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20화 (20/197)

# 2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0회

밖으로 나온 강수는 종대에게 고맙다는 톡부터 날렸다.

종대가 아니었으면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을 리 없었다.

종대의 답장이 왔다.

-축하한다. 최소 3작품은 출품해야 하는데 준비해 놓은 건 있냐?

일러스트에 매몰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준비된 작품이 있을 리 없다.

-아니, 지금 한 작품 들어갔다.

-두 달 남았는데 좀 빡빡하겠다.

-좀 그렇지? 그래도 일러스트 하기로 한 작품이 취소 되어 할만 해. 넌 어때?

-두 작품은 끝났고 두 작품 그리고 있다. 너에 비하면 널널 하지.

-알았다. 수고해라. 개막일에 술 한잔 하자.

-오케이. 들어가라.

톡을 끝낸 강수는 흥이 절로 나서 날아가는 기분으로 종각역을 향해 걸었다.

*

우우웅! 우우웅!

작품 눈물의 인물과 배경 스케치를 끝내고, 바탕색을 칠하고 있던 강수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집어 확인했다.

무지개출판사 전수민 대리와 미팅시간을 맞춰 놓은 알람이었다.

어제 전수민이 원화를 직접 돌려주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평상시는 우편으로 보내왔으나 이번에는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수유역 근처 카페 ’퍼플로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중간지점인 대학로에서 약속장소를 잡으려고 해도 강수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퇴근 후 찾아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파트에서 제일 가까운 역인 수유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간단하게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강수는 산책 삼아 걸어서 퍼플로즈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한 강수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푸치노를 주문해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 탁자에서 전수민이 손을 들었다.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전수민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전수민은 직장 여성답게 밝은 색의 투피스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탁자에는 숲 속 다람쥐 가족의 원화가 놓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대리님.”

“예.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 작가님 얼굴에서 빛이 나요. 작업을 끝내니까 좋으신가 봐요?”

“하하. 요즘 운동하면서 푹 쉬고 있거든요. 4호선이 퇴근시간에는 지옥철인데 많이 복잡했죠?”

“아뇨. 30분 일찍 퇴근해서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하하. 그럼 좀 낫죠.”

전수민이 조심스런 손길로 원화를 봉투에 담아 강수 앞으로 밀었다.

“그림이 좋아서 원화를 감상하고 있었어요.”

“아, 작화 기법을 좀 바꿨는데 전 대리님 맘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예. 정말 이번 그림은 저뿐만 아니라 팀장님도 만족해 하셨어요. 얼마나 맘에 들었는지 이 작가님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세요.”

“어, 정말이요? 하하, 반응이 기대 이상이어서 앞으로 좀 더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야겠는데요?”

“호호, 그럼 좋죠. 참, 편집과 디자인을 끝내서 파일이 인쇄소로 넘어갔어요. 다음 주에 그림책이 출간되면 바로 작가님께 보내드릴게요.”

“아, 이번에는 무척 빠르게 출간되네요?”

“이번 작품은 감이 좋다면서 팀장님이 만사 제껴 놓고 숲 속 다람쥐 가족 출판에 매진하셨거든요. 덕분에 편집팀이 야근을 했지만요.”

“하하. 고생하셨네요.”

“아뇨. 제가 할 일인데요.”

강수는 잔을 들어 카푸치노를 한 모금씩 마시고 내려놓았다.

“음•••.”

전수민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낌새를 느낀 강수가 수민을 슬쩍 살펴보았다.

‘할 얘기가 뭔데 저러지? 심각한 얘기인가?’

전수민은 할 얘기가 있다며 직접 수유역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주저하면서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전 대리는 업무상의 얘기라면 뜸을 들이지 않는 스타일이다.

‘개인적인 일? 나하고 개인적으로 볼 일이 없을 건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강수가 물었다.

“전 대리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아, 예.”

뭔가 말하고 싶어 망설이던 전수민이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이 작가님. 이번 원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요••• 제가 몇 점 구입하면 안 될까요?”

“원화 구입이요?”

“예. 이번 작품은 작가님이 작화 기법을 바꿔서 그런지 캐릭터도 독특하고, 환상적인 색감이나 밝은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정말 집에 걸어놓고 언제든지 보고 싶어요. 그래서 부탁을•••.”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 넣었던 원화를 꺼냈다.

“별 일도 아닌데 왜 말을 못 하고 계셨어요?”

“제가 전부 구입하는 것도 아니고 몇 점만 구입하려다 보니 이빨 빠진 것처럼 되잖아요. 그래서 망설였죠.”

“이 작품 말고도 원화는 집에 쌓여 있어요. 이빨 빠져도 괜찮으니까 대리님 맘에 드는 걸로 얼마든지 고르세요.”

전수민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그럼.”

전수민이 찍어 둔 작품이 있었는지 네 점을 골라냈다. 네 점 가운데는 첫 번째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여유만 있으면 전부 구입하고 싶은데 월급장이다 보니까 무리할 수가 없어서 네 장만 구입하려는 거에요. 저, 근데 가격은•••.”

강수가 씨익 웃었다.

“전 대리님에게 돈을 어떻게 받아요. 전 대리님이 지금까지 저를 위해 애써주셨는데 제가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 네 점은 선물입니다.”

전수민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러스트 원화가 순수 회화는 아니지만 유명 동화 작가의 원화는 소장가치가 있어서 상당히 비쌌다.

비록 이강수 작가는 컬렉터가 주목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작품만큼은 보는 이에게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때문에 액자에 담아 놓고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었다.

A3 크기면 대체로 6호쯤 되는 사이즈다.

회화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름 고민한 전수민은 작품당 25만원을 생각하고 100만원을 준비했다.

“아니에요. 작가님이 열정을 다 해서 그린 그림인데 공짜라뇨. 그럴 순 없어요.”

전수민이 황급히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공짜가 아니라 선물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리고 선물을 주고 돈을 받는 경우는 없잖아요. 그건 넣어두세요.”

“그래도 이건•••.”

전수민이 감격한 얼굴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너무 감사해요. 제겐 과한 선물이지만 감사히 받을게요.”

강수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참, 원화 좀 줘 보실래요. 이름 적어 드릴게요.”

“아, 예. 여기.”

전수민이 원화 4장을 강수에게 주었다.

아크릴물감으로 채색을 했으나 당장은 동일 물감이 없는 관계로 강수는 원화의 뒤에 서명을 남겼다. 자신만의 필체로 이강수를 흘려 쓰고 날짜와 행복하세요라는 글을 적어 다시 전수민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사인까지 해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그럼 일어날까요?”

“아, 이 작가님. 혹시 저녁 드셨어요? ”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잘 됐네요. 저만 선물 받고 입 닦을 순 없잖아요. 저녁이라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녁마저 거절하면 너무 매정하기도 했고, 아직 식사를 못해 배도 고팠다.

“저녁을 사주신다면 맛있게 먹겠습니다.”

강수는 가격대가 꽤 나가는 한정식 집으로 안내했고, 두 사람은 배터지게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

불규칙했던 강수의 생활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동이 틀 때쯤 일어나 밤새 잠든 세포 조직을 활성화할 겸 수련 장소까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간다. 활성화된 전신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 11시 30분까지 마나회로를 수련한다.

수련이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창작에 열중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 어느새 취침 시간으로 정해 놓은 밤 11시가 된다.

밤 11시에 알람이 울리면 작업을 정리한 후 간단히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날짜 가는 줄도 몰랐는데 4월이 훌쩍 지나고, 5월의 첫날, 1일이다.

이제 강수는 좌정해서 5분 정도면 무아지경에 들었고 마나를 공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마나를 축적하고, 알람이 울리면 깨어나 하산한다.

오늘도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솔밭으로 내려온 강수는 음식점을 찾아 덕진대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뭘 먹는다?’

강수는 점심을 뭘 먹을지 고민했다. 매일 점심을 사먹다 보니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렇다고 한 집에서 똑같은 걸 먹는 것도 서너 번이지 금방 질렸다.

“강수오빠!”

덕진대 근처에서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강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백팩을 멘 눈부시게 아름답고 날씬한 여성이 밝게 웃으며 달려왔다. 검정 면바지에 끈이 있는 구두, 체크무늬 셔츠 안에 흰색 탑을 받쳐입은 여성은 14층에 사는 선예였다.

‘얘가 덕진대 다니는구나.’

“오빠 여기 웬일이에요? 등산 갔다 와요?”

“응, 운동 삼아 산에 다녀.”

“아, 운동하러 산에 다니는구나. 점심은요?”

“그렇지 않아도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던 참이었어. 넌?”

“저도 점심 먹으러 나왔어요. 친구들이 바빠서 혼자 먹는 줄 알았는데 잘됐다. 우리 같이 먹어요.”

“그럴까?”

선예가 냉큼 팔짱을 꼈다.

융기한 가슴의 부드러운 탄력이 팔을 타고 전해왔다. 강수가 살짝 놀라서 움찔했다.

‘아니, 얘는 뭐야? 뭐, 좋긴 하지만 얼마나 봤다고 팔짱을 끼지?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을 리는 없을 거고. 성격이 본래 활달해서 그런가? 근데 땀을 흘려서 냄새 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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