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6회
로비로 올라와 강수에게 기대어 걷던 선예가 발끝을 세워 강수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강수옵빠, 너무 어지러워요. 좀 쉬었다 가면 안 돼요?”
입술이 귓불에 살짝 닿았고 숨결은 강수의 귓가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귓불에서 찌릿한 감촉이 전해졌다.
신경이 곤두선 강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뭐? 쉬다니? 어디서?”
“어디긴요. 위에 객실 많이 있지 않아요?”
“너 여기가 어딘 지나 알아?”
“알고말고요. 그런 것두 모를 까봐.”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술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 어서 나가자.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옵빠아아, 한번쯤은 이런 근사한 호텔에서 포근하게 잠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도 먹는 게 꿈이었다고요오. 폼 나게 하룻밤만 지내면 안 돼요?”
선예가 로비에서 강수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다시 떼를 썼다.
강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선예를 달랬다.
“사람들이 보잖니. 창피하지도 않아?”
선예가 로비를 두리번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지들이 보면 어쩔 건데? 남일 신경 끄고 자기 할 일이나 잘하라고 그래요.”
선예의 목소리가 주변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좀 쉬었다 가자는데 뭐가 겁나서 빼고 있어요? 쉬었다 가는 게 그렇게 싫어요?”
프론트의 호텔 직원은 물론이고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강수가 손으로 선예의 입을 막았다.
때마침 고급스러운 슈트로 쫙 빼 입은 젊은 친구 둘이 강수와 선예의 옆을 지나며 대화하는 나직한 말소리가 오감이 예민해진 강수의 귀로 흘러들었다.
“쯔쯧••• 여자한테 술을 얼마나 먹였으면 아주 인사불성이야.”
“엄청 영계인데. 저 친구 횡재했어.”
“왜? 저 놈이 부럽냐?”
“씨발, 좆나 부럽다. 나도 당장 저런 영계를 찾아봐야겠어.”
“미친놈. 정난 씨 정도면 됐지 무슨 영계 타령을 하고 지랄이야.”
강수가 엘리베이터 홀로 걸어가는 두 사내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술을 먹이긴 누가 먹였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긴.’
강수는 두 사내를 향해 속으로 한차례 욕을 하고 선예를 진정시켰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출래? 응? 사람들이 다 우릴 쳐다보잖니.”
강수의 허리를 팔로 감고 있는 선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예의 고집과 술주정에 두 손 든 강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객실을 체크인 했다.
카드키를 받은 강수는 선예의 허리를 안고 엘리베이터 홀로 잰걸음으로 갔다.
술에 취한 선예를 부축하고 엘리베이터 홀에 서 있는 강수는 괜히 죄를 짓고 도망치는 죄인 같은 심정이었다.
마치 미성년자와 호텔에 온 것 같이 안절부절 못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강수는 땡!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강수의 오른팔에 찰떡처럼 붙어있었던 선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자동적으로 딸려 들어갔다.
강수는 810호 안으로 들어가 카드키를 홀더에 꼽고 나서야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실내에 조명이 들어왔다.
일반객실이었지만 침대와 2인용 탁자, TV, 화장대 등이 갖춰져 있었고, 공간도 좁지 않았다.
강수의 팔에서 떨어져 나온 선예가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출렁!
침대가 한차례 요동쳤다.
“아, 좋다. 이대로 자고 싶다.”
눈을 감고 잠시 대자로 활개를 치고 있던 선예가 일어나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제 됐다.”
선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강수를 쳐다봤다.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어요.”
난감한 얼굴로 탁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수에게 바보처럼 웃었다.
“헤헤, 내가 고집 부렸다고 화난 거 아녜요?
“화 난 건 아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너와 호텔방에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긴 하다.’
“화가 안 났다니 다행이다. 오빠, 옷 벗게 고개 돌려줄래요?”
“어? 그, 그래.”
당황한 강수가 몸을 돌렸다.
비록 뒤 돌아 있지만 자켓과 탑, 스커트와 스타킹 등을 훌훌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잡혔다.
“됐어요.”
강수가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올라서 발그레한 얼굴만 이불 밖으로 내민 선예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침대가 넓으니까 오빠도 여기서 자요. 오빠는 나 지켜 줄 거죠?”
“그거야 당연하지. 수호천사가 되기로 했잖아.”
“헤헤, 고마워요. 근데 졸리다.”
자기 할 말만 한 선예는 눈을 감고 고르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뭐야,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자는 거야? 그래도 잠 안자고 술주정하는 거보단 낫다.’
위층 대학생 여자애와 호텔에 와 있다는 상황이 난감했다. 제정신이었으면 절대 선예와 호텔에 투숙했을 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됐지? 술기운 때문인가?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다.’
술에 취해 잠든 선예를 두고 혼자 돌아가기도 내키지 않았다.
선예가 무슨 생각으로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침대에서 잘 수는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 강수는 프론트에 요와 이불을 부탁했다. 잠시 후, 호텔 직원이 가져 온 요와 이불을 받아 바닥에 깔았다.
샤워를 하고 팬티와 러닝셔츠를 입고 나온 강수는 침대 옆에 서서 잠이 든 선예를 착잡한 심정으로 잠시 내려 보았다.
‘나 참. 이 애와 호텔을 다 오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깜찍하게 생긴 선예는 씻는 사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예쁘긴 하네.’
강수는 위층 대학생 여자애와 호텔에 투숙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수호천사를 자처했지만 속옷만 입고 잠들어 있는 선예를 보니 남자의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꼴깍!
속이 타는 듯 긴장되었고 마른 침이 목을 넘어갔다.
‘휴, 어차피 건들지도 못하는데•••.’
강수는 끓어오르는 정염의 불꽃에 물을 끼얹듯이 불을 끄고 자려고 몸을 돌렸다.
“음냐.”
이때 목까지 이불을 덮고 있던 선예가 답답한지 아니면 잠버릇인지 몰라도 느닷없이 이불을 찼다.
강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흡! 노, 노 브래지어?’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우윳빛 뽀얀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은 봉긋한 라인을 유지했다. 유두는 작았지만 선홍색이 앙증맞았고 또 아름다웠다.
유두를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심벌로 피가 몰려갔지만 선예의 하얀 살결과 매혹적인 몸매에 정신을 빼앗겨 인식하지 못했다.
‘설마? 팬티도?’
문득 강수는 노 브래지어면 노 팬티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살금살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으헙! 이, 이 녀석 원래 알몸으로 자나?’
하체가 전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부분은 팬티마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선예의 알몸을 목격하고 말았다. 강수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심벌이 서서히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으으.’
강수는 천천히 이불을 선예의 목까지 덮어주고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간 무슨 짓을 할지 장담 못했다.
심호흡을 깊게 한 강수는 조명을 죄다 꺼버렸다. 선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폭주하는 흥분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어둠이 실내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더듬더듬 화장실로 들어간 강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왔다.
방으로 나와 화장실 전등을 끄자 칠흑 같은 어둠이 실내를 집어삼켰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강수는 재빨리 깔아 논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술에 취해 자는 애를 건들었다간 인생 망친다. 잠이나 자자. 잠자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여튼 이게 무슨 고역인지 모르겠구나.’
강수는 자신의 불쌍한 신세를 한탄하며 잠을 자기 위해 오만가지 잡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딱딱해진 심벌은 여전히 성을 냈고, 선예의 나신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젠장! 더럽게 잠도 안 오네. 숫자를 거꾸로 세볼까?’
마지막 방법으로 만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구천구백구십구. 구천구백구십팔. 구천구백구십칠....’
드디어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강수는 힘겹게 잠 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다.
*
선예는 자신의 유혹을 참아내고 잠이든 강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술에 취한 척하고 스킨십을 시도하면 유혹에 넘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강수처럼 심성이 곧은 사람을 절망과 불행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아빠와 가족을 위해 전인규가 지시한 일을 해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꽃뱀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갈보다 독한 마음을 갖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예는 아버지 사업이 동업자의 배신으로 위기에 몰리고 부도 날 지경에 처하게 되자 부모님 모르게 몰래 밤업소에 나갔다. 웃음과 몸을 팔아야 했지만 등록금과 생활비는 물론이고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었다.
업소에 나간 지 한 달쯤 됐을 때 전 전무란 사내를 만났다.
전 전무는 잠자리 한 번에 200만원을 스폰했고, 명품을 선물해주는 VIP고객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2, 3주에 한 번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그가 유성홈쇼핑의 전무라는 사실은 두 번째 만남에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외부에서 일부 자금을 빌려서 개발한 특허까지 받은 의자, 허리를 편안하게 해 주고, 척추를 교정해 주는 신제품의 판로를 개척할 수 없어서 고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동업자가 어음할인을 하고 잠적한 이유도 제품 판매의 불확실성이 한몫 거들었다.
한데 아버지가 개발한 제품을 유성홈쇼핑에서 판매할 수만 있다면 사업이 일거에 정상궤도에 안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예는 별반 기대는 하지 않고 전인규에게 아버지 회사의 제품을 홈쇼핑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해 보았다.
의외로 전인규는 한번 알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전인규가 달콤한 제안을 해 왔다.
자신이 지시하는 일을 해주면 아버지 사업에 3억을 투자하고 기능성 의자는 유성홈쇼핑에 런칭하겠다고 했다. 그가 원하는 일만 해주면 부도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회사와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선예는 전인규의 계획에 따르기로 하고, 전인규가 알려준 중산아파트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전인규는 한 사내, 이강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강수가 인생의 패배자, 폐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강수의 사랑을 얻고, 1억을 갈취한 후 배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강수는 엄청난 충격에 빠질 것이 틀림없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중산아파트로 간 첫날 이강수를 만났다. 선예는 이강수에게 말을 걸었고,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나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강수를 유혹하기 시작했고, 오늘 호텔에 투숙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문득 선예는 전인규의 강수오빠에 대한 무서운 적의가 궁금해졌다.
학연, 지연이 아니면 서로 만날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다.
‘전 전무는 무슨 일로 강수오빠와 원한을 맺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해봐도 집히는 점이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심적, 정신적 고통만 커질 뿐 소득은 없었다.
여명이 밝을 때까지 뒤척이며 뜬 눈으로 밤을 샌 선예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침구를 정리하고 간단한 메모를 탁자 위에 놓고 객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