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천진룡은 이현성에게 잔재주를 운운했다. 패자에게 어울리지 않은 변명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현성은 이를 인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로 그는 편법을 사용했다.
‘…운이 좋았어. 그의 어깨가 베이지 않았다면…….’
이현성은 지금도 등골이 오싹했다.
천진룡의 참룡군림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힘으로 대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우선 이기어검인 여의재천을 펼쳤다. 다만, 암천검이 아닌 유령살군을 베고 얻은 유령비로 펼쳤다.
애초 그건 천진룡의 도법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유령비가 천진룡의 어깨를 절반 가까이 벤 것이다.
유령비 그 자체만 해도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분명 보물이었다. 하지만 천진룡이 유령비를 막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유령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참룡군림을 펼치느라 정신을 모두 쏟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유령비는 살왕의 살백도, 귀왕의 귀왕인과 견주는 기물이었다. 귀왕의 귀왕진결처럼 유령비의 운용법인 유령사로 펼친다면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건 바로 유령비의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결국 유령비는 칼을 휘두르는 천진룡의 어깨를 관통했고, 무리하게 칼을 휘두른 대가로 어깨가 완전히 찢어지게 되었다.
‘유령비의 비밀이 여의재천이었다니…….’
분명 이현성은 유령비의 운용법인 유령사를 모른다.
그렇기에 천진룡의 도법을 방해하는 용도로 여의재천을 펼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유령비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그건 여의재천 때문이다.
애초 유령비를 하사한 것도 운용법을 전수해준 것도 살수천자였다. 유령사는 살수천자의 여의재천에서 파생된 운용법이었던 것이다. 알고 펼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천진룡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주, 주군! 커억!!”
“너무하는군. 나를 잊다니 말이야.”
서황명은 죽어가는 천진룡을 보며 절규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제갈인겸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잊고 말았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주…군…….”
“…….”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긴 제갈인겸은 입이 썼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헉!”
죽어가던 천진룡의 나머지 한 손이 갑자기 이현성의 목으로 향했다. 이미 다 죽어가는 상황이었기에 방심했다가 생긴 불상사였다.
그만큼 이현성에게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일까?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조차 붙잡으며 손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책임감이었다. 이현성을 죽인다면 혈천이 천씨세가를 구해줄 거란 생각이 그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으나 두 사람의 간격은 반보(半步)도 되지 않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게다가 이현성 역시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천진룡의 어깨가 찢겨지면서 참룡군림이 빗겨났으나 지척에서 그 충격을 받았으니 그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여파만으로 내상을 입을 정도인데,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이현성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푸욱!
“커억! 제…엔…장…….”
날카로운 무언가가 천진룡의 하나 남은 어깨를 베었다.
아니, 부쉈다는 말이 옳았다.
순간 천진룡은 남은 명을 다하고 말았다.
“하… 내가… 산 건가…….”
“누, 누구냐!”
“헉! 귀하는…….”
반대편에서 수백의 인마가 나타났다. 하나 같이 갑주를 입고 있었으며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제갈세가와 화산파 고수들을 포함한 이가장 일행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군사들을 보며 경계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달려왔기에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군사들 속에서 누군가 훌쩍 날아가서 이현성의 지척에 도달했다. 그 움직임이 비호처럼 날랬다. 그와 동시에 군사들 역시 말에서 내렸다.
“소장, 용불군이 왕야를 뵙습니다!”
“…왕야를 뵙습니다!”
수백 군사들이 동시에 군례를 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지휘관이었다. 용불군.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군부제일고수인 그였다. 북부를 오래 비울 순 없으나 천진룡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용불군 대장군밖에 없기에 그가 추격대를 맡았던 것이다.
“용불군 대장군이셨군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왕야. 그보다 소장에게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이현성은 은인인 용불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용불군 대장군은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했다.
상대는 황제에게 왕작을 허락받은 왕야였다.
그런 그에게 존대를 받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무신(武臣)으로 살아온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왕야께선 폐하께 왕작을 허락받으신 분이옵니다. …왕야의 존칭은 소장이 감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후… 대장군의 뜻이 그렇다면… 고맙소. 대장군 덕분에 살았소.”
“아닙니다. 왕야.”
회광반조(回光返照)였던 천진룡의 마지막 일격은 무산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아온 한 자루의 창이 그의 어깨를 부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회광반조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면서 결국 천진룡은 명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을 던진 자는 바로 용불군이었다.
화경고수답게 이기어창을 펼쳐서 제때 천진룡의 어깨를 부술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현성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대장군께선 이곳까지 어인 일이시오?”
“폐하의 천명에 따라 역적 천진룡과 그의 일가를 체포하기 위해 남하하던 중이었사옵니다. 그러던 중 역적 천진룡이 북상했다는 첩보를 듣고 급히 회군하다가 왕야를 뵙게 되었습니다. 역적 천진룡의 시체는 저희가 회수해도 되겠사옵니까. 왕야.”
“물론이오. 폐하의 명이거늘 어찌 거부하겠소. 대장군께서 맡으시오.”
“감사하옵니다. 왕야.”
용불군이 손짓을 하자 장수들이 천진룡의 시체를 회수했다. 그제야 용불군은 이현성을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자신의 자식보다 어림에도 자신과 손색이 없는 천진룡을 베었다. 비록 마무리가 조금 아쉬웠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현성의 신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이현성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왕야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내상을 입었나 보오. …그를 상대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그친 것이 그나마 다행 아니겠소.”
유령비로 천진룡의 어깨를 베었기에 다행이지, 정면으로 그의 칼을 막았다면 지금쯤 고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정도 내상은 정말 값싼 대가에 불과했다.
용불군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환이었다.
“복용하시지요. 영단은 아니오나 내상을 회복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고맙소. 대장군.”
이현성은 거절할까 하다가 그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기에 즉시 복용했다. 용불군은 영단은 아니라고 했으나 그 효과가 일개 요상약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왕작을 허락받았다고 하지만 그의 호의는 너무 과했다. 단순히 왕야이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무인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장군의 호의를 결코 잊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그 사이 멀리 떨어져 있던 이가장의 무리가 다가왔다.
군사들은 그들을 막았다. 적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으나 상관의 명령이 없기에 군사로서 당연한 조치였다.
이를 눈치챈 용불군이 소리쳤다.
“왕야의 가솔들께 무례를 범하지 말하라!”
“충!”
용불군의 명이 떨어지자 이가장의 일행을 막고 있던 군사들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그들의 접근을 허용했다.
그 절도 있는 모습에서 금군 최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가장의 일행, 특히 두 여인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대장군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왕비 마마. 소장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사옵니다.”
용불군의 말에 제갈현지와 문교교는 얼굴을 붉혔다.
왕비라고 불려서라기보단 이현성의 부인임을 다시 한번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들, 대장군께서 베푼 호의를 어찌 가벼이 여기겠습니까. 언젠가 이 호의를 갚을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영광이옵니다. 왕비 마마.”
문교교의 말에 용불군은 마음속으로 ‘과연….’이란 말을 읊었다.
그녀는 왕비인 동시에 내각대학사의 여식이기도 했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가진 호의는 분명 용불군 대장군 본인은 물론 용씨세가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대장군께선 이제 어쩌실 생각이오?”
“황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산동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역적 천진룡의 시체를 확보했으나 황명은 그의 일가 역시 체포하는 것이다. 물론 화경고수인 천진룡이 죽은 이상 용불군이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허나 아직 또 다른 황명이 전해진 것이 아니기에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 그렇게 용불군 대장군을 위시한 군사들이 떠나자, 눈치만 보던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다가왔다.
“사위, 괜찮은가?”
“내상을 입긴 했으나 다행히 심하지는 않습니다. 장인어른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아닐세. 그만하길 천만다행일세.”
이현성의 신위를 직접 목도한 제갈인섭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가 대단한 고수란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경에 오른 그의 신위는 그야말로 천외천이었다. 자신의 사위임에도 같은 무인으로서 경외감까지 들었다.
“아…! 장인어른, 석가장과 약조를 했기에 다녀와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보다 내상부터 안정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호법을 서줄 테니 운기행공부터 하게나.”
혼원신공과 용불군에게 전해 받은 내상약 덕분에 내상은 이미 상당히 진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정된 것이 내상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무도 사위에게 접근할 수 없게 주변을 경계하게.
―존명!
제갈인섭의 명령에 제갈세가 고수들이 주변을 경계했다. 자연스럽게 귀림의 호위들 역시 철통경계를 시작했다. 그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귀림은 이제 이가장의 식구이니 주인의 신위를 보고 어찌 자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모두가 기뻐하진 못했다.
‘부디… 무리하지 마셔요. 제발… 자신의 몸부터 챙기세요. 주변만 신경 쓰지 말고요.’
그의 부인들로서는 마냥 기쁠 수가 없었다.
남편의 몸이 상한 대가로 얻은 것들이었으니.
돌아올 수 없는 강
“길을 뚫어라! 대장로께서 위험하시다!”
“흐흐흐… 어림도 없지!”
불길한 느낌에 내당주는 내당고수들을 이끌고 석대중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무리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들은 혼세교의 고수들로, 우사의 친위대인 마령대(魔靈隊)였다. 내가기공을 익힌 석가장 내당고수들도 강했으나 마령대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내당과 달리 마령대는 전원이 절정지경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허나 고작 열셋에 불과한 석가장 내당과 달리 마령대는 오십명이나 된다. 그래서 그들의 발을 묶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