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회
‘다시 해보자.’
투팍탈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커졌다.
잡념을 없앤 강수는 심장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처음보다는 빠르게 마나시드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나시드는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마나시드가 완벽한 형태를 갖춘 순간 의식이 흐트러졌는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사라졌다.
‘이런!’
강수는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쉽지 않구나. 하긴 마법사 되는 길이 그리 간단할 리 없지.’
강수는 마나시드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데 고무되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계속 시도했다.
배가 쑤시는 것 같은 허기를 느끼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였다.
“뭐, 뭐야? 시간이 뭐 이렇게 빨리 갔지?”
꼬르르륵!
시간을 확인하자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며 뱃속이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으윽! 배, 배고프다!”
비록 마나시드와 마나의 공명에는 실패했지만 심장에 심어진 마나시드를 볼 수 있었다는데 만족했다.
강수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
전화기를 붙잡은 해오름출판사 기획팀 윤철진 대리는 이강수 작가에게 사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식상하다니? 언제부터 참신한 그림을 찾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참나.’
이강수 작가의 정밀하고 섬세한 그림은 식상함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그 점을 항변했지만 팀장은 여전히 식상하다는 지적을 하며 작가의 교체를 지시했다.
팀장의 지시를 부당하다고 따지고 들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신세에 스스로 화가 났다.
신호가 끊기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이강수 작가님? 해오름 윤철진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윤 대리님.]
“오늘 기획회의에서 스케줄이 변경되어 전화 드렸습니다.”
[스케줄이요?]
“예. 화요일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획회의에서 ‘눈 오는 날’의 작화 방식을 정밀묘사가 아닌 판화나 점묘, 입체 등 다른 방식을 도입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거든요. 그래서 이번 미팅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런가요? 아쉽지만 기획 방향이 바꿨으면 어쩔 수 없죠.]
“이 작가님,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네. 윤 대리님. 수고하세요.]
“그럼, 이만.”
전화를 내려 놓은 윤 대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40대 초반의 팀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는 가면 같은 얼굴. 그의 시커먼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대체 이제 와서 작가를 바꾸려는 이유가 뭐야?’
조금 전 회의에서 팀장은 자신이 맡은 작품의 일러스트 작가를 교체하라고 주문했다.
‘작품의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창작의식을 갖춘 작가가 요구된다고?’
그럴듯한 말은 이강수 작가를 내치기 위해 갖다 붙인 요란한 수식에 불과했다.
팀장의 독단이 어이 없었고 이해되지 않았다.
이강수 작가의 일러스트는 꽤나 먹히는 그림이었다.
디테일한 묘사와 단순한 터치를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수준급의 작가였다. 더구나 학벌도 최고로 쳐주는 홍우대 출신이다.
눈 오는 날, 도시의 아이들이 눈사람과 이런저런 사건을 경험하는 이야기인 이번 작품은 이강수 작가의 화풍과 매치가 잘 될 것이 확실했다.
무엇보다 책정된 화료로 섭외할 수 있는 최고의 작가였다. 그래서 섭외를 했고 팀장도 오케이 사인을 하지 않았는가?
‘한데 작가를 바꾸라고?’
일러스트 판에서 청탁,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유 없이 이미 섭외한 작가를 내칠 리가 없다.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무엇이든 이유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 모하나. 이미 미팅을 취소 했으니.’
윤 대리는 생각을 접었다. 별 수 없었다. 상사에게 부당한 지시라고 따져봐야 돌아오는 것은 미운 털이 박힐 뿐이다.
이강수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자신도 먹고 살아야 했다. 작품의 퀄리티는 차후 문제였다.
윤 대리는 팀장이 검토해 보라며 건네준 세 명의 작가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름인 것을 보면 신인이 분명했다.
‘황소윤! 같은 황 씨인데? 뭐야, 설마 조카라도 되는 거야?’
팀장을 힐끔 쳐다본 윤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나, 그래, 얼마나 잘 그리는지 두고 보자.’
*
윤 대리와 전화통화를 끊은 강수는 약간 기분이 묘했다.
출판사도 어떤 사정이 있겠지만 확정되다시피 한 작업이 취소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음··· 오히려 잘 됐나? 창작에 전념할 수 있으니 이런걸 전화위복이라고 말하나?’
문득 강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시회에 참가가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이러다 전시회에 참여하지 못하면 백수가 되는 것 아닌가?
‘크크, 백수가 되면 도시락 싸 들고 북한산 가서 하루 종일 마나회로나 수련할까?’
종희와의 결별과 함께 자신의 삶이 급격하게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제까지 백수가 된다는 것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그동안 일에 치여 살았으니 백수라는 단어는 아예 뇌리에서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상전벽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갑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지만 변화가 두렵지는 않았다.
솔밭으로 내려온 강수는 식당에 들어가 왕돈까스를 시켜 먹고 허기를 달랬다.
사실 반찬을 만들고 요리를 해서 매 끼니 해결해야 하는 수고는 혼자 사는 남자에게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강수는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밑반찬을 보내줘서 그 수고를 적잖이 덜 수 있었다.
그저 어머니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늦은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한 강수는 집을 향해 걸어 갔다.
집에 돌아온 강수는 잔에 알커피를 타고 쓴맛을 희석하기 위해 설탕을 반 스푼 넣었다.
식탁에 앉아 쌉싸름한 커피 향을 음미했다. 그런 연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당장 할 일이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본래는 차기작 ‘눈 오는 날’의 자료 준비와 작품구상을 하려고 했지만 미팅은 취소되었다.
‘일이 없네?’
대학을 졸업하고 일러스트에 빠져 살아왔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종희나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 외에는 항상 일에 쫓겨 살았고, 주말에도 줄곧 그림만 그렸다.
사실 강수는 그림 그리는 기계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돈 버는 일에 매몰되어 있었다. 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작업이 없어지자 알 수 없는 상실감마저 들었다.
절로 실소가 나왔다.
“후후. 내게 이런 날도 오는구나. 전시회 참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만 겸사겸사 작품 구상이나 해 볼까?”
전시회 참가와 상관 없이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꼭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있었다. 재능과 역량이 따라주지 못해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한 작품이다.
그것은 몇 장의 사진과 영상으로부터 비롯된 창작욕이었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
폭탄 세례에 불이 붙은 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폭발을 피해 달리는 베트남의 어린 소녀와 아이들.
코가 잘린 아프가니스탄의 히잡을 쓴 소녀.
피골이 상접해 흑백이 뚜렷한 유난히 커다란 눈이 얼굴의 절반만한 아이를 안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인.
흙탕물을 길러 먹는 검은 피부의 아이들.
파리가 몸에 달라붙어 있어도 반응하지 않는 부러질 듯 목이 가는 아이.
이런 사진과 다큐의 영상을 접했을 때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들끓었다.
인간이되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한 존재들.
강수는 이런 사진을 발견하면 사진 폴더에 모아두었다.
일단 강수는 자주 이용하는 단골 화방에 전화를 해서 인물형 25호 캔버스 하나와 23호 크기의 캔버스 두 개를 주문했다.
인물형 25호 캔버스는 세로80센티, 가로65센티 크기로 결코 작지 않다.
화가 성향에 따라 직접 캔버스를 만들기도 하고, 주문하기도 한다. 대학 시절 캔버스를 제작해 보았기 때문에 직접 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타카나 나무틀, 캔버스로 쓸 천 등이 필요하다.
전업화가의 길을 포기한 강수는 필요할 때 화방에 캔버스를 주문해서 썼었다.
강수는 사진 폴더 안에 모아 놓은 사진을 살펴보기 위해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
다음날.
강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후 수련 장소에 올라갔다.
흐르는 땀을 닦고, 방석을 깔아 수련 준비를 마친 후, 스마트폰을 꺼내 알람을 11시 30분으로 맞추었다.
아침도 부실하게 먹는데 어제처럼 점심마저 놓치고 수련을 했다간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건강도 중요하다.
앞으로 마나회로는 오전까지만 수련하고, 점심을 챙겨먹은 후 오후에는 작품 구상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방석에 앉은 강수는 호흡을 조절하며 잡념을 떨치고 내부를 관조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서서히 마나시드가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며 선명하게 나타났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마나시드를 심상으로 떠올리는 것이 쉬워졌다.
하지만 성공했다는 인식이 개입하자 마나시드는 사라져버렸다.
심장에 심어진 마나시드와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마나의 공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강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며칠이 걸릴 지 몇 달이 걸릴 지 모르지만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삶의 변화가 필요했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었다. 성공과 부를 거머쥐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다시는 사랑하는 여자를 무능력하게 빼앗기고, 눈물을 삼키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마나하트를 만들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잘근잘근 되씹었다. 눈에서 염화 같은 불길이 타올랐다.
‘아, 마음을 안정하고 잡념을 버려야 하는데.’
강수는 숨을 깊게 마시고, 얼굴을 들어 푸른 하늘을 보았다.
흰구름 몇 점이 유유히 떠 있었다. 흰구름은 서서히 작아지더니 종내 티끌처럼 작아져서 사라졌다.
강수의 분노도 흰구름처럼 서서히 소멸해갔다.
심신이 파란 하늘처럼 티없이 맑아짐을 느낀 강수는 마나회로 수련을 시작했다.
마니시드가 심상에 맺혔고, 강수는 무심히 호흡을 계속 했다.
어느 순간 호흡 속에서 희미하고 미세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건가?’
의식이 개입하는 순간 마나의 기운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아, 이런!’
눈을 뜬 강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거야! 마나가 틀림없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쁨을 만끽한 강수는 정신을 차리고 방석에 앉았다.
“마법사! 시작이다. 이제 할 수 있어.”
마법사!
그 얼마나 매혹적인 능력인가?
70억 인류 가운데는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얻고 자신의 삶을 멋지게 일구어냈다.
마법사는 70억분의 1이다.
만약 마법사가 된다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그들처럼 정점에 설 수 있지 않을까?
흥분을 가라앉힌 강수는 다시 호흡을 시작했다.
잡념을 버리고 호흡에 집중하기를 30여분, 드디어 다시 마나의 희미하고 미약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번에는 흥분하지 않고 그 기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상심을 유지했다.
마나시드가 폐부로 유입된 마나와 미약하게 공명하고 뭔가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 순간 마나와의 공명이 사라지고 끊어진 연줄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소멸했다.
눈을 번쩍 뜬 강수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뭐지? 인력이 유지되려면 무아지경이 되어야 하나?’
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서 몸을 풀어주었다.
‘다시 해 보자.’
스트레칭을 하며 고무된 감정과 아쉬움을 떨쳐낸 강수는 다시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마나시드를 향해 무언가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하지만 온화한 기운이었다.
기분이 충만 되었고, 심신이 포근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강수는 석상처럼 앉아 마나회로를 수련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알람 소리에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마나시드의 심상이 흩어지자 마나시드의 공명도 멈추었다.
눈을 뜬 강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심장으로, 아니 마나시드에 무언가 흘러 들어간 현상이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