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자신의 주군이 모욕을 받는데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천진룡이 막았다. 살왕을 베고, 반란을 막았다고 하지만 이현성이 화경에 오른 것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느껴지는 기세는 분명 서황명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천진룡은 자신이 직접 맡을 생각이었다.
“내 꼴이 좀 우습게 되었지.”
“주군!”
“그래서 말인데… 자네의 목이 필요하네.”
순간 이현성의 눈이 번쩍였다.
도주하고 있는 와중에 하북으로 되돌아올 정도로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다? 분명 화가 나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올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목을 원했다. 이현성은 숨겨진 이야기를 간파했다.
“귀하쯤 되는 분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이 놀랍지만… ‘그들’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오.”
“하― 이런 정말 머리가 좋은 놈이군. 그렇다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알겠지?”
“그냥 내어줄 생각은 없소.”
이현성은 암천검을 쥐며 나직하게 말했다.
“암월 호법, 저자를…….”
“질서, 저자는 내가 맡아도 되겠는가?”
“…? 처백부께서 원하신다면야…….”
천진룡은 황실 오대고수 중 한 명으로, 제독동창이나 금의위 도독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천진룡도 버거운데 초절정고수로 보이는 자까지 홀로 감당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초절정고수인 서황명을 암월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때 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검객, 천지신검(天地神劍) 제갈인겸. 그는 서황명을 보는 순간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문가장에선 오랜만에 취한 탓에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무위를 발휘할 때였다. 이현성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암월 호법, 규 장로님과 함께 석가장에 먼저 가 있게. 일만 잘 해결되면 본장에도 큰 도움이 될 걸세.
―존명!
암월과 규염을 먼저 석가장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석가장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으나 혈천에게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암월이라면 거부했겠지만, 이현성이 이세암천의 자격에 도달하면서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였다.
덕분에 설득하는 불필요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독고 장로님. 부인들을 부탁합니다.
―걱정 마시게.
천진룡이라는 강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이현성은 문교교와 제갈현지의 안전부터 챙겼다. 그녀들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천진룡과의 싸움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장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장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동생 역시 신경이 쓰였지만, 그들의 곁에는 천검(天劍) 한승이 있었다.
비록 면목이 없는지 조금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와 같은 고수에겐 거리라고 할 정도로 멀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나?”
“배려는 감사하오.”
천진룡은 이현성이 짧은 시간 동안 전음으로 여러 지시를 내린 것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방해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역적이 되었고, 이현성의 목을 노리고 있으나 명색이 대장군이라고 불리던 사내였다. 이를 방해하기에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지막 배려를 이현성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원래라면 선수를 양보해야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해하게.”
“필요 없소.”
두 사람은 각지 도검을 쥐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이현성은 살왕과 싸움으로 생긴 피로감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강적의 칼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쾅! 콰쾅! 콰콰쾅!
“큭! 강하군! 군부의 실전무공이 이 정도였던가!”
“내가 할 소리! 겉멋만 든 무림의 무공이 내 칼을 감당할 정도였단 말이지!”
제갈인겸도 강했지만, 서황명은 정말 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부군은 왜구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곳이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로 다져진 동부군은 금군 내에서도 정예 중에 정예로 취급받는다.
그런 동부군의 총사령관이 천진룡이고, 그를 보좌하는 부관이 바로 서황명이었다.
총사령관과 그의 부관이라서 직접 칼을 맞대는 일이 적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거친 동부군을 다루기 위해서 지휘관들 역시 약해선 안 된다.
게다가 천진룡은 용장(勇將)이었다.
전투에서 뒤에 숨는 성격이 못 된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북부군과 함께 가장 치열한 동부군을 맡을 수 있었다.
천진룡의 부관인 서황명 역시 치열한 전투 경험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감당뿐인가!”
“건방진!”
강기와 강기가 충돌하니 그 여파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관도 곳곳이 부서지는 것은 물론 제법 큰 나무들 역시 휩쓸려서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 신경을 분산시키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풍부한 내공을 기반으로 강력함을 자랑하는 제갈인겸의 검(劍)과 일도 일도가 목숨을 위협하는 서황명의 칼(刀).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이 덜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야말로 호적수.
끝을 쉽게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격돌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무림인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법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격돌이 이곳까지 여파를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초인이라고 불리는 화경고수들의 격돌은 저들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이 두 사람도 화경고수들의 격돌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가 먼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본가를 위해서… 주군을 위해서 그만 죽어라!”
* * *
“큭!”
“허… 내 자식놈들보다 어린 것이 이런 무위라니…….”
천진룡, 그는 강했다. 화려하진 않았으나 강력했다. 게다가 헛된 움직임이 없었다.
그야말로 도법의 교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도왕 할아버님과는 또 다른 강함이구나.’
도왕 팽진천의 칼도 강했다. 그는 칼의 명문인 하북팽가의 태상가주답게 칼이라는 무기에 대해서 잘 이해했고, 그만큼 칼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줄 알았다. 게다가 무림세가인 만큼 내공을 기반으로 둔 강력함을 도법으로 구사했다. 그에 반해 천진룡의 도법은 섬뜩했다.
그의 도법이 강력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베고 상대의 목숨을 끊기에 적합한 도법만을 구사했다. 마치 살인의 미학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살인의 미학은 살수지검만한 게 없지.’
살수의 종주인 살수천자의 검을 이어받은 이현성이었다. 살검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순간 이현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호―오!”
더욱 빠르게 더욱 은밀하게 그리고 더욱 섬뜩하게 검을 휘둘렀다. 무겁고 간결한 맛은 천진룡의 도법보다 못하지만, 반대로 가볍고 날카로운 검법으로 대응하니 천진룡도 반응이 재깍 왔다.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으윽! …아직! 아직!!”
천진룡은 이현성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생각인지 크게 칼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이었다.
물론 그의 칼끝에는 묵직한 도환(刀環)이 어려 있었다.
이에 이현성은 피하는 대신 맞대응했다.
내공에 있어선 그 역시 뒤지지 않는다. 얼마 전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공 하나만큼은 혈천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물, 흡정혈왕 석대환의 내공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석대환과 달리 흡정을 통해 얻은 음양이기(陰陽異氣)로 인한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공인 혼원신공을 익혔다.
게다가 살왕과의 혈전에서 고여 있던 석대환의 내공이 상당부분 전신에 고루 퍼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내공에 한에선 결코 천진룡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고 할 수 있었다.
이현성 역시 검환(劍環)으로 천진룡의 도환에 대응했다.
허나 도법과 검법의 차이 그리고 칼과 검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지 이현성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고통을 버텨내며 역으로 밀어붙였다.
쾅!
“큭! 이노―옴!!”
“으윽!”
천진룡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나왔다. 이번만큼은 그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내 밀린 것은 다시 이현성 쪽이었다.
허나 천진룡 역시 무사하지 못한지 다시 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덕분에 밀린 쪽은 이현성이었으나 더 손해를 본 쪽은 천진룡이었다.
씨익.
덕분에 이현성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천진룡은 점점 여유를 잃어갔다.
‘젠장. 도왕에게 입은 상처가 쑤시는구나!’
이현성이 살왕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피로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무지막지한 내공 덕분에 빠른 회복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천진룡은 도왕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왕은 강했다.
하지만 천진룡을 베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놓아줘야 했다. 그건 그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도왕이 목숨을 건다면 천진룡의 목은 몰라도 치명상은 충분히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왕은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다.
아무리 황명이라지만 천진룡 때문에 자신이 쓰러진다면 오히려 더 손해였다. 대신 천진룡에게 부상을 입혔다.
물론 그로 인해 도왕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추적을 흉내만 낸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허나 도왕은 제 몫을 다했다 할 수 있었다. 황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천진룡에게 부상을 입혔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천진룡이었다.
이 정도로 쉽게 무너질 사내가 아니었다.
“네 목이 필요해! 네놈의 목이!!”
“내 목을… 내어줄 생각은 없다!”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초조해졌는지 천진룡의 도법이 변했다. 더욱 거칠고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섬뜩한 것은 여전했다.
이현성은 본능적으로 막아선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물러나기엔 이미 늦었다.
“참룡…군림(斬龍君臨)!”
“여의재천(如意在天)!”
콰콰쾅! 쾅! 쾅!!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으니 그에 걸맞은 후폭풍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흙 폭풍은 물론 기의 폭풍이 사방으로 요동을 쳤다.
얼마 후 후폭풍이 가라앉은 후 두 사람을 중심으로 그 일대가 소멸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천진룡의 참룡군림은 용불군을 넘어서겠단 그의 염원이 담긴 도법이었다.
그 위력은 살왕의 멸천, 도왕의 혼원벽력도를 넘어설 정도였다. 그런 천진룡의 참룡군림에 맞선 것은 이기어검을 기반으로 둔 여의재천이었다.
검술의 극치인 이기어검이었지만, 위력만 본다면 도환으로 펼친 참룡군림을 넘어서기 힘들었다.
“이런… 잔재주를… 쿨럭!”
“잔재주임을 인정… 우웩! …하지만… 어쩔 수 없었소. 그댄… 너무 강하니까.”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천진룡의 가슴에 이현성의 검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진룡이 칼을 쥐고 있었던 어깨가 찢겨져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