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161화 (161/314)

161화.

‘하! 아버님과 할아버님께서 날 배려해주시지 않았다면 나 역시… 교교와 다를 바가 없었겠지.’

그녀는 다시 한번 부친과 조부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단식 투쟁과 이현성이 그럴 가치가 있는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 또 있었다.

‘아가. 이 할미가 네 마음을 지켜줄 테니… 그만 울거라. 아가…….’

그녀는 바로 칠현마금이라고 불리는 독고혜였다.

음공을 포기하고 사랑을 찾아간 딸과 절연한 그녀였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외손녀와 외손자가 태어났다는 말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귀를 막았다.

그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뒤늦게 딸의 죽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딸을 데려가 놓고 지키지 못한 사위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딸을 지켜주지 못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십여 년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만난 외손녀였다.

딸을 빼다 박은 어여쁜 외손녀, 문교교.

이번에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딸에게 속죄하는 길이라 여겼다.

독고혜는 독문무기이자 악기인 칠현마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누이… 누이가 불쌍해서 어쩝니까? 형님.”

“…….”

한껏 취한 문태규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내공도 없는 그가 술을 연거푸 마셔됐으니 금방 취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제정신을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술을 연거푸 마신 것이다.

그에 반해 이현성의 정신은 또렷했다. 일부러 내공으로 취정을 배출한 것도 아닌데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취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순간 이현성은 안타까웠다.

취하는 것도 불가능한 자신의 몸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이가 불쌍…….”

“후…….”

결국 문태규는 술을 이겨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이현성은 그를 옆자리에 편히 뉘였다.

그리고 다시 술을 한잔 마셨다.

입안에 알싸함이 퍼졌으나 여전히 취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성은 자신을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장원의 밖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한 노파였다.

“장로님… 부르셨습니까.”

“장주, 일전에 내가 물었던 것을 혹시 기억하고 있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정하게. 그 아이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노파의 정체는 칠현마금 독고혜였다.

그녀는 이미 수개월 전에 이현성에게 요구했다.

증손녀인 문교교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마음이 없다면 그만 놓아주라고.

하지만 이현성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교교는 이미 천 공자와…….”

“사위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그 아이를 더 이상 울게 만들 수는 없네. 자네도 확실하게 말해주게. 사내는 핑계를 대서는 안 돼.”

“…….”

머뭇거리는 이현성을 보자 독고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칠현마금의 줄을 튕겼다.

띠~잉!

퍽!

칠현마금의 줄이 튕겨지며 음파가 이현성을 가격했다.

“내가 자넬 잘못 봤군.”

“…….”

“이익!!”

이현성은 그녀의 음공을 저항 없이 몸으로 받아냈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이 독고혜를 더욱 화나게 했다.

띵!

퍽!

띵! 띵! 띵!

퍽! 퍼퍽! 퍼퍽!

호신강기로 막아낼 수 있었으나 이현성은 묵묵히 모든 음파를 받아내었다.

그냥 맞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현성은 즉시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물러나게.

―…….

기척의 주인은 암천주의 호법인 암월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지만, 이내 이현성의 뜻에 따라 물러났다.

독고혜가 이현성의 목숨까지는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허나 독고혜의 분노는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현성의 전신은 멍투성이가 되었다.

“못난 녀석…….”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독고혜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이현성은 그녀의 음공보다 그 한마디가 더 아팠다.

“난… 정말 못났구나. 못났어…….”

* * *

“모두 잘 지내세요. 그간 고마웠어요. 언니… 장원을 잘 부탁해요.”

“교교야…….”

결국 문교교는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년간 이가장의 행정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제갈현지와 문교교 덕분이었다.

특히 문교교는 가솔(고용인)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때문인지 본가로 돌아가는 그녀를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이 바로 가솔들이었다.

“북경까지 잘 모시게. 묵 대주.”

“걱정 마십시오. 규 장로님. 저희 흑룡대가 목숨을 걸고 북경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북경으로 향하는 마차에는 문교교와 문태규 그리고 독고혜가 탑승했다.

그리고 그들의 호위를 위해서 흑룡대가 동행했다.

북경출신인 흑룡대는 그들을 호위하기에 적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서 나왔으나 한 사람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장주님께서도…….”

“그만 출발하자구나.”

제갈현지가 그에 대해서 변명하려고 했으나 독고혜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흑룡대주인 묵장진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마부석에 앉았다.

그렇게 문씨 남매와 그들의 외조모 독고혜는 이가장을 떠났다.

* * *

“…….”

이현성은 집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빠서 떠나는 문교교를 배웅하러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가지 못한 것이다. 차마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마차가 떠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누구도 그의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후회…되세요?”

“…….”

누군가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와 대답과는 상관없이 말이 이어졌다.

“이러실 것을 왜, 교교 동생을 잡지 않으셨어요.”

“…….”

제갈현지의 물음에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현성은 어떤 말이나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물음이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짝!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인가요! 이렇게 힘들어 할 것이면 붙잡기라도 하지. 이게 뭐예요! 당신답지 않게…….”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며 이현성은 처음으로 반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제갈현지가 말했다.

그리고 참아왔던 울분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현성은 말을 잃었다.

변명거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갈현지는 손을 뻗어서 부어오른 이현성의 뺨을 어루만졌다.

“제가 떠나도… 이렇게 혼자 끙끙거리실 건가요?”

“…….”

“솔직히 저도 지쳐가요. 제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제갈 소저.”

제갈현지는 결국 강수를 던졌다.

그녀도 제법 나이를 먹었다.

무림여협들이 일반 여염집 규수와 달리 혼사 늦는 편이라고 하지만, 초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예전과 달리 자신감이 떨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현성은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척했다.

그러던 차에 문교교가 떠났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제갈현지는 자신이 떠나도 그가 이렇게 행동할 것 같았다.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녀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제갈현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옷을 풀어 헤쳤다.

이를 본 이현성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보기 흉한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하지만…….”

“저를… 당신의 여인으로 만들어주세요. 저는 교교 동생과 함께라도 상관없어요.”

“…….”

그녀의 파격적인 행동과 언사에 이현성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잠깐이지만 고민하던 이현성은 제갈현지에게 다가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곧 굳어졌다.

그가 제갈현지의 옷을 조심스레 여며주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닙니다.”

“…….”

이현성의 행동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제갈현지는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울컥하는 감정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조만간 제갈 가주님을 뵙겠습니다. 이 뒤는 그 후에…….”

“그, 그럼……?”

제갈현지는 놀란 얼굴로 이현성을 쳐다봤다.

기쁨을 담은 눈물이 그녀의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제갈현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현성은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고 제갈현지를 꼬옥 안아주었다.

잠시 후 그녀를 떼어낸 이현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갈세가에 다녀오기 전에… 북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교교를 데려오세요.”

“고맙습니다. 아니, 고맙소. 지매.”

그의 말에 섭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한 남자의 사람을 바라는 여인이니까.

이현성을 홀로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허나 사랑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현성을 위해서 문교교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게 정말 잘해줘야 해요.’

제갈현지는 결국 돌아서서 이현성이 모르게 살짝 눈물지었다.

허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은 제갈현지만이 아니었다.

* * *

“그만 우시오, 교 누이. 눈이 많이 부었소.”

“흑… 흐윽…….”

문교교는 울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울음을 참으려도 안간힘을 써도 눈이 부울 정도였다.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독고혜는 일부러 외면했다.

외손녀의 슬픔에 전염되었는지 그녀의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자신이라도 대신 독해져야 한다.

미련은 문교교를 망치는 독이 될 수 있다.

‘고얀놈…! 고얀놈…….’

문교교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독고혜의 마음속 분노는 커져만 갔다. 어여쁜 외손녀를 눈물짓게 만든 이현성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그를 더 때려주지 못해 아쉬울 정도였다.

보다 못한 독고혜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만 울거라. 네 마음도 몰라주는 그런 사내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거라.”

“흐흑… 할머니…….”

싸늘한 그녀의 말에도 문교교의 훌쩍임은 가라앉지 않았다.

독고혜는 더 이상 다그칠 순 없는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숨기지는 않았다.

덕분에 문태규만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불안해했다.

문교교와 달리 그는 독고혜와 몇 번 만나지 않았다.

외조모가 한 성격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잘 가던 마차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때 독고혜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고얀 놈…….”

“할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독고혜의 말뜻을 알 수 없던 문태규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장로님.”

“하, 할머님! 혀, 형님이십니다.”

“고얀놈, 네놈이 여긴 무슨 용무더냐?”

“교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독고혜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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