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7회
일요일 아침.
버릇처럼 6시쯤에 눈을 뜬 강수는 이불이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텅 빈 침대를 볼 수 있었다.
‘아, 언제 갔지? 세상 모르게 잠 자고 있었네.’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강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풋, 조식 먹는 게 꿈이라고 하더니 술 주정한 게 창피했던 모양이지? 새벽같이 도망쳤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던 강수는 탁자 위에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호천사에게! 오빠, 제가 어제 버릇없이 굴고 주사 부렸죠? 너무너무 미안해요. 앞으로 절대 주사 안 부릴게요. 용서해 줄 거죠?
추신. 오빠 얼굴 보기가 넘넘 민망해서 먼저 가요. 그대신 ‘선예 일일 이용권’ 발급해드릴게요. 언제든지 불러주면 달려갈게요. 꼭 연락이요!
‘크크, 창피한 줄은 아네.’
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제는 좀처럼 믿기지 않은 밤을 보냈다. 바닷가재 레스토랑에서 호텔의 룸까지 보냈던 그 긴 시간은 마치 무슨 로맨스 영화를 찍은 것만 같았다.
‘나도 빨리 나가자.’
강수는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서 나와 신논현역을 향해 걸어갔다. 좀 늦긴 했지만 서두르면 오전 마나수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강수는 흐트러진 심신을 다잡으며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텔에서 편히 잤는지 몸에서는 활력이 넘쳤다. 또한 밑도 끝도 없이 의욕이 지하 암반에서 솟구치는 암반수처럼 마구 치솟았다. 선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여파 때문인지 하루 빨리 인류 유일의 마법사도 되고 싶었고, 그림이 고가에 팔리는 화가도 되고 싶었다.
‘시간이 아까워. 오늘부터는 뛰어서 가자.’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선 강수는 수련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
해는 중천에 떠 있었지만 인적이라곤 없는 산중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푸르게 피어난 짙은 녹음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수련장소에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강수는 오늘따라 뭔가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매일 보는 풍경이 변할 리 없지만 강수의 마음가짐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강수는 땀에 젖은 등산복을 훌훌 벗고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몸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바닥에 쿠션을 깔고 앉아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 한 강수는 내면을 관조하며 심장에 새겨진 마나시드를 응시했다.
강낭콩 크기로 커진 마나시드가 곧 심상에 떠올랐다.
호흡을 통해 폐부로 들어온 미립자인 마나는 마나시드의 인력에 끌려 마나시드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렀다.
강수는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강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수련하면 정말로 마나하트를 만들고 마법사가 되는 걸까?’
사실 마법사가 되면 뭘 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투팍탈이 전이해 준 마법을 살펴보면 1서클 마법만 해도 불과 얼음을 만들고, 바람을 일으키고,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시킬 수도 있다. 또한 실드마법은 말 그대로 신체를 보호하는 방어막으로 물리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다. 실드마법은 서클이 올라갈수록 방어막이 견고해지고 보호의 범위가 넓어진다.
전투에서 엄청 유용한 마법이다.
하지만 이런 마법을 실생활에서 사용할 일이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다.
현실에서 가장 쓸모가 있는 마법의 하나는 치유마법이다.
치유마법은 3서클 마법의 하나로 실드마법처럼 서클이 올라갈수록 치료의 효과가 커진다. 치유마법을 펼칠 수 있는 3서클은 너무나 먼 경지였다.
‘지금까지 수련으로 마나시드가 꽤 커지긴 했는데 마나하트는 얼마나 커져야 되는 걸까? 그래도 분명히 커지고 있으니까 마나하트도 만들 수 있겠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
송월정.
강 팀장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송월정에 도착한 강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다.
룸 안에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중후한 인상의 중년 사내와 갈색의 콤비를 입은 40대 초반의 강승호 팀장이 강수를 반겼다.
두 사람 모두 배도 나오고, 적당하게 살이 쪘는데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이강수입니다.”
“하하. 이 작가, 어서 오시오.”
“자네가 이강수 작가인가? 무지개출판사 도경만일세. 이쪽으로 앉게나.”
“예, 사장님.”
사장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꽃등심과 야채 등 이미 재료가 셋팅되어 있었다.
강 팀장이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고기부터 먹고 나서 이 작가와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지요?”
도경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식사부터 해야지.”
강 팀장이 탁자의 구석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곧 남자 직원이 숯불을 설치했고, 젊은 여직원이 고기를 구워주기 시작했다.
달달하고 감칠 맛나는 냄새가 숯 향과 함께 실내에 퍼졌다.
여직원이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올려주었다.
“자, 어서 들게.”
“아닙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사장님이 먼저 드셔야죠.”
“하하. 그럴까?”
도경만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기를 한 점 집었고, 강 팀장에 이어 강수도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참나무 숯불에 구운 꽃등심은 독특한 참나무의 향이 베여서 고기의 육즙과 함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도경만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가? 맛이 괜찮나?”
“예, 이렇게 감칠맛 나고 육즙이 맛있게 베어 있는 한우는 처음 먹어봅니다. 정말 맛있네요.”
“맛있다니 많이 들게.”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강 팀장이 술을 권했다.
“이 작가, 고기에는 레드 와인이 제격입니다. 와인 한 잔 하죠?”
“아, 예.”
잔에 담긴 와인의 향을 맡은 후 한 모금 입에 물고 맛을 음미했다.
와인은 오랜 숙성을 거쳐야만 가질 수 있는 농밀하고 풍부한 과일 향과 오묘한 풍미를 품고 있었다.
"아, 향도 맛도 좋은데요."
“하하. 마실 만하죠?”
“예. 부드럽고 이런 깊은 맛이라니. 맛있습니다.”
강수는 와인과 고기의 환상적인 맛의 조화를 만끽하며 포식했다.
식탁은 남은 고기와 와인 잔만 남겨놓고 깨끗하게 치워졌다. 이제 본론을 얘기할 차례였다.
도경만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후 말했다.
"이 작가, 이번에 작업한 그림책이 1쇄가 매진되어 벌써 2쇄 인쇄를 찍어 냈다네. 우리가 출간한 그림책 가운데 가장 빠른 매진 사례지. 이 작가가 수고해준 덕분이 아닌가? 고맙네.”
“아, 하하. 너무 과한 칭찬을 하시네요. 저야 뭐, 그림만 그린걸요. 이야기가 좋아서 잘 팔리겠죠?”
“물론 이야기도 재미있고 흥미를 끌 수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림책은 캐릭터와 그림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 이번 작품은 이강수 작가의 그림이 오히려 더 큰 작용을 한 것 같네. 과한 칭찬이 아닐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작가를 직접 만나러 온 이유는 좋은 작품을 그려주어 고마움을 직접 표시하고 싶어서였네. 그리고 차기작을 의논하면 어떨까 싶네.”
무지개출판사 사장이 직접 온다고 했을 때 작품을 의뢰할 것으로 강수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혹시 현재 작업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도경만은 예상하고 있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렇군. 이번 작업은 언제가 마감인가? 마감이 끝나는 대로 우리 작품을 해 주면 좋겠네만.”
“그게••• 현재 하는 작업이 일러스트가 아니고,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전시회에 출품할 회화작품입니다.”
회화작품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 팀장이 질문을 했다.
“이 작가, 왜 갑자기 회화를 그리는 겁니까? 회화로 돈 벌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예, 저도 압니다. 그래도 제 원래 꿈은 화가였습니다. 다만 재능이 부족하고 현실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까지 일러스트에 전념해 왔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찮게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전업화가의 길.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진작에 포기했다.
얼마 전, 실의에 빠져 심기일전하기 위해 백운대에 올랐을 때는 막연히 창작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수표교에서 당당하게 꿈이 화가라고 말하는 꼬마 채준이를 만난 후, 화가의 길에 대해 고민을 했다. 또한 고향 집에서 도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아버지가 질타했을 때는 웃으며 대꾸했지만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실패할 것이 뻔하면 도전할 이유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패가 뻔히 보여도 실패하기 전에는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도전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강수는 나름 그렇게 생각하며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럼 일러스트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앞으로 일러스트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옛! 정말이요?”
강 팀장이 놀라서 반문 한데 반해 도경만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작가. 회화를 그리겠다는 건 이해하지만 생활을 위해서라도 굳이 일러스트까지 그만 둘 필요가 없을 텐데요? 화가 중에는 일러스트 하는 분도 꽤 있지 않습니까?”
물론 두 가지를 병행하는 화가도 많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예. 그렇긴 한데 전 지금까지 오로지 일러스트에 전념해 왔기 때문에 이번엔 반대로 회화에 전념해보려 합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경만이 강수에게 말했다.
“이 작가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네. 남의 그림을 그려줘야 하는 일러스트는 창작에 방해만 될 뿐이지. 하지만 그림책 일러스트가 창작에 방해되기만 하는 것은 아닐세.”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자네도 잘 알겠지만 현대미술은 설치미술은 물론이고 상식을 파괴하는 온갖 실험적인 작품이 각광받는 시대가 아닌가? 영국의 팝아티스트 케빈 터크는 먹다 버린 말라비틀어진 사과를 ‘실락원’이란 제목을 붙여 경매에 출품했지. 그것이 500만원에 낙찰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케빈 터크의 작품 ‘실락원’은 강수도 익히 알고 있었다.
먹다 남은 사과 찌꺼기를 방부 처리한 작품 ‘실락원’이 이유 없이 500만원에 낙찰될 리는 없다.
강수가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이 작품이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의 훌륭한 이야기의 대입 때문이다.
‘실낙원’은 영국 시인 밀턴의 장편 서사시이며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주제로 쓰여진 명작이다. 케빈 터크는 이를 모티브로 먹다 남은 사과를 선택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였고, 관객은 그 이야기에 자신을 투영하여 공감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경매시장에서 의외의 가격으로 낙찰될 수 있었다.
케빈 터크는 yBa(young British artist) 작가의 한 명이다.
영국의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yBa 작가들은 강한 실험정신을 앞세워 예술에 대한 기성의 사고와 틀을 깨는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개념미술을 선보였다.
불쾌함과 혐오감마저 일으키는 그들의 작품은 ‘주변의 너저분한’ 것에 의미를 부여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기몰이를 하며 논란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영국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강수는 ‘실락원’이나 자신의 피 4.5리터로 자신의 두상을 만든 마크 퀸의 ‘self’ 같은 작품은 선호하지 않는다.
예술과 미술을 바라보는 심미안과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그림동화책의 원화도 원화전을 개최할 정도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네. 물론 그 가치를 회화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사장님의 말씀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네. 자네가 직접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 어떻겠나? 바로 자네의 그림동화책을 창작하는 것이지.”
“아!”
도경만 사장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릴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을 창작하는 것.
다만 강수는 죽어라 그림만 그렸지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었다. 글을 창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