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6화 (16/197)

# 1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회

종대와 헤어진 강수는 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탔다. 맥주는 두 잔만 마셨기 때문에 승객에게 민폐를 끼칠 정도로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다.

수유까지 가려면 중간에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환승역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운이 좋았는지 동대문 역에서 앞 좌석의 승객이 내려 자리가 났다.

강수는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밤을 샌 탓에 몸은 좀 피곤했지만 맥주 두 잔 속에 든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지 기분이 나른해졌다.

고대의 사회에서는 술을 신의 음료라고 했던가?

인간이 신의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호강일까?

한데 신의 음료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술이 물처럼 흔해지고, 아무 때나 상점에 가면 사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술은 신의 음료라고 불릴 수 있는 고귀한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술은 마시는 자에 의해 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독주가 되고, 누군가에겐 신의 음료가 된다.

‘그래도 내게는 신의 음료지. 이렇게 기분 좋게 마셨으니까.’

포근하고 나른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강수의 미리 속에서는 잡다한 이미지가 떠올랐다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태어나고 자린 팔와리, 한없이 사랑하는 부모님, 산에서 뛰어 놀던 어린 시절, 전교생이 백여 명 밖에 되지 않은 시골 작은 초등학교의 교정. 그 때의 친구들.

시간이 흐르고, 부쩍 키가 크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그 끝은 종희였다.

‘종희···. 너는 행복한 거지?’

종희와 함께 보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4년 넘게 종희와 사귀었지만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학 때는 학부 공부와 알바로 서로 정신 없이 보냈고, 졸업하고 나서 종희는 연예계 쪽으로 자신은 일러스트로 진로를 정하면서 또 각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졸업하고 주 1회는 만났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몇 달 뒤에는 2주에 한번으로 줄었고, 결국 2, 3주에 한 번으로 거의 고정되고 말았다. 서로가 각자의 꿈을 향해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자신은 오직 종희와 꾸릴 미래의 가정을 위해서 돈 버는데 혈안이 되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연인 사이의 진리를 무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지지리도 바보였고,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였다.

젊음과 열정,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서 돈을 벌고 아파트를 마련한 짓이 후회되었다. 오히려 그 시간과 열정을 종희와 함께 지내는데 투자 했다면 헤어지더라도 지금처럼 공허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진정으로 지금처럼 멍청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하는 회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나는 종희에게 어울리지 않은 남자였어. 종희는 무엇을 보고 잘난 것도 없는 나를 지금까지 만난 걸까?’

종희가 자신의 그림 그리는 재주와 성실하고 솔직한 성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종희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이 또 있었던가?

외모?

아닐 것이다.

종희가 하는 일이 연예계 쪽이다. 그녀의 주위엔 자신보다 키 크고, 잘생기고, 재력 넘치는 잘난 남자들이 널려있다. 자신의 외모가 호감 있게 생기긴 했지만 종희가 만나는 남자들보다는 못하다.

정?

남녀가 오래 사귀면 생기는, 사랑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정이 깊어지면 쉽게 헤어질 수 없기는 하다.

어쨌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여겼다.

지금에서야 그것은 편협한 자기만족이었고, 끔직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한심스럽고 멍청하게 살았지. 앞으로는 좀 더 현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현명하게?’

현명하게 산다는 것은 또 뭐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으음, 스물여덟을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현명하게 살자고 다짐한다고 해서 현명하게 살 수 있을까?

삶은 수학처럼 공식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매번 다른 상황과 변수, 각종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삶이란 자신이 확립한 세계관과 안목에 따라 답보하거나 퇴보하거나 진보할 것이다.

덜컹, 덜컹!

“다음에 내리실 역은 수유, 수유역입니다.”

상념에 빠져 스르르 선잠이 든 강수는 자신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동차가 달리는 소리도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안내방송도 들리지 않았다.

열차는 곧 수유역을 떠났다.

*

몸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퍼뜩 깨어났다.

“이 보게, 젊은이. 종착역이네. 그만 일어나게나.”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아저씨가 강수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눈을 뜬 강수는 중년의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승강장으로 나왔다.

시간을 보니 10시였다.

반대편 승강장에서 수유역까지 돌아가면 된다.

“투팍탈···.”

강수는 걸음을 옮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 선잠에서 꿈을 꾸었다.

꿈에서 룬어로 된 마법수식과 투팍탈을 보았다.

‘내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었다고 했어.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나회로를 수련하여 심장에 마나하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마감에 쫓겨 잊고 있었던 마법수식과 투팍탈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심장에 마나하트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마나회로를 수련해야 한다.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마나를 마나시드에 축적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마나하트가 만들어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마나하트를 생성하면 1서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투팍탈은 심장박동으로 마나가 자동으로 축적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으로 마나회로를 수련하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강수는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사당행 전동차를 기다리며 마나회로를 수련하기로 마음 먹었다.

*

강수가 눈을 떴을 때는 오전 8시였다.

잠을 잘 잤는지 피곤이 전부 가시고 몸은 가벼웠다. 오랜만에 심적으로 편안했고, 마감에서 해방되었다.

출판사 담당자와 미팅을 하면 또다시 마감이 정해지고, 작업에 들어가야 하겠지만 오늘만큼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먹을 것 좀 사 놓고 산에 올라가서 마나회로를 수련해보자.’

어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마음 먹은 일을 당장 실천하기로 했다.

강수가 산에서 마나회로를 수련하려는 데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인이나 스님이 심신의 안정과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속세를 벗어나 산에서 수련하듯이 일단 수련은 자연 속에서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투팍탈에게 전수받은 지식에 따르면 지구는 자랄 행성보다 마나가 희박했다. 마나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물질이자 원소인데 지구는 마나가 자랄 행성의 삼분지 일에 불과했다.

강수는 그 이유를 공기의 오염으로 추측했다.

지구는 산업혁명 이후 고도로 발전한 기계문명에 의해 공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공기 오염이 얼마나 심했으면 과거에는 대도시나 공장지대에서 스모그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에 반해 자랄 행성은 과학기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시대처럼 냉병기로 전투를 하고, 마법을 사용하는 소설 속 판타지와 같은 세계였다.

때문에 공기가 오염된 도시보다는 나무가 우거진 산에 조금이라도 마나가 많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북한산이 지척인 것도 산에서 수련하려는 결심을 굳히는데 한몫 했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 굽고, 계란 후라이를 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강수는 마트로 가서 2, 3주는 먹어도 될 만큼 넉넉하게 식료품을 구입했다.

식료품을 냉장고와 냉동실, 찬장에 정리한 강수는 등산복으로 갈아 입고 배낭에 야외용 방석, 수건, 생수 한 병만 준비했다.

우우웅! 우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었다. 친구 종대였다.

‘자식, 일찍부터 전화했네. 12인전 때문일까?’

강수는 살짝 긴장감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강수야, 어젠 잘 들어갔냐?]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래? 어젠 술도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비록 잠결에 종점까지 가긴 했지만 좌석이 금방 비어서 편하게 집에 들어간 셈이었다.

[잘 들어갔음 됐지. 아, 장 선배에게 전화했고, 장 선배도 한 번 보자고 하니까 연락하고 찾아가 봐라. 전화번호는 문자로 넣어주마.]

“그러냐? 고맙다, 종대야.”

전화를 끊고 나서 문자는 즉각 날아왔다.

장 선배의 본명은 장영봉이며 과 선배로 2005학번이었다. 모임에서 두 번 정도 본 적은 있지만 일러스트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순수미술과는 멀어졌고, 미술 쪽에서 일하는 과 선배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종대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이미 결정한 일로 미적이고 싶지 않아 바로 전화를 했다. 긴장이 되었는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컬러링이 끊기고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선암갤러리 큐레이터 장영봉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장 선배님. 회화과 11학번 이강수입니다.”

잘 모르는 고학번 선배와의 통화이기도 해서 목소리에 기합이 들어갔다.

[아, 종대와 동기인 후배로군.]

“옙. 맞습니다.”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지?]

“옙, 기회만 주신다면 참여하고 싶습니다.”

[좋아. 그러면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다음주 화요일쯤 갤러리에 방문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선배님, 몇 시쯤이 좋겠습니까?”

[다음주 화요일 2시면 괜찮은데 어떤가?”

“예. 그 시간에 찾아 뵙겠습니다.”

[알겠네. 다음 주에 보도록 하지. 그럼 들어가게.]

“옙.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강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꼭 선생 앞에 죄를 짓고 선 학생처럼 경직되어서 통화를 한 기분이었다.

사실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아 빈약할 수밖에 없는 포트폴리오였지만 거절 당하더라도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다.

강수는 스마트폰을 배낭에 넣고 아파트를 나섰다.

북한산은 둘레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거기서 거기라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걸어서 두 정거장만 가면 덕진대 앞 솔밭에서 둘레길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솔밭으로 가야겠구나.’

위치를 정한 강수는 빠른 걸음으로 덕진대 앞 솔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수는 솔밭을 지나 북한산 둘레길 초입에 접어들었다.

‘어디쯤에서 수련하면 좋을까? 가능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좋겠지?’

북한산이 그리 큰 산은 아니지만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은 많다. 강수는 머릿속으로 대충의 위치를 정하고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강수가 생각한 곳은 빠른 걸음으로 약 30분 거리였다. 너무 멀리 가면 그만큼 수련시간이 줄어든다. 인적이 끊긴 곳이면 어디가 됐든 적당하다고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산을 오르니 땀이 흘렀으나 몸에서는 오히려 활력이 돌고 힘이 넘쳤다. 내친김에 정상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오늘의 산행의 목적은 등산이 아니었다.

수건을 꺼내 이마와 몸에 흐른 땀을 닦고 등산로를 벗어나 등산객의 발길과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았다. 주변을 돌다 적당한 장소를 찾은 강수는 땅바닥을 평평하게 정리한 후 야외용 방석을 깔고 편하게 양반자세를 하고 앉았다.

강수는 심호흡을 깊게 하면서 투팍탈이 알려 준 방법대로 잡념을 버리고 의식을 집중했다. 자신의 몸 내부를 의식의 눈으로 관조하고, 그 형태를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강수 역시 심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의식의 눈으로 내부을 보려고 집중했다. 꽤 긴 시간이 흘렀고, 어느 순간 서서히 마나시드가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며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나시드?’

의식이 개입하는 순간 마나시드가 연기처럼 뭉개지며 흩어졌다.

“아!”

강수는 나직이 탄성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허. 진짜 보이네.”

사실 투팍탈이 시킨 대로 하긴 했지만 정말로 마나시드라는 것이 심장에 심어졌는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또한 지구인과 자랄인의 신체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마나시드가 똑같이 적용될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되면 좋고 안 된다고 해도 본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1단계는 성공. 2단계는 마나를 공명시켜야 하는데.”

투팍탈은 마나를 느끼라고 했다.

자랄 행성에 비하면 마나가 희박하지만 마나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의식을 집중하면 마나시드와 공명하는 마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마나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은 개개인이 틀린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심지어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마나와 마나시드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명하면 마나시드와 공명한 마나가 인력에 끌리듯이 마나시드에 축적된다.

이러한 과정을 투팍탈은 마나회로 수련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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