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회
다음날.
장영봉과 미팅이 잡힌 화요일.
강수는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포트폴리오가 든 커다란 파일을 들고 출력소를 나왔다.
어제 밤을 새워 덧칠 작업한 ‘강가’를 dslr 카메라의 최고해상도로 촬영한 후 칼라 인쇄한 것이다.
인쇄 품질은 생각보다 만족스럽게 나왔다.
밖으로 나온 강수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강가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다른 작품이 수준 이하라 전시회 참가는 어렵겠지? 그래, 이건 다음을 위한 경험으로 생각하자. 이제 시간도 널널하니까 나머지 작품도 전부 다시 그려서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놓아야겠어.’
강수는 퇴짜를 각오를 하고 지하철 역으로 내려갔다.
*
장영봉은 강수의 포트폴리오를 한 장, 한 장 살피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신인화가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섭외한 10명의 친구들은 작품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 기대주들이었다. 그에 반해 학교 후배라는 이강수의 포트폴리오는 빈약하기도 했거니와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도 없었다.
그나마 기교만큼은 수준급이어서 눈 여겨 볼만 했다.
하지만 예술성이나 조형성이 부족하고, 무엇을 말 하려고 하는지 주제의식이 밋밋한 탓에 전문가가 본다면 겉만 화려하고 내용은 비어있다는 평가를 할 것이다.
예술성과 내적 가치가 부재한 작품은 고급식당이나 카페에 걸려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름없는 작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무리 학교 후배이고, 종대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경력도 작품도 선정 기준에 미달이었다.
작년 김종대 개인전이 전체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신인 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작품이 팔렸다. 그때 김종대가 한턱 크게 낸 적이 있어서 웬만하면 참가시키려고 했지만 이 수준의 작품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녀석도 그림을 보면 뻔히 알 텐데? 대체 무슨 연유로 이 친구를 참가시켜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종대에겐 미안해도 어쩔 수 없지.’
장영봉은 강수의 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하며 불참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작품이군••• 어?’
마지막 작품을 살피던 장영봉의 눈이 커졌다.
‘이건 느낌이 괜찮은데?’
작품 ‘강가’를 살펴보는 장영봉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혹시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이 그린 것 아냐?’
강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노을은 강렬하기보단 은은했는데 무엇보다 색감이 특이했다. 마치 여러 가지 색조의 노을이 중첩되고 또 중첩된 느낌이었다.
‘노을과 바람에 고개 숙인 갈대, 강가의 두 연인이라••• 연인은 어둠이 깃들고 노을에 물든 강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이 영속하기를 빌고 있는 건 아닐까? 음••• 원화를 보고 싶군.’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 그림에 마음을 뺏긴 장영봉이 상념에서 깬 듯 포트폴리오를 내려놓았다.
장영봉이 포트폴리오에서 시선을 떼고 강수에게 말을 건넸다.
“이 ‘강가’라는 작품은 상당히 인상적이네. 언제 그린 작품인가?”
“작년 10월 수원에서 열린 수원성 문화제의 단체전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실은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최근에 채색을 중점적으로 수정작업을 했습니다.”
“아, 그래? 이 작품은 최근에 수정한 작품이란 얘기인가?”
“예. 그렇습니다.”
장영봉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기존 14개의 작품과는 확인하게 차이 나는 작품이었다.
‘색을 다시 입히기만 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몇 개월 사이에 실력이 부쩍 늘었군.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장영봉은 강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민했다.
조형미의 밀도는 부족했지만 은은하고 차분한 느낌의 색감은 조화를 이루었고, 그림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이미 본 작품과는 다르게 감정이 반응했다.
강가는 보는 이의 정서를 흔들고 감흥을 주는 예술적인 감각이 풍부하게 녹아 들어 있었다.
강가를 제외하고 판단하면 참가가 결정된 친구들과 비교해서 미흡하긴 했지만 어차피 대학 졸업 5년 이내의 신인화가를 대상으로 한 전시회라 이강수를 참가시켜도 문제될 소지는 없다.
‘이번에 출품하는 작품을 보면 본인 실력인지 아닌지 드러나겠지. 어쨌든 ‘강가’ 정도의 작품만 출품해도 참가자격으로 손색이 없을 텐데••• 이 친구를 참가시키면 1명 남았군.’
장영봉은 강가와 같은 수준 높은 작품이 출품되기를 기대했다.
내심 강수를 참가시키기로 결정하고 물었다.
“12인전에 참여하려면 최소 3작품은 출품해야 하는데 가능하겠나?”
12인전에 참여시키겠다는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해오름출판사와 잡힌 일정이 무산되었다. 그만큼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당연히 작품 3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릴 것이다.
대답하는 강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입니다. 적어도 3작품은 출품하겠습니다.”
“좋아. 자네를 12인전의 참여작가로 초대하겠네.”
“아! 가, 감사합니다.”
강수는 부실한 포트폴리오 때문에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12인전에 합류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나 기뻐서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다.
감격해 하는 강수에게 슬쩍 미소를 지은 장영봉이 입을 열었다.
“전시회는 7월 1일 수요일에 오픈이네. 그리고 이번 전시회 의도는 갤러리 차원에서 유망한 신인작가를 발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네. 우리는 전시에 참여하는 청년작가의 자유분방하고 다양하고 참신한 창작 역량을 원하고 있어. 그래서 형식, 주제를 정하지 않았네. 아무래도 형식, 주제를 정하면 그 테두리에 작가의식이 구속될 수 있다고 봤지. 그러니 오로지 치열한 작가의식에 기반한 야심에 찬 작품이 출품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네.”
강수가 전시 의도에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목각 인형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팜플렛 제작과 디스플레이 하는데 참고할 수 있도록 작품은 완성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서 내 이메일로 보내고, 물론 작품명, 사이즈도 같이. 잘 알겠지만 작품은 오픈 전날, 6월 30일 화요일에 디스플레이를 한다네. 날짜를 지켜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객이 전시된 작품의 구입을 원하면 판매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팔린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개인전도 아니고 단체전에서 작품이 팔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구매를 원한다면 판매하는 것이 당연했다.
작품 판매라는 말이 생소하기만 한 강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구, 구매자가 있다면요.”
“그럼 판매가도 메일로 보내주게.”
“알겠습니다.”
장영봉과 면담을 끝낸 강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사무실을 나왔다.
포트폴리오가 부실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참가가 결정되었다. 실력보다 인맥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