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1회
땀냄새가 나서 불쾌감을 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동생뻘이라고는 해도 냄새 때문에 나쁜 이미지를 주기는 싫었다.
“선예야, 내가 등산하느라 땀을 많이 흘려서 냄새 날 껀데. 괜찮겠어?”
“어디 봐요.”
선예가 냄새를 맡아보겠다며 강수의 목에 얼굴을 들이대고 킁킁거렸다.
“뭐, 뭐냐!”
당황한 강수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물러나려고 하자 선예가 팔을 꽉 잡았다.
“냄새 난다고 해서 팔짱 껴도 되나 안되나 확인해보려는 거잖아요. 가만 있어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둘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길가에서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인상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 남자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강수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생각보다 나쁜 냄새는 아닌데요, 뭘. 팔짱 껴도 되겠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글쎄? 나도 식당을 찾고 있었거든. 근처에 맛집처럼 잘 하는 데가 있니?”
“그럼 사일구 탑 쪽으로 가요. 그쪽에 괜찮은 음식점이 여럿 있어요.”
덕진대에서 4.19민주묘지는 3, 4정거장이지만 걸어서 갈 만한 거리다.
강수의 오른팔을 붙잡은 선예는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선예의 외모와 몸매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마주 오는 남자들은 선예의 몸매를 한차례 훑고 지나친 후, 고개를 돌려 뒷태까지 감상할 정도였다.
‘선예가 예쁘긴 하지.’
연예인과 맞먹는 선예의 미모는 강수도 인정했다.
“강수오빠.”
“응? 왜?”
“히히. 우리가 연인처럼 보여서 부러운가 봐요. 사람들이 계속 쳐다봐요.”
“우릴 보는 게 아니라 널 보는 거야.”
“여자들은 오빠를 보던데요? 오빤 오빠가 매력적으로 생긴 거 몰라요?”
“그, 글쎄? 그냥 괜찮다 정도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치, 알만해요.”
“뭘?”
“오빠가 옷도 대충 입고, 외모에 무관심한 건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이라구요. 외모가 받쳐주니까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그 자신감이요.”
“흠, 그래?”
평소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선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먼저 여자에게 대시한 적은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몇 번 어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친구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고등학교 때는 후배 강지나가 있었고, 대학 1학년 때는 윤혜주, 2학년 때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쫓아다니는 후배는 있었어도 애인은 없었다. 군복무 후, 3학년에 복학해서 민종희를 만났고, 연인이 되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선예 말이 맞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선예가 찾아간 곳은 웰빙 음식점 타이틀을 내건 소보명가.
남자에겐 원기보양을 돕는 돌솥잡곡밥이, 여자에겐 혈행을 돕는 돌솥잡곡밥이 나온다. 또한 특이하게도 각종 약초와 야채로 반찬을 만들어 상차림을 하는데 보기만 해도 건강해 질 것 같은 밥상이다.
강수가 이사온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근처에 살면서도 처음 와보는 음식점이었다.
강수는 새삼 자신이 돈의 노예가 되어 무미건조하게 살아왔음을 절감했다.
곧 약초로 만든 반찬과 함께 깔끔한 음식이 한 상 차려졌다.
“배고프다. 먹자.”
“네, 맛있게 먹을게요.”
강수는 한약 냄새가 나는 듯하면서 독특하고 깔끔한 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밥을 먹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강수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럼 선예는 무슨 과 다녀?”
“음, 경영학과요.”
“경영학이면 졸업해도 진로의 폭이 꽤 넓은데? 기업체에 취업하겠네?”
“네. 경영학과는 전공 공부하면서 진로에 맞는 공부도 해야 돼요. 난 아빠를 좀 도와주려구요.”
“아빠를?”
“아빠가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데 제가 경영컨설팅 같은 거 해 주면 좋잖아요. 키키, 물론 회사에 들어가서 먼저 열심히 배워야겠지만요.”
문득 선예의 얼굴에서 장난스런 웃음이 사라지고 살짝 근심이 어렸다.
“요즘 아빠가 늦게까지 일한다는데 회사 경영이 쉽지 않나 봐요. 빨리 졸업해서 아빠 일을 도와주면 좋겠어요.”
그림만 그려온 강수는 기업이나 영업, 경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이니까 곧 졸업해서 아빠를 도와줄 수 있겠다.”
“아휴, 아직 멀었어요. 2년 가까이 남은 걸요. 아, 강수오빠, 나 화장실 좀.”
“응. 갔다 와.”
선예가 돌아온 후 식사를 마친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간 강수가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 주세요.”
옆에서 선예가 웃으며 강수의 팔을 잡았다.
“호호. 계산은 내가 했어요. 그냥 나가면 돼요.”
“뭐?”
강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선예를 바라보았다. 계산이 끝났으니 물릴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4.19 사거리를 향해 걸어가며 얼굴을 구긴 강수가 선예를 타박했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계산 했냐? 사회인인 내가 계산을 해야지.”
“알바해서 용돈 넉넉해요. 그리고 오빠는 바닷가재 살 거잖아요. 맞죠?”
바닷가재를 사라는 말에 강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크-- 바닷가재는 바닷가재고. 네가 계산할 필요는 없었어. 학생한테 밥을 얻어 먹었으니 내 꼴이 뭐가 되겠니?”
“헤헤.”
선예가 순박하게 웃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럼 앞으로는 강수오빠가 쭈욱 계산할 거에요?”
“당연하지. 그럼 이 나이에 학생한테 밥을 얻어먹으랴?”
“좋아요, 딜.”
“딜은 무슨. 당연한걸 가지고.”
“앞으로 오빠한테 먼저 물어볼 테니까 기분 풀어요.”
“그래. 알았어.”
선예가 또 냉큼 팔짱을 꼈다.
몽실몽실한 감촉이 팔을 타고 느껴졌지만 남자가 좀스럽게 팔짱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내심 한숨을 내쉬는 강수와 달리 싱글거리며 사거리까지 온 선예는 강의가 있다며 대학교로 돌아갔다.
강수는 선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며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살갑게 굴며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선예가 귀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되기도 했다.
‘뭐, 어쩌다 보는 것이니 상관없겠지?’
*
얼굴이 비칠 것 같은 빛나는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놓은 화려하고 웅장한 실내.
중앙에는 부정형의 무늬가 아름다운 거대한 청석의 회의 탁자 두 개가 마주보고 있었으며, 탁자에는 50여 명의 고급 옷을 입은 장대한 체격의 자랄인들이 의자에 착석해 있었다.
그들은 캬미차야 제국의 황태자 크놀뱌쿠를 위시하여 대신과 귀족, 마법학회의 고위 마법사, 군의 최고 지휘관들이었다.
상석에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려는 듯이 휘황한 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보석이 박힌 황금 옥좌가 놓여있었다.
황금 옥좌에는 그 의자의 주인이며 캬미차야 제국의 황제 크놀노탸마가 앉아 있었다.
선황이 노환으로 서거한 후 65세에 황제에 즉위한 그는 당금 80세였다. 늙은 황제였으나 그의 전신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은은히 뿜어져 나왔다.
모든 이의 시선이 모여있는 실내의 중앙, 회의 탁자 사이에 큐라토퍄가 담담한 목소리로 경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마나로 신체를 보호하고 포탈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산중이었습니다. 저를 따라 포탈을 통과한 수하를 살펴보았는데 120명 가운데 절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를 제외한 모든 수하들의 신체가, 손이나 발끝이 먼지처럼 분해되며 소멸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좌중의 대신과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손, 발이 소멸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역시 사악한 투팍탈이다. 필히 놈이 마법진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구나.”
“나머지 기사는 어디로 갔느냐?”
황태자 크놀뱌쿠가 팔을 들고 나직이 말했다.
“그만 하시오.“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크놀뱌쿠가 큐라토파에게 손짓했다.
“계속 보고해라.”
“저 역시 포탈을 통과한 뒤 신체의 이상을 느꼈습니다. 마나가 빠르게 줄었습니다. 우선 도착한 곳이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 살폈으나 나무는 처음 보는 수종이었고, 산은 산이되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투팍탈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지 잠시 말을 중단한 큐라토파가 이어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우릴 보고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돌아가라고 손짓 하더군요. 그의 옆에는 고블린처럼 작은 물체 하나가 쓰러져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이나 체형을 보면 고블린은 아니었습니다. 수하들의 상태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지체하지 못하고 복귀 명령을 내렸습니다. 수하들이 전부 포탈로 진입한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제가 포탈로 들어갔습니다. 한데 포탈에서 모든 수하가 소멸했는지 오직 저만 생환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황제가 좌중을 훑고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들의 의견을 듣겠다. 말하라.”
은빛으로 빛나는 갑주를 입은 제국군 총사령관 키타뱌가 큐라코퍄에게 물었다.
“큐라토퍄, 자네의 수하들이 소멸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생각해 둔 대답이 있는지 큐라토퍄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마나의 부족 같습니다. 제가 복귀했을 때도 몸을 보호할 마나가 부족했는지 이렇게 신체의 일부가 소멸했으니까요. 저에 비해 마나가 크게 부족한 수하들은 포탈을 통과할 때 아예 소멸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투팍탈의 상태는 어땠느냐?”
“그는··· 신체의 내부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만 봐서는 정상이었습니다.”
크놀뱌쿠가 중얼거렸다.
“결국 놈은 살아 있다는 말이로군.”
크놀뱌쿠가 고개를 돌려 진한 검붉은 색의 로브를 입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법학회의 의장이자 제국에 단 한 명뿐인 8서클 마법사이고, 공작의 작위를 받은 능휼터 경이었다.
“능휼터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동마법진에 신체를 소멸시키는 마법을 혼용할 수가 있소?”
“불가합니다. 이동마법진에 다른 마법을 혼용하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20명이나 되는 기사단의 기사들이 소멸하지 않았소. 더구나···.”
크놀뱌쿠가 손가락으로 큐라토파를 가리켰다.
“경의 눈으로 직접 보듯이 큐라토파의 팔다리도 사라졌소이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소?”
“신이 코탼의 마법진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직경이 무려 30미터에 이르며 수백 개의 마정석을 사용하는 거대한 마법진이었습니다. 또한 마법진에 사용된 룬어는 태반이 이미 실전된 고대의 룬어로 해석이 불가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장은 마법진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의심 가는 마법진이 있긴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건···.”
잠시 말을 멈춘 능휼터가 좌중을 쓸어보았다. 실내의 모든 이들이 호기심과 의혹의 눈으로 능휼터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전설로만 전해져 온 차원이동마법진입니다.”
“차원이동마법진!”
“차원이동이라니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오?
생소한 마법진의 명칭에 실내가 술렁였다.
“차원이동마법진이란 말이오? 처음 들어보는군. 차원이동마법진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마법진이오?
“전설에 의하면 이계로 갈 수 있는 고차원의 마법진. 즉, 우주의 공간을 넘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내의 모든 자들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능휼터 경, 말이 되는 얘기를 하시오.”
누구는 비아냥댔다.
“황당하군. 떠돌이 반역자 투팍탈 따위가 차원이동마법진을 만들어?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군.”
크놀뱌쿠가 팔을 들어 장내의 소란을 잠재웠다.
“능휼터 경, 마법진으로 차원이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오?”
“책으로만 보았을 뿐 소신 역시 그런 마법진이 가능하리라곤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투팍탈이 만든 마법진은 마지막 서클 세 개가 비어 있는 미완성 마법진입니다. 신체의 소멸은 그 세 개의 서클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완성 마법진? 완성되지도 않은 마법진이 작동할 수가 있소?”
능휼터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미완성된 이동마법진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코탼의 마법진은 세 개의 서클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동한 것을 보면 현재의 마법수식을 벗어난 고대의 고차원 마법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흥미롭군.”
듣고만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간단한 한마디 말이었지만 장내의 모든 자들이 소근거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