은 예전하고 같은 남색 정장을 입었고, 주하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하얀 스커트와 쇄골이 드러난 연한 브라운 계통의 라운드 블라우스를 입었다. 목걸이를 했는데 백금에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에메랄드 목걸이였다. 귓불에서 반짝이는 녹색은 역시 에메랄드 귀걸이일 것이다.

“일러스트할 땐 좁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회화작업을 해보니까 좀 좁긴 하더라.”

“강수오빠, 그러지 말고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어요. 집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쉬는 게 좋잖아요.”

‘누가 그걸 모르냐? 형편이 안 되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아도 사이즈가 큰 회화작업을 하면서 거실이 좁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주하의 말을 듣고 보니 작업실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회화 위주로 작업하려면 거실은 불편할 것이다.

‘안 되겠다. 가능하면 빨리 근처에 허름한 곳이라도 알아봐야겠구나.’

“어? 벌써 스케치해 놓은 거예요?”

세나를 러프하게 데생하고 초벌 칠해 놓은 캔버스를 본 주하가 물었다.

“아니. 그건 연습 삼아 그리는 그림이야. 차 한 잔 줄까? 녹차, 커피, 캔음료, 탄산수가 있는데.”

“네. 커피요.”

“해영 씨는요?”

“탄산수요.”

주방으로 간 강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커피를 타고,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을 불렀다.

“해영 씨, 주하야, 커피 마셔.”

작업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김주하와 임해영이 주방으로 왔다.

“밖은 완전히 가을이에요. 날씨 엄청 쾌청해요. 차 몰고 드라이브하면 딱 좋은 날인데 작업 끝나면 드라이브 갈래요?”

“뭐? 강북에는 드라이브할 만한 곳이 없을걸.”

“북악스카이웨이 있지 않아요?”

“그래. 그 길이 유명하긴 하더라. 남자친구하고 가면 되겠네.”

“칫, 같이 갈 남자가 없으니까 그렇죠.”

“어? 주하 미모에 여태 남자 친구 없어? 아님 남자한테 차였나?”

“흥, 내가 남자한테 차일 것 같아요? 차면 찼지 누가 차여요.”

“그럼 찼어?”

“그래요, 찼어요. 그런 오빠는요? 애인 있어요?”

강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넌 찼구나. 난 차였는데. 찼든 차였든 솔로인 건 똑같지? 잡담 그만하고 그림이나 그리자. 이리 와. 스케치 좀 하게.’

작업실로 간 강수가 의자를 가리켰다.

‘이 의자에 앉아 볼래.”

작업실로 따라온 주하가 의자에 앉았다. 스커트가 위로 올라가며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흡!’

무심코 허벅지에 시선을 준 강수는 무방비상태에서 심장 공격을 당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뭐, 뭐냐! 왜 그런 스커트를 입고 와서···.’

식탁에 앉았을 때는 보이지 않아서 몰랐다.

“어, 근데 등 뒤가 좀 불편하네요?”

“높이가 안 맞아서 그래. 맞춰줄게.”

강수가 의자의 높이와 허리받침, 목 받침을 주하의 체형에 맞춰주었다. 옆에서 높이를 맞춰주다 보니 하얀 허벅지가 눈에서 아른거렸다. 문득, 아랫배에서 열기가 꿈틀거리며 심장 박동이 발라졌다.

‘아, 이거 자꾸 눈이 가네.’

강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얼른 옆으로 물러났다.

“좀 어때?”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 주하가 미소를 지었다.

“어? 이제 편해요.”

캔버스 앞으로 온 강수는 하얀 허벅지가 다시 눈에 들어오자 의식적으로 시선을 주하의 얼굴에 두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주하의 분위기는 경포대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경포대에서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늘씬한 모습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유분방하고, 유혹적이고 섹시했다면 지금의 옷차림은 생기 넘치고 발랄하고 순수한 소녀의 느낌이었다.

‘거긴 경포대였고, 여긴 작업실이긴 하지. 장소와 옷차림이 느낌과 분위기를 180도 바꿔주는구나.’

한 시간가량 스케치에 열중하던 강수가 주하를 보고 문득, 실소를 지었다.

주하가 조금 전부터 심심한 듯 풀이 죽어 있었다. 화가의 그림 모델이 되어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은 따분한 일이다.

풀이 죽어 있는 주하에게 강수가 말을 건넸다.

“주하는 졸업을 올해 했나?”

“네.”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겠어? 남자 친구도 줄줄 따르고.”

“그럼 뭐해요. 데이트도 몇 번 못 해 봤는데.”

“왜?”

“교문만 나서면 해영 언니가 붙어 다니잖아요. 둘이서 짜릿한 시간을 보낼 수가 없는데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요? 통금도 밤 열 시고. 대학 생활이 얼마나 암울했는지 알아요? 그나마 지금은 통금이 열두 시로 늘었지만.”

“아버지가 엄격하신 분이구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규제한 거예요.”

“그게 정 싫었으면 집에서 나와 하숙이라도 하면 되지 않아?”

“그랬었죠. 하지만 내 멋대로 굴었다간 유산 상속은 꿈도 꾸지 말라고 협박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고요.”

“아, 그랬구나. 어쨌든 졸업했으니까 어디 취직해서 일할 생각은 없는 거냐?”

“킥!”

“왜 웃냐?”

어느새 주하의 얼굴에는 생기와 활력이 돌아왔다.

“요즘 취직하면 얼마 벌어요? 연봉 4천? 5천? 연봉 5천이면 좀 받는 거에요?”

강수는 질문하고서야 자신이 우매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호원인 임해영 씨 연봉만 해도 수천만 원일 것이다. 회사에 취직한들 임해영 씨 연봉만큼 벌 수 있을까?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이다.

“하하. 농담이다. 네가 하도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해본 말이야.”

“실은 저도 직장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안 가서 그렇지.”

“뭐? 직장 있어? 근데 어떤 회사에서 일하기에 일주일에 한 번 나가냐?”

“제가 매일 출근해서 업무 볼 일이 없거든요. PM회사 서브탑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해 주니까요. 나는 가끔 서브탑에 가서 업무만 보고받고 필요할 때 서류만 결재해요.”

“일주일에 한번 업무 보고 받고 필요할 때 결재해?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건물주거든요.”

“뭐?”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강수의 손이 멈칫했다. 눈을 그리던 연필이 엇나가며 눈에 선이 굵게 그어졌다.

‘윽! 이런 실수를.’

강수가 캔버스에서 연필을 떼고 황당한 표정으로 주하를 바라보았다.

“주하가 건물주였어? 와, 놀래라.”

“할아버지가 졸업 선물로 작은 건물 하나 증여해 주었어요. 연건평 육백 평인 5층짜리죠.”

손녀에게 5층짜리 건물을 졸업 선물로 줄 정도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갑부란 소린지 짐작이 안 됐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 거야?”

“킥!”

“또 왜 웃냐?”

“할아버지 재산이 얼마인지는 장손인 아버지도 모를걸요? 그래도 자식들한테 상속을 많이 해 주긴 했어요. 아빠는 할아버지 재산이 아직 절반도 넘게 남았을 거라고 하지만요.”

“할아버지가 완전 부동산 갑부였네. 난 완전 흙수저인데 너 금수저였구나. 부럽다, 부러워.”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여봐요. 혹시 알아요? 할아버지한테 오빠 그림 사서 빌딩에 걸어 놓자고 꼬드길 수도 있으니까.”

“뭐?”

눈을 번쩍 뜨고 주하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주하가 미래 대고객님이 될 수도 있네? 정말 잘 보여야겠다.”

“음, 음. 그러는 게 좋겠죠?”

주하가 턱을 쳐들고 귀엽게 으스댔다.

한바탕 웃은 강수가 손을 멈추었다.

“밑그림이 끝났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고생했어.”

“고생은 오빠가 했죠. 난 앉아 있기만 했잖아요.”

“원래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지. 거의 두 시간이나 앉아 있었잖아. 참, 사진 좀 찍자. 잠깐만.”

강수는 작은 방에서 카메라를 가져왔다.

“아까처럼 앉아 있어 봐.”

강수는 다양한 각도에서 주하의 얼굴을 찍었다.

“됐어. 진짜로 끝.”

의자에서 일어난 주하가 돌연 쌍심지를 세우고 강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근데 드라이브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안 갈 거면 안 간다고 하든지.”

‘얘가 왜 이렇게 서슬이 퍼레? 벌써 갑질이야?’

왠지 드라이브 안 갔다간 완전히 삐질 태세였다. 미래의 대고객이 될지도 모르는데 변명이라도 해서 기분을 풀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데생은 끝났지만 난 바탕색도 칠해야 하고 바쁘거든. 드라이브는 작업 끝내고 다음 주에 가는 건 어때? 초상화 그릴 동안은 시간 내기 어려우니까 이해 좀 해줄래?”

“흥, 바탕색 칠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요?”

바탕색이야 나중에 칠해도 된다. 다만 어제 있었던 이상 현상을 그냥 넘길 수가 없어 지금 드라이브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초상화 그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 2시간 동안 작업한 것이다.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리지.”

“좋아요. 내 그림 그리는 거니까 봐 준다. 그림 끝나면 드라이브 가는 거예요.”

“알았어. 금요일에 보자.”

주하와 임해영이 돌아간 뒤, 여유가 생긴 강수는 수련 중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떠올려보았다.

자신의 느낌으로는 잠시 명상하고 깬 것 같았는데 하루 반나절이 흘렀고, 마나 서클이 완성되어 있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각성? 깨달음? 음, 깨달음은 아니군.’

깨달음은 욕조에 들어갔다 유레카를 외친 아르케메데스처럼 난제를 고민하다 욕조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본 순간 해답을 구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해답을 구하려는 난제가 없는데 깨달음이 있을 리 없다.

각성도 깨달음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화두처럼 딱히 어떤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문득 뭔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각성이라고 하기도 맞지 않았다. 각성했으면 뭔가 깨달음이 남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

‘각성이 아니면 뭐였지? 하여튼 각성과 비슷한 것 같은데···.’

뭔지는 몰라도 만약 이런 현상을 자신의 의지로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3서클, 4서클도 단시간에 성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수련을 통해 또 각성의 경지에 들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배낭을 멘 강수는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후문을 빠져나온 강수는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평지를 달리는 것은 강도 높은 운동은 아니지만 경사가 진 산을 타기 시작하면 체력 소모는 물론이고 운동의 강도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또한, 바닥이 고르지 않아 주의를 기울여 달리지 않으면 발목을 삐거나 넘어져 다칠 수가 있다. 산길 달리기는 위험하다. 강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2서클을 이루기 위해 육체를 한계상황까지 몰아간 것이다.

덕진대 앞 솔밭을 지나 산을 타기 시작한 지 40분이 지나서야 강수는 수련 장소에 도착했다.

“후우, 후우.”

전신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가쁜 호흡을 고른 후, 강수는 등산복을 벗고 땀을 닦아냈다. 땀에 젖은 등산복은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조깅복을 입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마나는 마나하트와 금방 공명했고, 인력에 끌리듯 마나하트에 축적되었다.

마나하트와 마나가 공명하면 외부의 자극이나 극심한 허기 같이 명상을 깨뜨릴 만한 내부의 자극, 또는 수련을 중단하겠다는 의식의 개입이 있어야 명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어제와 같은 현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강수는 의식적으로 수련을 중단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산을 휘감았고, 북한산은 거대한 침묵에 잠겼다.

강수는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정오를 지난 시각이라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아우, 몸이야.’

강수는 굳은 다리를 풀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의 18시간 동안 마나회로 수련을 했지만, 심상으로 확인한 마나하트는 수련하기 전과 똑같았다.

‘변한 게 전혀 없어? 왜지?’

강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천천히 일어났다.

‘설마 알몸으로 수련해야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기존의 마나회로 수련으로는 실패했으므로 이틀 전처럼 등산복을 벗고 수련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이것 참. 황당하지만 내일은 알몸으로 해 봐야겠네.’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등산복을 챙겨 하산한 강수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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