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게다가 저들이 이곳에 들이닥쳤다는 것은 주변을 지키고 있던 석가장의 무사들 역시 모두 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석가장 내에서도 나름 고수급을 주변에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무슨 짓이오!”
“흐흐흐… 그걸 모른단 말인가. 석대중.”
석대중을 대하는 혼세교 우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더 이상 흉심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을 대놓고 알려주는 셈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석대중은 이를 악물었고, 석주천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내당과 외당 녀석들은 기대하지 말라고.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까.”
“……!!”
과연 혈천. 빈틈이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짓밟았다.
석대중은 혼세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내당 고수들을 대동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절망은 지금부터였다.
“…그리고 은밀하게 외부로 사람을 보냈더군.”
덜컥!
나직하게 말하는 우사를 보며 석대중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당은 석대중 본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끌어들인 것이지, 그들만으로 혼세교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아무리 무림인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밀하게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석주천과 협의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기에 우선 사람을 보냈다. 마지막 희망을 갖고서.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저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즉, 외부로 보낸 자들이 모두 잡혔단 뜻이었다.
석대중의 가슴 한편에 남겨두었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웬만하면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주천아 도망치거라. 내가 시간을… 큭! 주…천아…….”
꾀 많은 토끼는 세개의 굴을 파놓는 법이었다.
소가주인 석주천의 거처에는 분명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처처럼.
석대중은 석주천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를 제 등 뒤로 보냈다.
순간 등에서 불로 찌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죄, 죄송해요. 대숙…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네가… 네가…….”
놀랍게도 석주천이 석대중의 등을 칼로 찔렀다.
석대중은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마음이 더욱 아팠다. 비록 가주 자리를 놓고 분쟁이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었다.
석주천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저들이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야, 약속대로 저는… 컥!”
“숙부도 찌르는 네놈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있어야지.”
목숨을 구걸하는 석주천의 등에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혁련용후의 검이 그를 찌른 것이다.
순간 석주천은 믿을 수 없었다는 듯 눈이 커졌다.
“내…가… 죽으면…….”
“아, 그건 걱정 말게. 본가에는 역체변용술에 능한 자들이 여럿 있으니, 자네 역할을 대신할 수 있네.”
석주천은 죽어가면서도 억울함을 느꼈다.
대숙조차 팔아가며 목숨을 구걸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배신의 칼날이라니. 동시에 죄스러웠다. 자신의 칼에 찔려서 죽어가는 대숙에게.
“그럼 마무리를 해볼까?”
천진룡의 최후
“림주, 거처를 옮겨도 상관없겠소?”
귀림이 이가장, 정확히는 이세암천 이현성에게 귀속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기반은 황도인 북경에 있었다.
무엇보다 귀왕야가의 귀역이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현성과 함께한다고 하지만 귀림의 기반을 꼭 정주로 옮길 필요는 없었다.
“살문으로서 귀림이 사라진 이상 북경에 잔류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군. 물론 당장 모든 기반을 옮길 순 없기에… 점차적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림주의 뜻이 그렇다면야…….”
어차피 단기간에 귀림의 모든 기반을 정주로 옮기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우선 총단만 폐쇄한 채 귀백을 필두로 이백의 살수들을 호위삼아 먼저 정주로 보낸 상황이었다. 그 외에 귀왕야가의 귀역 등은 귀림의 여러 시설들을 점차적으로 폐쇄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가장의 그림자이자 수호자의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교매… 흠흠… 문 부인께서 귀림이 잘 정착할 수 있게 지원해주시오. 제갈 부인께서도 앞으로 귀림과 공조할 일이 많을 테니, 잘 협조해주고 말이오.”
“예. 서방님.”
“그리하겠어요.”
혼사를 치렀다고 하지만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이현성은 그녀들을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누가 이런 사내를 검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북경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이현성은 일행들과 함께 정주로 향했다. 고수들이 많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서 이가장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자칫 오래 발이 묶일 수 있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문종학과 문태규는 내심 섭섭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손주이자 조카가 생기면 바로 연락 달라는 덕담만 전한 채 놔주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문가장을 떠나게 되었다.
“장주님, 장주님을 뵙기를 청한 자가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손님이오? 알겠소. 만나보리다.”
갑자기 마차가 멈추더니 마부석을 차지한 귀림의 호위가 말을 전해왔다. 이동 중인 마차까지 세울 정도라면 매우 급한 용무라고 생각했는지 이현성은 만남을 허락해주었다. 마차 밖으로 나가자 제갈세가의 고수들과 귀림의 호위들 그리고 무림맹 고수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제갈세가, 화산파 일행 그리고 무림맹 주작당과 함께 하고 있었다. 제갈세가는 어차피 호북의 본가에 가기 위해선 하북의 정주를 지나기에 올 때처럼 동행했다. 한승과 이현영 때문에 무림맹 주작당과 화산파 일행까지 동행한 상황이었다.
이보다 호화스러운 동행은 흔치 않을 정도였다.
“본인이 이가장주인 이현성이오만… 귀하는 누구시오.”
“아…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은 중원상단의 행수인 여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하제일의 상단이라는 중원상단의 행수였다. 그리고 중원상단은 바로 석가장이 운영하는 상단이었다.
무엇보다 석가장주는 흡정혈왕 석대환.
문가장을 습격했다가 이현성의 손에 죽은 자였다.
그런 중원상단의 행수가 급히 찾아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여 행수시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용무이십니까?”
“이걸 읽어주십시오. 상단주께서 꼭 장주님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중은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랬다. 그는 석대중이 외부에 보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석가장의 무사들만 아니라 행수인 그 역시 외부에 보냈다.
다행히 그만은 혈천에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신을 읽은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이게 사실이오?”
“소인은 서신에 적힌 내용이 뭔지 모릅니다. 다만… 본가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서신에는 석가장의 상황이 적혀 있었다. 혈천이라는 거대세력에 의해서 석가장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도와준다면 중원상단의 하남 지부들을 넘겨주겠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중원상단은 천하제일의 상단답게 그들의 지부가 없는 성이 없었다. 하지만 천하에 상단이 중원상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대상단과 십대상단 등 대형 상단들 역시 수두룩했다.
석가장은 하북성을 포함해서 하남과 산동 그리고 산서의 상권을 쥐고 있었다. 그 외의 성에는 중요한 지역에만 지부를 세웠다. 그중 하나인 하남지부들을 넘겨주겠다는 것은 무척 큰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석가장이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석가장이 위험하다면 차라리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나보다 무림맹이 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오.”
“소인은 그저 서신을 전할 뿐입니다. 결정은 상단주께서 하신 일이십니다. 부디… 본가를 구해주십시오.”
“으음…….”
이현성으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하남지부들을 넘겨준다는 것은 하남성의 상권을 넘겨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가장이 보유한 중앙상단은 고작 정주만 장악한 중소상단이었다. 만약 중앙상단이 하남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목표로 삼은 십대상단도 더 이상 꿈은 아니었다. 문제는 중앙상단이 그럴 능력이 되냐였으며, 거래 상대가 석가장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죽은 석대환의 가문이니 온전히 믿을 수만은 없었다. 또한 이게 함정이 아니란 보장도 없었다.
고민하는 그를 보며 여중이 무릎을 꿇었다.
“제발… 대협… 도와주십시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여 행수님.”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여중을 보니 이현성은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현성은 석대중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함정이라면 너희 석가장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완전히 믿을 수 없음에도 받아들인 이유는 함정이라 해도 충분히 해결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제갈세가의 제갈인겸을 포함한 초절정고수만 다섯이고, 그에 근접한 고수가 서넛이 있었다. 그 외에도 제갈세가, 귀림 그리고 화산파 고수들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화경에 오른 자신이 있지 않은가.
죽은 석대환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한들 어찌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받아들였다.
“좋소. 앞장서시오.”
“가, 감사합니다! 대협!”
청을 받아들인 이현성을 보며 여중은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 그것도 무척이나 무서운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설마했는데… 사실이었군. 네놈이 이가 애송이더냐?”
“…이가 애송이가 누구인지 모르나. 본인이 이현성이외다. 귀하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때문에 이현성은 물론 모든 고수들은 무기를 쥔 채 경계를 했다. 불청객이 뿜어내는 흉포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화경에 오른 이현성조차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낄 정도였다.
두 사람 중에 화경고수가 있단 뜻이었다.
천하를 통틀어서 화경고수는 열을 넘지만 스물은 넘지 않는다. 물론 기인이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화경고수도 존재할 테니, 그보다는 많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분명 그 수는 적었다.
최소한 이현성은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허나 복장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천…진룡 대장군?”
“오호? 날 아는가.”
“백만금군 중에서도 귀하와 같은 기운을 가진 자는 딱 두 명. 그중 내게 그런 흉포한 살기를 드러낼 자라면… 답이 나오지 않았소?”
그는 역적이 되어 도주 중인 천진룡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자는 서황명. 천진룡의 부관이자 심복이며, 천씨세가의 가신이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살기와 혈향은 그들이 지금껏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다니 대단하군.”
“욱!”
“으윽!”
천진룡의 웃음소리에는 내공이 실렸는지 주변을 압박했다. 특히 내공을 쌓지 않은 중원상단의 여중으로서는 무척이나 위험한 순간이었다.
상황이 커지기 전에 이현성이 막아버렸다.
“용무가 있으면 말하시오. 역적이 되었다고 해도 한때 대장군이라 불린 분이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되었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
이현성의 말에 반응한 자는 서황명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