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설마, 당신… 으음…….”
내상을 입고 몸이 불편한 화옥령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구해준 백면탈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다.
허나 화옥령은 분노를 할 수 없었다.
이어진 백면탈의 전음 때문이다.
―제자의 목숨을 구할 생각이 없나 보군.
빠드득.
화옥령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간신히 참아내야만 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자를 드디어 찾아냈으나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제자의 안위가 먼저였다. 결국 화옥령은 의식을 잃어가는 이현영을 부축한 채 자리를 떴다.
그럼에도 괴한은 섣불리 추격할 수 없었다.
백면탈이 여전히 자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각이 지나서야 백면탈은 검을 거두고 사라졌다.
목표도, 방해꾼도 사라진 것을 깨달은 괴한은 복면을 거두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윽!”
놀랍게도 복면 속의 얼굴은 맹검 위지천이었다.
복면에 눈구멍이 없던 것도 애초 그에겐 필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수의가에 잔류한 그가 왜 화옥령을 노렸냐는 것이다.
“헉… 헉… 도대체 왜…? 헉…….”
지독한 두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위지천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복귀한다.”
하지만 이내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힌 채로 자취를 감추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 *
“사부님! 아니, 아버님… 제발… 영이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중년 여인은 어느 노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다. 죽어가는 묘령의 연인을 안은 채로…….
주변에 몇몇 노인이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지켜봤다.
허나 아무도 끼어들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지독한 사연을 알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단지 부녀지간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크나큰 일이었다.
노인은 중년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냉정히 말했다.
“감히 신성한 자하원(紫霞院)에 죄인이 들어오다니…… 어찌 보고만 있더냐!”
“…….”
노인 아니, 자하검제의 말에도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하원의 원로들조차.
그때 한 중년 사내가 나섰다. 그리곤 무릎을 꿇었다.
“령이를 용서하십시오. 아버님.”
“갈(喝)! 어디 본파의 장문인이 함부로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일어나게, 장문인!”
자하검제의 호통에도 화산파 신임 장문인 칠매신검(七梅神劍) 화천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화산파 장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자하원의 원로들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으나 허리를 숙였다. 그들에게 화옥령은 사매이자 사질이며,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무릎 꿇고 눈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를 살려달라고.
“너희들이 감히!”
“사형, 사손은 제가 살피겠습니다.”
“사제!”
“옥령 사질 일은 차후 문제 아닙니까.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무량수불…….”
도호를 읊는 사제 원량을 보며 자하검제 화월천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생명을 모른 척하기에는 그의 마음이 모질지 못했다.
“사제가 저 아이의 상세(傷勢)를 봐주게. 대신 너는 평생 화산 밖을 벗어날 수 없다.”
“아, 아버님!”
“갈(喝)! 넌 네 제자의 목숨보다 그 알량한 복수가 더 중하더냐! 너 때문에 상처 입은 이 애비의 마음은! 본문의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더냐!”
“…….”
자하검제 화월천은 절규에 가까운 호통을 쳤다.
화산파에 중죄를 지은 여식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파문을 명했다. 화산파 장문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나 평생의 한이 되었다.
“한낱 사내에게 눈이 멀어서 본파의 비보를 훔친 넌, 복수할 자격도 없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한천마녀(恨天魔女) 아니, 화산일미(華山一美) 화옥령.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검술을 갖춘 화산 장문의 여식.
모든 축복을 한 몸에 받은 그녀가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사랑하는 사내의 아기까지 잉태하고 말았다.
사랑에 눈이 먼 그녀는 사내의 간절한 부탁으로 화산파의 비보, 자하검보(紫霞劍譜)를 훔치고 말았다. 정확히는 자하검결의 구결을 외인에게 유출하고 말았다.
자신의 남자이니 외인이 아니란 구차한 명분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허나 사내는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자하검결의 구결을 알아낸 후 사라졌다.
사랑하는 여인과 뱃속의 아이를 두고.
그 충격에 화옥령은 유산을 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모든 영광을 버리고 오직 복수를 위해서.
자하검제가 그녀에게 파문이란 마지막 자비를 내려준 덕분이었다.
장문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지금 화월천은 더 이상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이 애비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다. 불쌍한 나의 딸아.’
결단
“미안하오. 교 누이. 아버님께서도 이번만은… 거절하시지 못하셨소.”
북경에 있어야 할 문태규가 정주의 이가장에 방문했다.
반가운 얼굴로 동생을 맞이했던 문교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가 들고 온 반갑지 않은 소식 때문이다.
“거절은… 어렵겠지.”
“명분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그랬다면 아버님께서 절 보내지 않으셨을게요. 교 누이.”
“하긴 천 대장군님이시라면 아버님께서도 힘드시겠지.”
“…교 누이.”
당대 황실에서 대장군의 칭호를 받은 인물은 몇 없었다.
그중 천 대장군이라 불리는 인물은 단 한 명, 동부군 총사령관 천진룡.
그는 북부군 총사령관 용불군 대장군과 함께 군권을 양분한 군부의 거두였다.
그런 천진룡 대장군의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천진룡 대장군의 차남과 문종학 내각대학사의 장녀를 맺어주자는 청이었다.
그간 많은 고관 가문에서 매파를 보내왔으나 모두 거절했던 문종학이었다.
문교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만은 어려웠다.
그만큼 천진룡 대장군의 힘은 강력했다.
“지금까지 마음대로 했는데… 더 이상 아버님을 힘드시게 할 순 없지…….”
“…….”
구슬픈 누이의 목소리에 문태규는 자신의 무력함이 안타깝기만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천씨 대장군가는 시가로서 견줄 가문이 몇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천진룡 대장군의 차남인 천운현 역시 부군으로서 부족한 사내가 아니었다.
황실에서도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난 인재이니, 문교교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그녀의 마음에 있는 사내는 천운현이 아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직 시일이 좀 있으니 마음부터 추스르시오. 교 누이.”
“…….”
문태규는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런 동생의 배려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문교교의 마음은 심란했다.
아니, 마음이 찢어졌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옥구슬과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려 내렸다.
“오라버니…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 * *
“천운현……?”
이현성은 오랜만에 만난 문태규를 보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러나 문태규의 입에서 나온 비보에 얼굴이 굳어졌다.
“천진룡 대장군님의 둘째 공자세요. 비록 차남이시지만, 장남인 천운성 공자 이상으로 명성을 떨치는 분이지요.”
“…그렇구나.”
이가장에도 동부군 출신이 여럿 있고, 천진룡 대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 유명했다.
이현성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는 군사들을 총지휘하지만, 출정 명령권은 가지지 못한다.
그건 육부 중 병부(兵部)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권한을 나누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동부군은 오군도독부 중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라고 할 수 있었다.
천진룡 대장군의 정식관직명은 정1품인 좌군도독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정 명령권도 쥐고 있었다.
수시로 침입하는 왜구로부터 유기적인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북방군. 즉, 후군도독(後軍都督)인 용불군 대장군과 그만이 가진 특혜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각대학사가 육부조차 간섭하는 권한이 있어도 천진룡 대장군에겐 통하지 않았다.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형님… 아, 아닙니다.”
문태규는 이현성에게 막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라고 해서 별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괜히 말해서 속만 썩을 뿐이었다.
“술이나 한 잔 주십시오.”
“…한잔하겠느냐. 그래, 한 잔 하자구나.”
마음이 답답한 것은 이현성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잠시 덮었다.
문교교를 여인이 아닌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구나.’
술이 강하게 고픈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 * *
또르륵.
고운 빛깔의 술이 잔에 부어졌다.
그런 술잔을 섬섬옥수와 같은 손으로 꽉 쥐었다.
“켁! 켁!”
술을 단숨에 마신 여인이 기침을 토했다.
울적한 마음과 달리 그녀의 입에 술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목의 괴로움 따윈 마음의 괴로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켁! 켁!”
“마시지도 못하는 술… 왜 그렇게 마셔?”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같은 여인이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허나 그녀는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지략가가 와도 통탄할 정도로 뛰어난 지혜를 가졌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무공까지 익혔다.
그것조차 놀라운데 가문 역시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했다. 즉,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 바로 그녀였다.
“왔어요? 언니.”
“그만 마셔, 속 버리겠다.”
“속 좀 버리면 어때요. 차라리 속 좀 버리는 게…….”
“…교교야.”
독한 술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 괴롭기 때문인지 문교교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은 제갈현지는 문교교의 술잔을 빼앗더니 단숨에 마셨다.
그리곤 술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래! 마시자. 직성이 풀릴 때까지… 같이 마시자.”
“언니…….”
그녀들 사이에 그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술잔만 오고갈 뿐이었다.
그렇게 한 병을 비우자 그제야 문교교가 울먹거렸다.
“언니는… 좋…겠어요. 언니는…….”
“…….”
풍운각주인 제갈현지는 이가장에서 누구보다도 귀가 밝았다.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문교교에게 거절할 수 없는 청혼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갈현지로서는 강력한 연적이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2년간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문교교는 강력한 연적인 동시에 아끼는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 문교교가 마음에도 없는 사내를 부군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명가의 여식으로서 당연한 의무일지도 모른다.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랄 때, 이미 정해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갈현지는 문교교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문교교는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제갈현지는 토닥여 주었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