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8회
자신의 초상화를 살펴본 주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초상화는 트집 잡을 만한 구석 없이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완성되기 전에 보았던 그림과 지금 그림은 너무나 달랐다. 마치 영혼과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난 요정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헤헤, 누군지 몰라도 진짜 예쁘다.”
강수가 자화자찬하는 주하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초상화가 마음에 드는 것 같다?”
“네. 엄청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이 그림은 뭐랄까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 같은 순수한 느낌이 들어서 맘에 들어요.”
임해영도 주하의 초상화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나의 초상화는 개성이 톡톡 튀고, 귀엽고 생기발랄한 아이돌 분위기를 주는 데 반해 주하의 초상화는 실물을 볼 때와는 다른 존재하지 않는 뭔가를 그린 것 같은 비현실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본래 인물의 초상화는 사진처럼 그리지 않는 이상 실물과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얼굴 형태나 표정, 이목구비는 모델과 비슷해도 물감의 색과 붓 터치에 의한 질감, 빛의 표현과 명암의 차이에 의해 초상화는 실물과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다.
고흐가 그린 인물화는 그 독특하고 놀라운 색감과 꿈틀거리는 강렬한 붓 터치가 특징이라면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는 긴 얼굴과 목, 눈동자 없는 눈 등 비현실적인 형태가 특징이다. 이런 표현방식은 전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화가의 눈, 예술성에 기인한다.
결국, 인물화는 사실과 환상의 중간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누가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오빠, 드라이브할 겸 밖으로 나가요. 작업도 끝났으니까 맛있는 거 살게요.”
주하는 작업 끝나면 드라이브 가겠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마나회로 수련과 초상화 그리느라고 북한산과 집만 왔다 갔다 했는데 기분전환 삼아 하는 드라이브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드라이브는 내 차로 갈까?”
“오빠가 운전하게요? 그러지 말고 내 차로 가요. 해영 언니가 운전하면 되거든요. 저녁 먹을 때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잖아요.”
“음, 그래?”
저번처럼 호텔의 고급 식당은 음식은 최고급이었지만 뭔가 내키지 않았다.
“너무 격식 차리는 곳은 불편하니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예? 킥, 알았어요.”
“잠깐 기다려. 옷 좀 갈아입을 테니까.”
침실로 들어간 강수는 진한 남색 바지에 연한 청색의 데님 셔츠를 입고 나왔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임해영이 리모컨 키를 눌렀는지 지상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는 덩치 큰 차량이 깜박였다.
무심코 보조 등이 깜박이는 차량을 바라본 강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차··· 저거 럭셔리 SUV라는 랜드로버잖아?’
강수가 차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차량 모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랜드로버는 얼마 전 SUV를 구입하면서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찻값이 1억이 넘는 차를 몰고 다녀? 하긴 금수저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갑부 집 자식인데 1억, 2억짜리 차가 무슨 대수랴.
주하는 조수석 뒤에 강수는 운전석 뒤에 앉았다.
파워가 내재한 듯한 저음의 엔진음을 토해내며 랜드로버가 천천히 주차장을 벗어났다. 운전대를 잡아보지 않아서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운 실내와 승차감이 괜찮았고, 차가 묵직해서 안정감 있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긴 했다.
랜드로버는 중산아파트를 빠져나가 대로에 접어들었다. 주하가 은근한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강수오빠.”
“왜?”
“저번에 여자친구한테 차였다고 했죠?”
“그런데?”
“진짜 차였어요? 어떤 여자였어요? 나처럼 예뻐요?”
귀엽게 물어보는 표정을 본 강수가 푸앗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너처럼 예쁘냐고? 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예쁘긴 했지. 근데 그게 뭐가 궁금해?”
“그냥 뭐 하는 여잔데 오빠 같은 남자를 찼는지 궁금하잖아요? 내가 봤을 때 오빠가 여자한테 차일 정도는 아닌 것 같거든요. 뭐,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토라진 것처럼 팔짱을 끼는 주하를 본 강수가 싱긋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벌써 몇 달 전 일인데··· 얘기 못 할 건 아니지. 차인 거 맞아. 그녀가 워낙 바빠서 3개월 넘게 만나지 못하고 있었어. 그러다 겨우 약속을 잡았는데 약속 날 문자가 왔어.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다고···. 앞으로 만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문자가 오더라. 이대로는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 집에 찾아갔지.”
주하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강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미묘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래서요? 만났어요? 뭐래요?”
“이사하고 없더라. 그리고 끝이었지. 벌써 다섯 달이 넘었네.”
“와, 그 여자, 칼같이 자르는구나.”
“그러는 넌, 남자를 찼다고 했지. 남자친구는 왜 찼어?”
“맘에 안 드니까 찼죠.”
“어디가 그렇게 맘에 안 들었는데?”
“어디요? 얼굴이 반반해서 좀 생긴 남자들은 꼭 얼굴값을 한다니까요. 어떻게 된 남자들이 몸매 빠지고 예쁜 여자라면 사족 못 쓰는지 몰라.”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에 강수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크, 바람둥이였구나.”
“네. 남자들은 왜 한 여자한테 만족하지 못하고 기회만 되면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건드는 거예요? 하여튼 그런 것들은 정말 재수 없어.”
“주하는 왜 그런 남자를 만났는데? 너도 잘생긴 남자가 좋으니까 만난 것 아냐?”
“그럼 누굴 만나요? 키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빈티 나는 남자를 만날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못나도 오빠 정도는 돼야 사귈 마음이 생긴단 말이에요.”
“어? 나 정도면 사귈만 한 거야?”
주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치, 알면서 왜 물어요. 잘났다고 으스대고 싶어요?”
“하하, 아니. 내가 언제 잘났다고 말하든.”
멋쩍게 웃은 강수는 주하를 보며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난 아파트도 융자 낀 전세고 일정한 수입도 없는 가난한 예술가인데? 얘가 갑부 집 딸내미라 돈은 안 따지는 건가?’
물론 자신은 세상의 그 누구 앞에서도 꿀릴 일 없다. 단지 보통의 경우 여자가 남자를 보는 기준은 외모와 경제력이다.
외모는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아직 무명의 예술가였다. 아마도 주하의 집이 워낙 부자이고, 자신도 건물주라 남자의 경제력은 문제삼지 않는 모양이었다.
랜드로버는 꾸불꾸불한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리고 있었다.
차가 적당한 높이로 올라오자 왼편으로 수많은 집과 키 낮은 건물이 밀집해 있는 도시의 정경이 펼쳐졌다.
주하가 강수 옆으로 다가와서 차창 밖을 구경했다. 다가온 주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고, 주하의 부드러운 팔과 매끄럽고 몽실한 가슴이 자연스럽게 강수의 오른팔에 살짝 접촉했다.
강수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앤 왜 이렇게 밀착하는 거야. 대책 안 서게시리.’
“아휴, 집들이 숨 쉴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네.”
“서울이 워낙 그렇지 뭐.”
이때, 차가 회전하면서 주하의 몸이 강수에게 쏠렸고, 매끄럽고 봉긋한 가슴이 강수의 팔을 지긋하게 눌러왔다.
‘흡!’
물컹한 감촉이 오른팔을 자극했고, 그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감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잠깐이었지만 오른팔에서 짜릿한 자극이 전신으로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이상하게 물컹한 가슴의 촉감이 너무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얇은 브래지어를 한 것 같았다.
이번엔 차가 반대편으로 회전했다.
“앗!”
주하가 얼른 양손으로 강수의 팔을 잡아 옆으로 쏠리는 몸을 가누었다.
차창 밖 경치를 구경하는 것처럼 일부러 강수 옆에 밀착했던 주하는 반사적으로 강수의 팔을 잡고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에서 이상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팔을 잡고 나니 그 이상한 기운이 요동치는 듯했다.
‘파, 팔이 엄청 단단해!’
팔을 붙잡고 있는 손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고, 말할 수 없는 달콤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전신에서 차올랐다.
‘너, 너무 좋아. 놓고 싶지 않아.’
주하는 자신도 모르게 강수의 팔을 가슴에 꼭 안았다.
봉긋한 가슴이 짓눌리면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자극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졌다. 강수가 셔츠를 입었지만 옷감 속의 맨살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극이 너무 감미롭고 좋았다.
주하는 잘 익은 홍옥처럼 붉게 달궈진 얼굴로 창 밖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강수는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는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 애를 먹었다.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끊이지 않고 계속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욕구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를 한차례 흔든 강수는 힐끔 주하를 보았다.
주하는 자신의 팔을 꼭 안고 초점 없는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 해영 씨만 없었으면 참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임해영이 운전하고 있다.
임해영만 없으면 입이라도 맞췄을 것 같았다. 임해영 때문에 남자와 짜릿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주하의 말이 이해되었다. 단둘이 진한 스킨십을 하고 싶어도 임해영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니까.
‘유산 때문에 연애도 맘대로 못했겠구나. 왠지 불쌍하네···. 하지만 졸업 선물로 5층 건물을 상속받았으니까 암울한 대학 생활은 충분히 보상받은 거겠지?’
임해영은 주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팔각정 휴게소에서 서지 않고 아예 속도까지 낮춰 운전했다.
임해영이 아무리 저속으로 운전을 해도 길은 끝나기 마련이다. 길도 끝나가는데 언제까지 주하와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강수가 임해영을 불렀다.
“해영 씨!”
“예?”
“어디로 가는 거죠?”
“글쎄요, 어디로 모실까요?”
이제야 정신을 차린 주하가 강수의 팔을 풀고 옆으로 슬슬 물러났다.
“주하야, 어디 갈지 정했어?”
주하가 강수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곁눈질로 강수를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오빠, 한정식 괜찮아요?”
“응, 난 좋아.”
“그럼 한정식집으로 갈게요. 해영 언니, 송월정으로 가 줄래요.”
“예, 아가씨.”
북악스카이웨이를 벗어난 랜드로버는 한남동으로 향해 달렸다.
송월정에서 푸짐한 한식을 대접받은 강수는 주하와 헤어져 택시를 잡았다. 주하가 아파트까지 태워주겠다고 한 것을 임해영 씨에게 미안해서 택시를 탄 것이다.
집에 도착한 강수는 컴퓨터부터 켜놓고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티에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았다.
‘핑크티티 팬클럽에 들어가 보자.’
강수는 포털사이트에서 카페를 검색해 핑크티티 팬카페에 접속했다.
화면에 해변에서 귀엽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다섯 명의 핑크티티 멤버가 나타났다.
‘어, 내 그림이다.’
그리고 그 아래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타이틀은 ‘이강수 화가님이 그려준 세나’였다.
“하하. 내 이름도 들어가 있네?”
그림을 클릭했다.
캬드늄 오렌지, 샙 그린, 시룰리언 블루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맑고 깨끗한 색감의 배경과 함께 밝게 미소 짓고 있는 세나 얼굴이 모니터에 가득 나타났다. 리사이즈를 조금만 한 모양이었다.
물감으로 표현된 얼굴은 사진과는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상큼하고 발랄한 얼굴에 미소 짓고 있는 세나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같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댓글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예쁘니: 와, 진짜 세나 언니? 너무 행복해 보여요.
-티티with: 그림 너무 마음에 들어! 색깔 좀 봐. 이건 원화로 봐야 해.
-아이다람: 색감이 왜 이렇게 환상적? 화가가 이강수 아는 사람 있니?
-마튜: 듣보잡 화가인데? 그림은 솔까 괜춘네.
-미니미니: 화가면 원래 이 정도 그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인천수니: 보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네. 이 그림 뭔가 특이하다?
그림에 시비 거는 댓글 보다는 좋다는 댓글이 더 많았다.
흐믓한 미소를 지은 강수는 페이지에서 빠져 나와 일단 팬카페 가입부터 했다.
가입 페이지에서 닉네임을 만들고, 질문 항목을 기입한 후, 가입 아이콘을 클릭했다.
<님은 핑크티티 공식 팬카페 준회원으로 가입되셨습니다. 가입을 환영합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과 사랑을 부탁드려요~~>
준회원에 가입됐다는 축하 메시지가 떴다.
‘가입은 했고.’
강수의 목적은 핑크티티 팬카페 회원 수 한 명 늘리는 것이다.
카페 회원 수는 3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방문 수는 5백 대로 회원 수에 비교하면 적지 않았다. 각종 게시판 가운데 N표시가 달린 것은 5개 정도였다. 이래저래 팬카페 활동이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다.
‘친구들한테도 가입하라고 할까?’
자신까지 4명 더 늘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만 머릿수 채우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강수는 종대, 동석, 범일 등 친구들에게 걸그룹 핑크티티 팬카페에 가입하라고 문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