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8화 (18/197)

# 1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회

‘마나가 정말로 마나시드에 축적되는구나!’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마나하트가 생성될까?’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마나시드가 마나와 공명했을 때는 분명히 심장으로 흘러가는 미약한 기운을 느꼈다.

아마도 그 기운이 마나일 것이다.

‘하여튼 마나가 축적되긴 하니까•••.’

투팍탈의 말대로 언젠가 마나하트를 만들어 1서클 마법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일말의 희망과 기쁨을 가슴에 품고 산을 내려갔다.

사실 강수가 마나의 기운을 빨리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자동축적마나시드의 공능 때문이었다.

심장에 마나시드가 심어진 후, 심장 박동과 함께 미세하게 마나가 축적되고 있었다. 미세하긴 하지만 이미 생성된 그 흐름으로 인해 강수가 마나를 느끼는 것이 아주 빨랐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자랄 행성의 마법사들이 알면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질 것이고, 그 비법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겠지만 투팍탈의 죽음과 함께 비법은 소실되었다.

물론 강수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

하산 후 돈암동에 위치한 화방에 들러 주문한 캔버스를 찾아 가져온 강수는 제소를 개서 칠해주었다. 캔버스가 마르면 제소를 한 번 더 발라줄 것이다.

준비를 끝낸 강수는 컴퓨터를 켰다. 작품 창작에 들어가기 앞서 사진과 영상을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었다.

부팅이 끝나고 시작화면이 되었다. 사진 폴더를 열고 사진을 한 장씩 클릭해서 실행했다.

화면에 영정을 든 슬픈 눈의 아이가 나타났다.

‘지금은 30대의 어른이 되었을 테지만 소년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겠지•••.’

강수는 사진 폴더에 저장해 놓은 사진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고, 그들 앞에 거대한 벽이 가로 막힌 것 같은 막막함으로 가슴이 아렸다.

사진과 영상을 묵묵히 지켜본 강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모니터에서 물러났다.

캔버스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제소를 다시 발랐다. 제소가 마를 때까지 머리 속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제목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작품의 제목은 눈물.’

사진 속 아이들은 울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울 힘도 없을지 모른다. 아니면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 못해도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전에는 그의 세상은 태어나서 본 것들이 전부일 테니까 모를 수도 있지.’

곧 강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렇게 깊은 슬픔이 담긴 눈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불행하다는 걸 모를 수가 있겠어.’

강수는 머리 속을 떠도는 잡념을 정리하고 캔버스에 시선을 주었다. 강수의 뇌리에서는 한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형상화되고 있었다.

소년의 피부는 검었고, 머리카락은 돌돌 말린 곱슬이다. 눈은 왕방울처럼 컸고, 납작한 코의 콧망울은 도드라졌다. 턱이 짧고 입술은 두툼했지만 전체적으로 살이 없어 광대가 보이는 마른 얼굴.

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평범한 소년이다.

강수는 캔버스를 이젤에 놓았다.

연필을 쥐고 뇌리에 형상화된 소년의 얼굴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머리 속 영상이 캔버스에 만족할 만한 형태로 재현된 후에 시간을 보았다.

시침이 11시를 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강수는 내일의 원활한 일정을 위해 알람을 6시로 맞추었다. 오전에는 산에 올라가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오후에는 창작에 전념할 것이다.

무리하게 작업하기보다는 계획대로 꾸준하게 그 리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강수는 곧장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

강수는 다음날에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히 북한산 수련장소에 올라갔다. 수련장에서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내려오는 길에 점심을 해결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창작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아파트에 도착한 강수는 내일 가져갈 포트폴리오를 점검했다.

포트폴리오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두 번의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품 9점, 두 번의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 2점, 그 외 작품 4점 등 15작품이 전부였다. 15작품 모두 a3의 컬러 복사용지에 출력해 놓았다.

자신의 작품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쭉 훑어본 강수는 입맛을 다셨다.

‘나 참. 뭐 이렇게 엉성하고 허점투성이지? 구도는 답답하고, 채색은 밋밋하군. 인물은 뭔가 감정이 박제된 것만 같군.’

이전에는 그런대로 만족했던 작품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다시 살펴보니 미숙한 부분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림을 보는 눈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만 같았다.

강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와, 내 수준이 생각보다 저열했구나. 이걸 가져갔다간 퇴짜맞겠는걸.’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시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작품에 손 댈 시간이 없었다.

‘한 작품이라도 손을 좀 보자.’

강수는 15개의 작품 가운데 손을 볼 작품을 골랐다.

‘작년 전시회에 출품했던 이걸로 해야겠다.’

캔버스를 뒤적이던 강수는 작품 가운데 하나를 꺼내 이젤에 걸었다.

작품명 ‘강가’였다.

‘이 작품은•••.’

작년 수원에서 열린 수원성 문화제의 전시회 출품을 위해 북한강으로 아이디어 답사를 갔을 때 건진 작품이었다.

강은 폭이 넓었고, 한없이 깊을 것 같았다.

노을이 지는 강가, 강가에 앉아 어깨를 맞대고 등을 보이는 연인.

연인의 오른쪽에는 역광의 어둠에 묻힌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그렸다.

갈대는 신경림의 시로 유명하다.

그의 시로 인해 갈대는 극적으로 존재의의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만에 시, 갈대를 찾아 읽어보았다.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삶에 대한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그 느낌을 음미하며 자신의 작품 ‘강가’를 살펴보았다.

갈대를 그린다는 것은 신경림의 시 갈대의 이미지와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강수는 갈대를 화면에 내세우지 않고 구석에 배치했다. 그대신 해가 지는 노을과 강가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혹은 노을에 반사되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두 연인의 뒷모습을 부각시켰다.

자칫 식상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갈대는 화면의 구석에서 역광에 모습을 숨긴 채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고, 단지 키 큰 갈대 몇 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구도도 조금 바꾸고 싶지만 무엇보다 노을이나 강물, 갈대, 연인의 모습 등 전체적으로 색감이 평이했다.

다시 그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채색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강수는 팔레트와 붓, 물통, 아크릴물감을 준비하고 덧칠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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